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인연으로 나는 모든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는 듯할 뿐, 실은 전혀 나는 게 없다」는, 너무 자주 들어서, 마치 약국의 감초와도 같은 이 말은, ― 만약 이 말이 갖는 참뜻을 깊이 통찰한다면, ― 「과연 이 말은 한 말인가, 과연 이 말은 들은 말인가?」 참, 별 희한한 말도 다 있지 않습니까? 경에 이르기를, 말함들음을 몽땅 거둔다」(說聽全收)고 한 것은, ‘마음뿐’(唯心)인 도리가 몰록 현전(現前)해서, ‘한 말들은 말이 몽땅 한 마음으로 거두어지면, ‘말한 자말한 바, ‘들은 자들은 바도 모두 다 허공꽃으로 돌아가고 맙니다. 그러나 이건 결코 언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닙니다. 거듭되는 말이지만, 다만 실상(實相), 말하고’ ‘듣고하는 가운데, 그 모두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거기에는 작용의 주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아 알아서 집착을 일으키지 말라는 것뿐입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어떻게 작용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지금 바로 이 앞에서 열심히 땀흘려 일하고 있을 때, 실은 놀랍게도 거기에 일하는 자가 없는 겁니다. ‘일하는 자가 없는데 이 어찌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따라서 이 모든 것은 다만 스스로는 본래 작용이 없는 진여본체(眞如本體)가 인연에 감응(感應)해서 나투는, 그림자나 메아리 같은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진여본체는 본래 스스로 생멸이 없고, ‘인연은 이것이 인연화합을 이룰 만한 단 하나의 실다운 법이 없으므로, 따라서 인연은 이것이 인연이 아닌 것이며, ‘감응또한 진여본체가 본래 작용이 없으므로 따라서 감응은 이것이 감응이 아닌 것이며, ‘성취’(成就)도 또한 성취가 아닌 것입니다. ― 바다는 인연 따라 종일 물결치지만, ‘바다자체는 조금도 움직이거나 변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움직이는 물결과 그 본체인 은 본래 하나인 거예요.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것입니다. ―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이 그대로 말하지 않는 것,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의 이치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억지로 그렇게 말한 거예요.

우리는 이제 이라는 게 본래 이렇게 ― 뿌리 없는 나무가 불지도 않는 바람에 종일 나부끼듯 ― 허망한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맞는 말이고, 무엇이 틀린 말이며, 또한 무엇이 칭찬하는 소리고 무엇이 욕하는 소리겠어요? 이렇게만 알아서 일체시(一切時) 일체처(一切處)에 온갖 소리 티끌’(聲塵)에 핍박받지 않게 되면 이것이 곧 관자재(觀自在), 이것이 바로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인 겁니다.  



그런데 현실은 과연 어떻습니까? 온 세상이 온통 의 소용돌이 아닙니까? ‘한 마디로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고, 때로는 그 한 마디 때문에 전쟁까지 서슴지 않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참 생각해 보면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흔히 「사람은 환경의 영향(影響)을 받지 않을 수 없다」고 하는 말을 듣습니다만, 영향이라는 말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그게 그림자() 자에 메아리() 자인 거예요. 그렇다면 사람이라는 게 노상 그림자나 메아리에 놀아나도록 되어 있는, 그런 초라한 물건이라는 말이 되지 않습니까?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에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참에 이 언어의 터무니없는 허구성을 철저히 파헤침으로써 다시는 칭찬하는 말을 듣건 비방하는 말을 듣건 의연히 미동도 하지 않는 대인(大人)의 금도(襟度)를 갖추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미 수 차례에 걸쳐서 빛깔과 소리의 성품이 비었다는 사실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들은 여전히 그 빛깔소리로부터 온전히 자유롭지는 못한 신세 아니겠어요? 그래서 오늘은 특별한 메뉴를 한번 장만해 볼까 합니다. 여간해서는 수행의 방법에 대해서 언급하는 일이 없는 붓다도 이근(耳根), 즉 귀를 통해 들어오는 소리의 성품이 비었다는 사실을 철저히 사무쳐서, ‘이근의 청정함을 얻을 수만 있으면, 나머지 ’ ‘등은 저절로 청정해져서 끝내 육근(六根)의 청정함을 성취할 수 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오늘은 다 함께 그 언어의 본색을 한번 철저히 구명해 보기로 합시다.

