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이 세상에는 홑으로 세워지는 법은 하나도 없습니다. 반드시 무엇인가에 의지해서 세워지죠. 흔한 말로 그림자는 나무에 의지해서 있게 되고, 메아리는 소리에 의지해 있게 되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은 주로 사물에 대한 집착을 여의게 하기 위해서 한 말이지만, 일반적으로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모든 존재는 예외 없이 서로 상대되는 짝에 의지해서만 성립될 수 있는 겁니다. 비근한 예로 이 세상에 추함이 없으면 아름다움이 어떻게 혼자서 세워지며, ‘이 없으면 어떻게 이라는 개념이 세워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사람들은 왕왕 이 둘을 전혀 서로 상관이 없는, 독립적인 존재로 인정하고는, 이 중에 하나만 남겨두고 다른 하나를 없애려고 하는 바람에 갈등과 투쟁이 생겨서 세상이 이처럼 시끄러운 겁니다.

그런데 이미 밝힌 바와 같이, 모든 법은 실로 자체의 성품’(體性)이 없는 것이어서, 이 모두가 본래 한 성품인데, 범부들이 다만 이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알지 못해서 무명(無明)이 된 겁니다. 그래서 모든 법이 본래 <지금 있는 그대로> , 좋은 것은 좋은 것인 채로, 나쁜 것은 나쁜 것인 채로 본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겁니다. 긴 것짧은 것’, ‘많은 것적은 것이 그 본성에 있어서 평등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이것이 곧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얻는 첫걸음입니다. 결코 학()의 다리를 자르고 오리의 다리를 이어서, 그 키가 가지런하게 되고 나서야 비로소 평등한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그와 같은 어리석은 생각을 붓다는 악평등(惡平等)이라 하여 철저히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작금의 세태는 어떻습니까? 도 없고 내 것도 없다」는 말이나, 불공재(不共財; 재물을 함께 하지 않는) 중생을 슬퍼한다」는 등의 말을 잘못 알아듣고, 마치 원시공산사회처럼 되는 것이야말로 궁극의 이상향이라도 되는 양, 온갖 무리수를 감행하면서 그것을 마치 사회정의의 구현이라도 되는 양 착각하고 있으니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현상계의 모든 존재는 허망한 것이므로 집착하는 마음을 일으키지 말라」고 한 말이요, 그렇게 해서 사람들의 마음이 청정해지면,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상이 곧 불국토’(佛國土)라는 것을 일깨우기 위해서 한 말인 겁니다. ‘이상향이라는 건 전혀 사람들이 머리로 그려낸 것이며, 그런 것은 실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원컨대 붉은 띠에 주먹이 불끈거리는, 그런 현장에서 성직자 차림을 한 모습들이 보이지 않게만 돼도, 이 세상은 한결 조용하고 살기 편안한 사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 가진 게 없어서, 배운 게 없어서, 힘이 없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면서도 그 아픈 가슴을 쓸어안고 살아야 합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그 쌓인 을 안으로만 새기면서 살아가지 않을 수 없는, 그 안타까운 현실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겠습니까? 백 번 이 쌓일 만도 하죠. 그들의 그 아프고 억울한 사정을 현실적으로 해소해 주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지금도 그 쓰라린 현장을 누비면서 묵묵히 애쓰는 어진 이들이 많지만, 그 끝이 보이지 않는 난제 앞에서 늘 자신의 무력함을 한탄하며 시름겨워하는 어제오늘 아닙니까? ···

그러나 ― 그들이 현실적으로 겪고 있는 그 숱한 아픔과 억울함, 가진 게 없어서, 힘이 없어서 겪을 수밖에 없는 그 가슴앓이, 그 원하고 바라는 일들이 모두 한갓 꿈과 같은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 깨닫도록 돕는 일, ― 이것이 바로 성직자들의 몫인 겁니다. 이 길이 아무리 어려운 길일지라도, 이 길만이 영원하고 참된 구원의 길이라면 그것이 아무리 외롭고 험한 길일지라도 끝내 가지 않을 수 없는 게 바로 성직자들이 스스로 택한 길이 아니겠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그 구원의 손길을 마냥 성직자들의 몫으로만 돌릴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전혀 우리들 각자의 문제인 겁니다. ‘진실이 뭔지 알지도 못하고, 또 알려고도 하지 않는, 이 세상의 보통 사람들 가운데에도, 간혹 꼿꼿한 선비 같은 기상을 가진 어진 이들이 있었어요. 그들은 아무리 어려운 일이 닥치더라도 그것을 남의 탓으로 돌리고 세상을 원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적어도 세상이 지금처럼 각박해지기 전엔 그런 어진 마음을 가진 이들이 많았던 게 사실입니다.

가 뭔지, ‘불법이 뭔지 알지 못하는 범부들 가운데에도 이렇게 군자(君子)다운 기상을 지닌 이들이 있는데, 더구나 세상 인심이 그저 저만 알고, 개인의 입신출세만을 좇으면서, 온 세상이 거친 탁류에 휘말려 있는 가운데서 오직 홀로 몸을 빼내어’(出身) ‘보살(菩薩)의 길을 택한 사람에게 있어서야 더 말해 뭣하겠습니까? 더구나 이 세상이 몽땅 나의 업의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서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러므로 <세간세간의 모든 일들은 각기 저마다의 업()에 의해서 제 마음속에 허망하게 나타난 그림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깨닫는 일이야말로 구원의 시작이요 끝인 겁니다. 결국은 제가 저를 구하는 길밖에 없는 거예요. ‘나의 깨달음을 남이 어떻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깨달음, 진정한 구원의 길은 오직 모든 법의 실상을 스스로 분명히 깨달아 마치는 길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무엇이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일까요? ···

△ 모든 법은 인연생기(因緣生起)이므로 본래 제 성품이 없습니다.

