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여러분은 「차원(次元)이 높다」던가, 혹은 「고차원적이다」 하는 등의 말을 들으면 그 느낌이 어떻습니까? 「대단히 특출(特出)하다」, 「단연 출중(出衆)하다」는 등의 말과 함께, 이것은 매우 사람을 우쭐하게 하는 소리가 아닙니까? 상대적으로 「보통(普通)이다」라고 하던가, 혹은 「그저 그렇다」는 소리를 들으면, 이건 힘이 빠지는 소리지요.

여기서 우리는 사람의 심사가 얼마나 이중적이고 모순 투성이인가 하는 걸 엿볼 수 있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한편으로는 늘 <차원 높고> <특출>하기를 바라면서도, 또 다른 한편으로는 늘 <널리, 막힘 없이 두루 통하기>를 바라거든요. 여러분, 보통이라는 말은 글자 그대로 <두루 통한다>는 뜻이에요. 그렇다면 꿩 먹고 알도 먹고 하는 식으로 특별보통을 다 하고 싶다고 할지 모르지만, 그게 양립하기가 어렵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여기서 어쩌면 이 양쪽을 다 만족할 수 있는 길이 있을 것 같기도 해서, 한번 알아보기로 했어요. 우리 집안의 가풍이 본래 미리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추구하는 방식으로 나아가는 것을 마땅하게 여기지 않는 편이지만, 더구나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겠다고 나선다면 될 일이 아니지요. 왜 그렇겠어요? ― 「중생이 미()했다」고 말하는 것은, ‘지혜가 모자라서도 아니고, ‘’()이 모자라서도 아닌 겁니다. 다만 제 성품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미했다고 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깨달음이란 바로 성품을 회복하는 일일 텐데, 성품은 이미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는 것이니, 어찌 그것이 밖으로 추구해야 할 목표나 목적이 될 수 있겠어요? 이 말의 뜻을 깊이 이해하는 건 대단히 중요합니다.

그래서 이 경우에도 그냥 백지 상태에서 이 뭇꼬?”(是什?) 하는 식으로 출발하는 게 좋겠어요. 이런 마음 자세는 모든 구도자(求道者)들에게 한결같이 적용되는 경책입니다. 즉 맨 처음부터 어떤 목표’(심지어 해탈 열반 성불까지 포함해서)를 정해 놓고 오직 그것을 향해서 나아가는 게 아니라, 구도행각(求道行脚)의 걸음걸음마다에서 그때마다 보고 듣는 모든 일이 그 어느 것 하나도 그것아님이 없다는 것을 증험(證驗)하는 것이야말로 바로 본분납자의 행리(行履)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말조차도 어떤 면에서 보면, 벌써 그 행보를 제약하는 의미가 있기 때문에 좋은 법문이 아니라는 겁니다. 요컨대 「아무런 규범도 없어야 한다」고 들었을 때조차도, 만약 그렇게 알아들으면 곧 병이 생기는 겁니다. 왜 그렇겠어요? 그에게는 「규범이 없어야 한다」는 규범이 이미 생겼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이런 모든 사정을 감안하고 나서, 다시 말해서 애초부터 어떤 목표를 정해 놓고, 그것을 이루기 위해서 전진하는 게 아니라, 수행의 과정이 그대로 구경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고 조심스레 행보를 옮기도록 합시다. 이것이 곧 선문(禪門)에서 말하는, 도중사(途中事; 닦아나가는 도중의 일)가 그대로 가리사(家裏事; 방황을 그치고 돌아온 집안의 일)인 도리입니다.  



어느 날, 경청(鏡淸)이 영운 선사(靈雲禪師)에게 묻기를, · · ·

『행각하는 일이 크오니, 스님께서 지시하여 주십시오.』 했습니다.

그랬더니 영운의 대답이 참 엉뚱했어요.

『절중(浙中, 浙江省 지방)의 쌀값이 얼마나 하던가?』 한 거예요.

이에 대한 경청의 대답은 더욱 엉뚱합니다.

『만약 제가 아니었더라면 자칫 쌀값이라는 견해를 지을 뻔했습니다.』 한 거예요.  



나중에 대위수(大?秀)가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말하기를, · · ·

『경청이 작자(作者)라는 소문은 이미 들었으나, 과연 예삿무리는 아니로다. 이미 쌀값이라는 견해를 짓지 않을 줄을 알았으면 필시 바른 방향― 공연히 쓸데없는 말을 해서 사람들을 더욱 헷갈리게 하는군. ― 을 깊이 깨달았으리라.