그래서 그 숱한 언어중에서도 유별나게 억센 권위를 고수하는 언어를 골라내서 한번 집중적으로 공략해 보자는 겁니다. ··· 여러분은 인간이 사용하는 그 숱한 언어들 가운데서 보통의 언어와는 달리, 매우 독특한 개성과 권위를 갖고 있으면서, 내내 그 지위를 고수하고 있는 묘한 언어가 있다는 걸 아세요? 이른바 수학적 언어가 바로 그거예요. 스스로의 묘한 권위에 의해서 정립된 숫자의 영역’, 전혀 자체의 보존법칙에 의해서만 제어되는, 이 고고한(?) ‘수학적 언어의 본질은 과연 뭘까요? 나아가 이 수학적 언어의 구성요소인 숫자란 과연 뭘까요? 생각해 보면 숫자란 참 묘한 존재입니다. 분명히 수학적 언어도 기호를 써서 일어난 일을 기술하고 전달하는 기능을 갖는다는 면에서 보면 보통의 언어와 조금도 다를 게 없는데, 그런데 이 숫자만 나오면 사람들은 왜 괜히 주눅이 드는 걸까요?

숫자도 분명히 인간의 분별심이 지어낸 것임이 틀림없을 텐데, 그런데 이 숫자의 영역은 어느 샌가 인간의 주관이 전혀 끼여들 여지가 없는, 그들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축하게 된 거예요. 그 세계는 수학적 기호들로 엮어진, 이른바 수학적 언어만이 통용되는 세계입니다. 그 세계는 온기라고는 없는, 냉정하고 빈틈이 없는 연산법칙에 의해서만 꾸려지는 세계예요. 마치 인간의 속된(?) 상념이 끼여드는 것을 완강히 거부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일승(一乘)의 길을 가는 올바른 수행자들은 마음바깥에 그와 같은 <객관적 권위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는 사람들입니다. ‘성품을 밝힌 사람이라면, 그와 같은 권위 따위는 한갓 뿌리 없는, 전혀 허망한 정신적 구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이 탐구는 결코 「미라잡이가 미라가 됐다」는 비방을 들을 염려는 애초에 면한 셈이에요. 그러나 그런 방호막조차도 걷어버리고 시작하도록 합시다. 그런데 「미라잡이 ··· 」 운운하는, 이 말의 정확한 뜻이 뭔지? 출처가 어딘지? 좀더 확실히 알아보려고 어떤 문학박사에게 알아봤더니, 그도 잘 모르겠다는 겁니다. 저는 평소 이 말을 「혹을 떼려다가 혹을 붙였다」는 정도의 뜻으로 써왔는데, ‘불법에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 나름대로 그 뜻이 훨씬 더 분명해진 느낌이에요. 무슨 뜻이냐 하면, ··· 그 옛날 어떤 호기심 많은 친구가 미라의 비밀을 밝힐 요량으로, 어느 날 벼르고 벼르던 끝에 피라미드 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데 성공했답니다. 그래서 꼬불꼬불한 미로를 용케 더듬은 끝에 미라를 자세히 살필 기회를 얻긴 했는데, 또 그래서 나름대로 뭔가를 알아내긴 했는데, 막상 일을 마치고 부푼 가슴을 안고 되돌아오려고 하다가 그만 길을 잃어버린 거예요. 미로에 빠진 거죠. 그러니 어떻게 됐겠어요? 속절없이 제가 미라 신세가 되어 버린 거죠. 혹시 제가 잘못 안 거라면 이해하세요. 아무튼 저는 그런 뜻으로 쓴 말이니까요.

