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 이제 이론이론으로 치고, ‘깨달음깨달음으로 치고 하면서, 마음먹고 한번 그 숫자의 세계를 탐험해 볼까요? 도대체 그 숫자란 뭘까요? ···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 내력을 알아보려면 우선 「그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고 따져보는 게 상례죠. 숫자도 한번 그런 식으로 그 본색을 벗겨보도록 합시다.

가령 여기 열 사람의 도반(道伴)이 있다고 칩시다. 이때 그 이라는 숫자가 이루어지려면, 우선 하나, , ··· 하고 세어서 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너무 당연한 일이니까 웃음이 나기도 하겠죠. 그런데 문제는 이때, 여러분이 세고 있는 그 대상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겁니다. 제대로 된 본분납자라면 결코 어떤 경우에도 만법의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잊는 일은 없습니다. 따라서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無依住性)을 허무는 일은 없지요. 즉 순일(純一)한 허공성으로서의 본분밖에는 아무것도 볼 것이 없는 그들은 분명히 목전에 티끌 하나 없다는 걸 압니다. 따라서 당연히 그들은 어느 것 하나 허물 것이 없다는 것도 알지요.

무의주성’(無依住性)이란 곧, ‘있음에도 속하지 않고 없음에도 속하지 않는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본분에 대한 설명 내지는 본분을 드러내게 하기 위한 방편으로 설해진 것입니다. 따라서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을 허물지 않는다>는 말은 곧 <자기의 본분을 등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즉 본분을 밝히고 보면, 저절로 의지할 것도 머무를 것도 없게 되는 것이지, 의지의 힘으로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경지를 허물지 않으려고 안간힘 쓰는 게 아닙니다. 다만 선지식이 늘 공부하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들지 않도록 마음을 쓰면서,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 없는 성품>을 허물지 않도록 경책하는 겁니다. 그것도 주로 학인이 나름대로 수승(殊勝)한 경지를 증득하고는 이른바 지족심(知足心; 만족하는 마음)이 생겨서 그에 머물려고 할 때 쓰는 경책인 겁니다. 만약 성품 없는 도리를 잊어버리고는 마음밖에서 실재(實在)하는 을 본다면 그것을 일러 무명(無明)이라 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들 눈밝은 사람들도 역시 눈앞에 열 사람의 도반을 봅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라는 숫자가 무엇에 의지해서 세워졌는지, 무엇을 가리키는 숫자인지를 똑똑히 압니다. 그러니까 그 많고’ ‘적음이나 같고’ ‘다름등이 전혀 빈 말일 뿐이라는 걸 안다는 말입니다. 다만 시절과 인연을 따르면서, 때에 따라 다름을 나투기도 하고 같음을 나투기도 하지만, 그 모두가 다만 거울 속의 그림자와 같아서 전혀 실()다운 존재가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아는 거죠. 마치 손가락으로 허공에 동그라미를 개 그려놓은 것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여느 사람들이야 성품 없는 도리가 뭔지, 도무지 알 턱이 없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이면 ’, ‘스물이면 스물’, 붙박이로 그 양()이 확정되어 버리는 거죠. 결국 그 본성(本性)이야 어떻건 간에, 이렇게 해서 모든 숫자는 그 양이 결정되고, 이로부터 요지부동의 권위(?)를 부여받게 되는 겁니다. ‘사과를 네 토막냈건, ‘허공을 네 토막냈건, ‘은 어디까지나 이라는 거죠.