영운은 다만 풀어놓을() 줄만 알았지, 거두어들일() 줄은 몰랐도다. 「만약 제가 아니었더라면 쌀값이라는 견해를 지을 뻔했습니다」 했으니, 그대들은 또 어떻게 생각하는가? · · · 이와 같이 행각의 일을 이야기하더라도, 또 다시 뒤미처 오는 사람들에게는 궤칙(軌則)이 되고, (模範)이 될 뿐이니라.』 했습니다.  



참 발붙이기 어려운 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행각하는 일이 어려운 게 아니라 우리들의 업()이 너무 어렵게 꼬여버렸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일 뿐입니다. 다시 말해서 <너무 쉬워서 어려운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금부터 우선 그 차원이라는 말의 근본부터 차분히 알아보자는 겁니다. 그래서 뭘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그저 차원이라는 말의 출처에서부터 그 말의 쓰임새에 이르기까지 자세히 알아봄으로써 차원이라는 말이 풍기는 상식의 덫에 걸려서 공연히 헐떡이는 일이 없도록 하자는 겁니다. 이에 덧붙여서 차원’(次元)이라는 말이 버금 차’()으뜸 원’()으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서, 새삼 옛 어른들의 깊은 지혜에 고개 숙여지는 걸 느낍니다. 결국 항상 <차원 높은 것>을 추구해 마지않는 현대인들의 마음 씀씀이가 알고 보면 늘 근원을 등지고 버금가는하질(下秩)의 것만 좇고 있다는 뜻이니, 이 얼마나 우레 소리 같은 경책입니까? 그러므로 옛날부터 선지식들은 한결같이 제자들로 하여금 둘째 자리에 떨어지는 것을 경책하면서, 제일의천’(第一義天; 마지막 진리의 경지)을 표방했던 겁니다. ‘제일의천이 어찌 인간의 범정(凡情)을 받아들이겠습니까?



차원이라는 말은 원래 수학이나 물리학에서 나온 말인데, 그것이 일반화되어서, 요즘엔 인간 정서의 지적 수준의 차이를 나타내는 데에까지 쓰이게 됐어요. 그러니까 우리의 관심도 그 원류(源流)를 더듬는 쪽으로 맞추어져야 하겠습니다. · · · 이때 얼핏 생각나는 게, 바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3차원의 세계라고 한다는 사실입니다. 여기서 ‘3차원이란 바로 부피 있는 사물에 있어서의 가로’ ‘세로’ ‘높이를 가리킨다고 알면 됩니다. 이것은 초등학교 수준이니까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을 테고, · · · 좀 유식한 분들은 이쯤에서 차원의 차이를 느끼고 시큰둥해 버릴 테지만, 그러나 이렇게 상식의 덫에 단단히 걸려버린 사람들은 참 이끌어내기 어려워요. · · · 그러니까 가로뿐이면 이 되고, ‘가로세로를 함께 갖추었으면 이 되고, ‘가로’ ‘세로’ ‘높이를 모두 갖춘 게 바로 입체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런 모든 사물들로 이루어진 이 세계를 가리켜 <3차원의 세계>라고 하는 거구요.

그렇다면 이와 같은 생각이 우리들의 마음에 상식으로 자리잡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면, 입체에 대한 정의는 현재 우리들 인간이 사용하고 있는 <모든 이론의 기초>가 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그토록 좋아하고 대단하게 여기는 그 모든 이론의 기초가, 그것이 도리어 기초이기 때문에, 뜻밖에도 이렇게 아주 단순한 데 숨겨져 있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상식의 그늘입니다. 이런 기초가 없다면 그렇게도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이론들이 어디에 의지해서, 어떻게 세워질 수 있겠어요?

이렇게 더듬어 올라가다가 막판에 맞부딪친 게 바로 <유클리드의 공리(公理)>입니다. 그 내용은 ― 모두들 으레 그러려니 하고 그냥 지나쳐 버려서 그렇지 ― 웬만한 사람이면 다 아는 것 아니겠어요? , · · ·

첫째, 가로’ ‘세로’ ‘높이는 없고, ‘위치만 있는 것이 ’()이다.

둘째, ‘이 모인 것이 ’()이다.

셋째, ‘이 모인 것이 ’()이다.

넷째, ‘이 모인 것이 입체’(立體)이다.