요컨대 「진정한 참구(參究)란 어떤 것인가?」 하는 물음에 대해서 한 마디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나름대로 이 「미라잡이 ··· 」 운운한 이야기를 통해서 본분납자’(本分衲子)의 행각(行脚)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케 하는 비유로 들어본 겁니다. ― 결국 본 바가 있고, ‘얻은 바가 있으면 결코 진정한 증득(證得)이 아니라는 겁니다. 여러분,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말 들어본 적 있죠?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돌아간다」는 뜻인데, 만약 본분의 납자라면 행각하던 끝에 설사 구경(究竟)의 도리를 봤다고 하더라도 결코 그것을 증득하는 일은 없는 겁니다. ··· 서론이 너무 길었나요? 그러나 이것이 바로 본론 못지 않게, 아니 이것이 바로 본론 그 자체일 수도 있기 때문에 말이 길어진 거니, 번거롭게 여길 일이 아닙니다.



진주(鎭州) 보화 화상(普化和尙)이 평상시에 늘 저자에 들어가서는 방울을 흔들면서,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소리 높여 말하기를, ···

『밝음()으로 오면 밝음으로 치고(), 어둠으로 오면 어둠으로 치고, 사방팔면(四方八面)에서 오면 회오리바람으로 치고, 허공 속으로 오면 도리깨로 치리라.』고 했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임제(臨濟)가 어느 날 사람을 시켜서, 그렇게 말하고 다니는 그를 느닷없이 꽉 붙들고 묻게 하기를, ···

『전혀 그렇게 오지 않을 때엔 어찌하시겠소?』 하게 했습니다. 그랬더니 보화 선사는 그 중을 확 밀쳐버리면서 말하기를, ···

『내일 대비원(大悲院)에서 재()가 있느니라.』 했답니다. 중이 돌아와서 임제에게 이 사실을 고했더니, 임제가 말하기를, ···

『내가 종래 그를 수상히 여겼었느니라.』 했다는 겁니다.



이 말을 시쳇말로 바꾸어 보면, 이론으로 오면 이론으로 치고, ‘미혹으로 오면 미혹으로 치고, ‘시끄러움으로 오면 시끄러움으로 치고, ‘번뇌로 오면 번뇌로 치고, 텅 트인 허공으로 오면 허공으로 치리라」고 한 것 정도로 풀이하면 될 겁니다. 그런데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분명히 보아서, 만법의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를 깨친 이라면, ― 여기서 이론이니, ‘미혹이니, ‘시끄러움이니, ‘번뇌, 텅 트인 허공성이니 하는 등이 모두 빈 말일 뿐이라는 걸 분명히 간파한 처지 아니겠어요?

그러니 범부들이 이와 같은 울퉁불퉁한 차별법 앞에서, 그것들이 전혀 빈 말일 뿐이라는 걸 알지 못하고, 일일이 조작하고 대처하면서 취사선택하는 것으로써 를 닦는 것으로 알고, 허송세월 하는 걸 본다면, 이럴 때 눈밝은 사람이 할 일이 뭐겠어요? 그저 일갈(一喝)이 있을 뿐입니다. 범부나 이승(二乘)들은 눈이 어두워서, 본래 아무 일도 없는 가운데서, 공연히 일을 벌여놓고는 헛애를 쓰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 그저 그 이나 생각을 제하지만 마세요. 그게 모두 그대로 ’()인 겁니다. 그렇다면 할()은 또 뭐겠어요? 부정의 뜻일까요, 긍정의 뜻일까요? ··· 그 모두가 다 아닙니다. 괴이하게도 눈먼 이 너무 많아요.



지공(誌公)이 그의 대승찬(大乘讚) 중에서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거룩한 도’(聖道)는 항상 눈앞에 있건만
눈앞에 있다 해도 보기는 어렵구나.
의 진정한 본체’(本體)를 깨달으려면
모름지기 빛깔소리, 그리고 언어를 제하지 말라.

언어그대로가 바로 거룩한 도이니
번뇌를 없앨 필요도 없다.
번뇌는 본래 비()고 고요한 것인데
다만 허망한 생각이 서로 얽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