△ 이 <본래 성품이 없는 모든 법>이 오직 미혹(迷惑)마음에 의해서 그 모습이 갖추어지고, 이어서 그 환()과 같은 모습이름이 붙여 지게 되는 겁니다.

△ 이렇게 해서 <허망하게 생겨난 온갖 대경(對境)에 기대면서> ‘마음은 움직이게 됩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정한 성품도 정한 모습도 없는 것이어서, 의지할 바도 머무를 바도 없는, 허공 같은 존재인 겁니다. 따라서 이것에 의지해서 세워진 모든 이름모습은 끝내 허공과 같아서 실다운 존재’(實有)가 아닙니다.



이 같이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며, ‘있음도 아니고 없음도 아닌, 실로 환()과 같은 <묘한 존재>(妙法)가 바로 모든 법의 실상인 겁니다. 마음을 떠나서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습니다. 마음이 변해서 이 되는 게 아니고, 마음은 본래 정한 성품도 정한 모습도 없기 때문에, 다만 인연을 만나면 이렇게 갖가지 세간의 형상’(世間相)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겁니다. 따라서 마음이 그대로 이고, ‘이 그대로 마음인 거예요. 마음 밖에는 진정 상대해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는 겁니다. 이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이 마음으로 헤아리고 따지고 구해서 알아내야 할 만한 이 따로 있을 수 없고, 또한 마음으로 받들고 지키고 행()해야 할 만한 도 없는 것입니다.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스스로는 작용이 없으면서, 항상 이렇게 인연에 감응해서 찰나찰나 온갖 법을 드러냅니다. 오직 그저 드러내기만 하는 거예요. 마치 거울이 그저 무심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기만 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다예요.

이렇게 해서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마음의 거울에 허망하게 나투어진 것말고는 달리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확연히 깨달아야 합니다. 결단코 이 마음이외에는 한 법도 없습니다. 따라서 모름지기 참된 수행자라면 결코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려서는 안 됩니다. ‘마음은 스스로 항상 이렇게 환히 신령한 광채’(靈光)를 놓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지금 당장 회심(廻心)하여, <스스로 항상 온전한 참 마음’(眞心)>을 밝힐지언정, 헛되이 밖으로 을 구해 내달으면서 허송세월 한다면 이 어찌 천추에 한을 남길 일이 아니겠습니까?

마음속에는 머물러 둘 단 하나의 법도 없고, 마음에서 끄집어낼 단 하나의 법도 없습니다. 인연에 감응해서 <한 찰나 한 생각>으로 수없이 많은 을 말아내고, 또 거두어들이고 하더라도 그것은 다만 마음의 거울에 비친 그림자일 뿐, ()되 나는 바가 없고 멸()하되 멸하는 바가 없는 겁니다. 이것은 별나게 특별한 이치가 아닙니다. 다만 이 본래 그런 겁니다. 마치 <112>가 지극히 평상한 이치이 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이런 경우에조차도 ― 그것은 다만 비유로 한 말일 뿐인데도 ― 말이나 좇고, 글귀나 뒤지면서 법집(法執)에서 헤어날 줄 모르는 무리들은 이 마음뿐인 이치의 참뜻을 알지 못하고, 목소리를 차악 깔고는 말합니다. 「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는데 어째서 둘이 되는가?」??? 이런 친구들은 무생(無生)의 도리를 잘못 알고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은 결코 늘고 줄고 하는 일이 없다」는 방편의 말씀에 들어앉아서, 그럴싸하게 말하기를,「하나에다 하나를 보태도 여전히 하나이다」라고 말하면서, 저도 속고 남들도 속입니다. 그들은 성인(聖人)들이 중생의 치우친 집착을 깨쳐주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한 말을 인 양 받아들여서, 이것을 최상의 지견으로 삼고는, <112>는 범부 지견이고, <111>이야말로 성인의 지혜라고 떠벌리기를 서슴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이른바 팔만 사천 법문이 몽땅 방편의 말씀입니다. 결코 진실은 말이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붓다는 한 마디 말도 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수행자라면 결코 에 떨어져서, 그 말 가운데서 함부로 지견을 말아내서 짊어지고 다니는 일이 있어선 안 됩니다. 물론 남의 말을 무턱대고 배척하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결국 남의 말만을 좇는 자도, 남의 말을 배척하는 자도 끝내는 깨칠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본인 선사(本仁禪師)가 어느 날 상당하여 말하기를, ···

『노승(老僧)은 항상 <소리의 앞이나 이야기의 뒤에서>(聲前句後) 남의 집 아들딸들을 들뜨게 하고 싶지 않았느니라. 왜냐하면, 소리는 이 소리가 아니요, ‘은 이 빛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했어요.

이때 어떤 중이 묻기를, ···

『어떤 것이 소리가 소리 아닌 도리입니까?
『빛이라 하면 되겠는가?
『어떤 것이 빛이 빛이 아닌 도리입니까?
『소리라 하면 되겠는가?

이에 중이 절을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말해 보라. 그대에게 말을 한 것인가? 그대에게 대답을 한 것인가? 만약 누군가가 가려낼 수 있으면 그에게는 <들어갈 곳>(入處)이 있다고 허락하리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