그런데 숫자뿐 아니라, 모든 법은 혼자서 성립될 수는 없는 일입니다. 즉 이 의타기성(依他起性)은 만유의 공통분모인 겁니다. 따라서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전적으로 타()에 의지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므로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과 같고 과 같은 존재인 겁니다. 그렇다면 여기 어떤 숫자가 있을 때, 그것이 무엇을 계량(計量)숫자인가를 물을 것도 없이, 그것은 곧 존립의 근거를 잃어버리지 않겠어요? 그러나 이 말은 물론 숫자’, 즉 그 수학적 언어를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언어는 여전히 정보를 전달하는 데 유용한 도구이긴 합니다. 그러나 가령, ‘을 읽거나 을 들을 때, 또는 목전에서 사물을 볼 때, 여러분의 체험은 어디까지나 여러분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지, 그 글이나 말이나 또는 그 사물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의미로 한 말입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이해해야 합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모든 사물은 본래 스스로는 전혀 성품이 빈 것인데, 다만 보는 사람의 업식(業識)의 투영(投影)으로 허망하게 나타난 것일 뿐이라는 겁니다. 만법이 유식’(萬法唯識)이기 때문에 전혀 집착할 게 없다는 뜻이죠. 요컨대 이 세상의 일체 존재는 몽땅 의식이 요술처럼 지어낸 것인데, 아니 의식이 온갖 법을 지어내는 게 아니고, ‘의식이 곧 온갖 법인데, 그런데 그 의식이라는 게 본래 근본이 빈 것이어서, 나는() 일이 없는 것이므로, ‘온갖 법도 또한 그런 게 아니겠어요? 따라서 이 세상 일체 만유는 전적으로 사람들의 한 찰나 한 생각에 매어 있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 「그대가 그렇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고, 그대가 그렇지 않다고 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다」는 거죠.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에 떨어지는 일은 없겠지요. 더구나 그 에 담긴 내용이 전혀 허망한 것이라면 더 더욱 그렇지 않겠어요?

그러므로 지금까지 모든 숫자들이 누리고 있던 그 터무니없는 권위의 베일을 벗겨버림으로써 그들 앞에서 까닭 없이 주눅이 들어 있던 우리들의 마음을 본연의 자리로 되돌려 놓자는 겁니다. 그것들은 저 바깥에서 와 맞서서, 도도한 몸짓으로 나를굽어보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 본래 자신이 지어낸,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꾸려나갈 때, 내 뜻에 따라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나의 손에 익은 하나의 연장에 불과했던 겁니다. 아니 적어도 그래야만 이치에 맞다는 겁니다.

여러분, 「우리들에겐 능히 긴 것을 짧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할 수 있는 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말이 믿어집니까? ― 요컨대 그런 이 이 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순전히 여러분의 마음에서 나온다는 사실입니다. ― 이런 법문은 별로 좋은 법문이 아닌 것이, 사람들이 자칫 이 말을 잘못 알아듣고는, 잘만 하면 내 마음에도 그런 이 생길 수 있겠다는 허망한 생각을 낼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물을 망령된 업식으로 제가 지어낸 것임을 알지 못하고, 마음 밖에서 실재하는 사물을 보는 사람에게는 결코 그런 일이 일어날 턱이 없죠. ‘마음뿐’(唯心)인 도리를 사무친 즉, ‘부처 지혜에는 그런 이 본래 갖추어져 있는 겁니다. 애쓴 보람으로 그런 이 생기는 게 아니고, 마음에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뿐이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요?

우리는 이미 무공용지(無功用智)에 대해 자세히 밝힌 바가 있습니다. 즉 본래 라고 할 만한 가 없고, 따라서 내 마음이라는 게 따로 있을 턱이 없지만, 그런데도 영락없이 마음으로 짓는 모든 일이 가 일으키는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작용은 우리의 본래 한량없는 근본 마음이 스스로는 전혀 작용이 없으면서, 순전히 인연에 감응해서 꿈처럼 허깨비처럼 나투는, 이른바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됩니다. 즉 다시 말해서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그가 공력(功力)을 들여서 그렇게 작용을 일으키는 게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본래 길 것도 없고 짧을 것도 없는 가운데서, 전혀 중생들이 마땅하다고 여기는 바에 응해서 참 성품’(眞性)이 그렇게 응현(應現)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어떤 개체에게 그런 힘, ― 즉 긴 것을 짧게 하고, 짧은 것을 길게 할 수 있는 힘 ― 이 있는 게 아니라, ‘이 본래 그렇다는 말입니다.  