여러분, 여기서 첫째 공리에 주목하십시오. <‘가로’ ‘세로’ ‘높이는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순수히 사전적인 의미로만 본다면, 이 말은 「그런 것은 없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가로세로높이도 없는, 그런 존재가 과연 뭡니까? 그렇다면 이 첫째 공리는 「실체는 없는데 위치만 있는 것이 이다」라는 말이 되지 않겠어요? ‘실체가 없는데 위치는 또 뭡니까? 실로 점입가경입니다.

결국 2300여 년 동안 줄곧 인류의 <합리적 사유>의 기본 틀을 이루고 있는 이 <유클리드의 공리>가 그 첫 단추를 어디에 끼웠느냐 하면, · · · 놀라지 마세요. 「사실은 실체가 없는 것인데, 그저 있다 · · · 고 치고 한번 시작해 봅시다」 한 셈이에요. 사실 그때, 유클리드가 자신의 통찰을 언어로 옮겨놓으면서 이와 같은 자각이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아무튼 이렇게 해서 인간의 사고는 그 준거(準據)의 기초를 얻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만인 공유의 이론적인 근거가 되어온, 그래서 공리(公理), ― 이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는 ― 이 언급에 대해서, 제가 과문(寡聞)한 탓인지는 몰라도, 아무도 뾰족한 이의를 제기한 사람이 없었으니, 그것도 참 희한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중생의 무명의 두께일까요?

그렇다면 <실체가 없는 ’>이 모여서 다시 을 이루었으니, 인들 온전하겠습니까? 도 실체가 없을 건 두말할 것도 없고, 다음엔 다시 이 <실체가 없는 ’>이 모여서 을 이루고, 다시 이 이 모여서 입체를 이루었다고 하니, 그렇다면 나 자신까지를 포함한 이 세계는 과연 이것이 있음일까요, ‘없음일까요? 도대체 이 ’(), 없음’()을 얼마나 모아서 ’, 있음’()을 이룰 수 있겠으며, 마침내는 이 세상을 이루게 된 것일까요? ‘’()를 아무리 끌어 모은들 어떻게 ’()가 되겠어요? 그렇다면 결론은 자명합니다. <가로’ ‘세로’ ‘높이는 없고 위치만 있는 유클리드의 이라는 것은 다만 빈 말만 있을 뿐이요, 전혀 실체가 없는 것임이 분명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조심해야 할 것은, 바로 이 유클리드의 공리 중의 없음을 단순한 없음으로 간주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 된다는 겁니다. ― 그건 유?무(有無)가 아니라, 모든 형상(形相)이 아직 나타나기 이전의 회매상태(晦昧狀態), ― 즉 조건만 닿으면 언제라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는, 굳이 말하자면, 어떤 예민한 경향성’(傾向性)과도 같은, 그런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라고 이해해야 한다는 겁니다. 만약 <그것>에 대해 진여’(眞如), ‘본체’(本體)니 하고 이름을 지으면서, 마치 <그것>을 존재론적인 실유(實有)이기라도 한 것처럼 파악한다면, 이야말로 설상가상입니다.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와 같은 말 자체가 바로 <그것>의 나툼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수능엄경(首楞嚴經)에 보면 붓다와 제자 부루나(富樓那) 사이에 다음과 같은 요지의 문답이 오간 걸 볼 수 있어요.

붓다가 부루나에게 물었습니다.

『네가 <산하대지는 과연 무엇으로 이루어졌을까?> 하고 의혹(疑惑)하는데, 어디 한 번 말해 보아라. 모든 물질을 쪼개고 또 쪼개면 종당에 무엇이 되느냐?
미진’(微塵)이 됩니다.
『그 미진을 다시 일곱 조각으로 쪼개면 무엇이 되느냐?
인허진’(隣虛塵)이 됩니다. · · ·

그런데 이 인허진이라는 말은 참 재미있는 착상이에요. 알다시피, () 자는 바로 이웃할 인이고, ()빌 허이고, ()티끌 진이니까, 추려서 말하면 인허진이란 곧 <허공에 바로 이웃한 티끌>이라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그러니까 허공으로 되기 직전, 물질맨 끝이라는 뜻이죠. 지금의 소립자’(素粒子)의 개념과 너무나 흡사하지 않습니까? · · · 아무튼 그렇게 대화는 이어집니다.