본론으로 돌아가서, ··· 지금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는,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이지, 결코 경험그 자체는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고자 하는 겁니다. 따라서 「에 휘둘리지 말고, 뜻에 맡겨 자재하게 쓰라」는 이 도 매우 좋은 법문이긴 하지만, 그러나 이것도 역시 어디까지나 일 뿐이지, 여러분의 산 체험은 이 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는 건 분명한 이치 아니겠어요? 즉 여러분이 이 말의 뜻을 알건 모르건, 또 믿건 믿지 않건 간에 그것은 여러분의 찰나찰나의 산 체험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겁니다. 화살은 이미 은하수를 지나갔는데, 뒤늦게 그 화살의 자취를 더듬는 게 바로 그 속을 더듬는 일이지요.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사람들의 <알고 모르는 것>과는 상관없이 늘 스스로 환히 밝은 광명입니다. 그것은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기 때문에 항상하고 참된 겁니다. 따라서 이 참 성품’(眞性)은 생멸도 없고, 왕래도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할 뿐입니다. 따라서 그 감응(感應)에 대해 말하지만, ‘감응감응이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감응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그 감응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아니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는 모든 장엄’(莊嚴)도 다만 그 이름이 장엄일 뿐, 실제로 성취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참, 사람을 어정쩡하게 만들지요? 그건 여러분의 마음이 늘 쓸데없이 밖으로만 내닫던 뒤끝이라서, 막상 손을 털고 제 자리로 돌아가려니까 괜히 휘청거리는 겁니다. 여러분의 본래 스스로 청정한 그 깨달음의 성품은 그런 여줄가리 일들과는 상관없이, 늘 제 자리에서 환히 빛을 놓고 있는 겁니다. 심지어 여러분이 그렇게 휘청거리는 모습도 그 광명에 의해서 비추어진 거라는 말입니다.

불가(佛家)의 말투를 빌리자면, ― 사람이 그것을 믿건’ ‘믿지 않건’, 또 그런 일이 일어나건’ ‘일어나지 않건’, 그건 모두가 둘째 자리이다 ― 라는 거죠. 천 성인(千聖人)이 일찍이 기웃거린 일이 없는 그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은 인간이 이 마음을 이끌고 넘볼 수 있는 자리가 아닌 겁니다. 천 성인도 알 수 없다는데, 범용(凡庸)한 무리가 어찌 감히 넘볼 수 있겠습니까? 그 영성(靈性)이 곧 본래 마음입니다. ‘마음이 일어나면 온갖 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지는, ― 이것은 여러분이 늘 껄떡하는 그 신통(神通)이 아니고, 법이 본래 그런 겁니다. 갈고 닦은 공덕으로 그렇게 되는 게 아니고, ‘이 본래 스스로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만약 털끝만큼이라도 통()하고 싶은 생각이 있다거나, 또는 수행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신통이라는 게 나타나더라도 올바른 수행자라면 얼른 이것을 털어 버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곧 유위(有爲), 유루(有漏), ‘번뇌’(煩惱)이기 때문입니다. 번뇌에 물든 마음에 어찌 여래의 십력’(如來十力)이 깃들겠습니까? 그러므로 아직 온전히 제 자리를 얻지 못했거든 그 마음움직임 없는 자리’(不動地)에 가만히 둘지언정, 결코 바깥을 기웃거리거나, 뒤를 힐끗거리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설사 제 자리를 얻었다 하더라도 일승(一乘)의 보살은 얼른 거길 지나쳐 버리는 법입니다.  



불확정성원리(不確定性原理)를 제창한 과학자들은 「이제 모든 시간적 공간적 측정치는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가 없다」고 서슴없이 내뱉음으로써, 가히 과학자로서의 자신에게 스스로 파산선고를 내리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놀라운 선언으로 말미암아, 도리어 거추장스럽기만 한 묵은 껍질을 깨끗이 벗어 던질 수 있었으니, 이 얼마나 기막힌 역설입니까? 이것은 결코 시간적 공간적 측정치를 경시, 내지는 무시하자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것들에 부여되었던 그 절대성(絶對性)이라는 이름의 덧칠을 벗겨버림으로써 즉, 소리로 하여금 언어의 틀에서 벗어나게 함으로써 이른바 소리 티끌’(聲塵)에 끄달리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그러나 과학자들의 이와 같은 혁명적인 선언이 있은 지 어언 백 년이 다 되어 가는데도, 아직 이 숫자가 갖는 위력은 조금도 수그러들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까는 숫자가 생겨나게 된 내력을 살펴봤지만, 이번에는 그 숫자가 일단 성립된 뒤에 어떤 모양으로 기능하는지를 알아보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