『그 인허진을 다시 쪼개면 무엇이 되느냐?
허공입니다.
『부루나야, <만약 인허진을 쪼개서 허공이 된다면>(有를 쪼개서 無가 된다면) <‘허공이 바로 온갖 물질을 냈다>(를 냈다)는 뜻이 되겠구나. 그런데 네가 아까 말하기를, 「세간의 모든 물질이 인연화합으로 말미암아 난다」고 했는데, 그렇다면 하나의 인허진은 얼마나한 허공이 화합하여 이루어졌을까? ‘인허진은 바로 물질이고, ‘허공은 말 그대로 허공인데, ‘허공허공을 어떻게 합할 수 있겠으며, 또 설사 허공을 합한다 한들, ‘허공을 합하는 것으로야 어찌 물질을 이룰 수 있겠느냐?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만 업()을 따라서 나타나는 그림자와 같은 것이어늘, 사람들이 알지 못하여 <인연화합>이니, <‘자연으로 있는 것>이니 하면서 망발을 일삼는데, 이 모두가 다 헤아리는 마음’(識心)으로 분별하고 요량(料量)하는 것일 뿐이어서, 다만 언설(言說)이 있을 뿐이요, 전혀 실()다운 뜻이 없느니라.』라고 했어요.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 여러 가지 이름이나 물질의 형상’(法相)에 대해서 논하는 건, 궁극적으로 그 모든 형상이나 이름들이 다 그림자나 메아리와 같은 허망한 것임을 깨닫게 함으로써 모든 존재에 대한 허망한 집착을 몰록 여의고 법성’(法性)을 보게 하자는 데 그 뜻이 있는 겁니다. 요컨대 성품이 드러나는 마당에서는 가로’ ‘세로’ ‘높이있고 없음을 비롯해서, ‘’ ‘’ ‘’ ‘입체등의 모든 형상이나, 그것들에 붙여진 모든 이름이 몽땅 허공꽃으로 돌아가고 마는 거예요. 따라서 이 <있고 없음의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기 전에는, 그 밖의 다른 일은 우선 모두 옆으로 비껴놓도록 하세요. 유?무에 걸림이 없는 안목이 바로 법 눈’(法眼)이요, 법 눈으로 보는 것만이 진실입니다.  



여러분은 진즉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이다」(色卽是空 空卽是色)라는 말을 <들어서 알고 있을 겁니다>. 어째서 그냥 <알고 있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라고 말하는지 알겠어요? 요는 이와 같은 말을 알아들었다고 해서 법안’(法眼)이 열리는 건 아니라는 겁니다. 이것은, 이 말을 알아들어서는 법안이 열릴 수 없다고 말하는 게 아니라, <말을 알아듣는 것><‘법안이 열리는 것>과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다르다는 걸 말하고 있는 거예요. · · · 어때요?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존재인 겁니다. 이 말의 참 뜻을 알겠어요? 만약 이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면, <이 말>인들 과연 어디에 붙어서 의미를 이룰 수 있겠어요? 오직 순일한 허공성일 뿐인데, 어디에 알고’ ‘모르고가 붙겠느냐 말입니다.

따라서 만약 누군가가 이 말의 뜻을 깊이 참구(參究)한 끝에 뭔가 알아들은 바가 있다면, 그는 <허공에 말뚝을 박은 꼴>이 될 터이고, 또한 「본래 텅 트인 허공일 뿐이어서, ‘알아들을 자도 없고 알아들을 것도 없다」고 알아서 무기(無記)에 떨어진다면, 그는 <눈에 박힌 말뚝도 보지 못하는 꼴>이 될 테니, 어찌 해야 합니까?

그러므로 을 배워서 지견이나 생기는 것을 가지고는 아무 소용에도 닿지 않는다는 걸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아무리 자세하게 밝혀 보인다고 해도 결국 회심(廻心)할 줄 모르면 끝내 알음알이의 수렁에서 헤어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부터 이 <‘가로’ ‘세로’ ‘높이가 없고 위치만 있는 유클리드의 점>이 결코 ’()가 아니라는, ― 즉 유?무(有無)없음이 아니라, 유?무가 나뉘기 이전, <·무의 본체>참된 하나’(眞一)라는 사실을 이른바 수학적 언어의 그 대단한 권위를 빌려서 확실하게 한번 밝혀내고자 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선인(先人)들이 말한, <모르는 그것>입니다. <이것>이 곧 참 나참 마음인 거예요. 그러므로 <이것>에 대해서 결코 헤아리거나 짐작하거나 해서는 안 됩니다. 수학적 언어도 역시 언어임에 틀림없습니다. 따라서 이 말의 뜻을 깊이 사무칠지언정 결코 이 말을 짊어지고 다니는 건 아무 의미도 없습니다. 사실은 하나도 아니고 여럿도 아니거든요. 고기를 잡았거든 통발은 버려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