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숫자는 어떤 성분으로 이루어졌는가? · · · 이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얻기 위해 수학에선 인수분해’(因數分解)라는 방법을 사용합니다. ‘인수분해라는 말만 들어도 벌써 골치 아프죠? 그런데 그게 알고 보면 하나도 골치 아픈 게 아닙니다. 가령 <10을 인수분해한다>는 것은 곧 10이라는 숫자가 어떠 어떠한 숫자들로 이루어졌는가 하는 걸 알아보는 것뿐입니다. 10을 이루고 있는 숫자들이 바로 인수인 거예요. , 여러분 직접 한번 알아보세요. 10은 바로 10, 5, 2, 1 등과 같은 인수들로 이루어진 게 아니겠어요? 이 가운데서 그 숫자 자체와 1을 제하고 나머지 52가 바로 10의 인수가 되는 거죠. 이런 관계를 일반화하기 위해서 문자를 사용해 보기로 하죠. Y의 인수가 ab라고 할 때, 이것을 수식(數式)으로는 다음과 같이 표시합니다.

Ya×b 이것을 약해서 Ya b · · ·

이제 학창시절의 묵은 솜씨를 발휘해서 속도를 좀 붙여보기로 하죠.

①식에서 bmn이라고 놓으면 다음과 같은 식이 됩니다.

Ya ba(mn)aman · · ·

②식에서 <mn이 서로 같다>고 놓으면 다음과 같이 됩니다.

②식에서 mn이면 · · ·

Ya ba×00 · · ·

같은 데서 같은 것을 뺏으니 어찌 ‘0’이 되지 않겠어요? 이 ④식의 결과에서 우리는 「모든 숫자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사실을 연산법칙에 의해서 밝혀낸 겁니다. 이 말을 바꾸어 말하면 「모든 숫자는 ‘0’인수이다」라는 말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일은, 이미 앞에서 알아본 바와 같이 이 ‘0’은 제로(zero), ’()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불법은 말할 것도 없고, 이제는 현대과학에서도 진공’(眞空)가 아니라, ‘만법의 근본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만법진공에서 나온 게 아니라, ‘만법이 바로 진공이고, ‘진공이 바로 만법인 겁니다>. 따라서 모든 법은 겉보기에는 그 모습이나 기능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들이 다 하나의 법’, 진공의 변현(變現)인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숫자는 ‘0’인수이다」라고 한 말은 과연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모든 숫자는 바로 진공의 표현이요, 바로 그 자체이다」라는 말을 수학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입니다.  



양자역학에서는 이미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 · · 아인슈타인의 그 유명한 공식, Em c²에 대해서 현대과학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여기서 E는 에너지, m은 질량, c는 광속) 질량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아니고,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이고, ‘에너지가 그대로 질량이다」라고 말입니다. 양자역학의 세계는 존재하는 것일어나는 일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불가(佛家)에서는 이것을 <능소불이>(能所不二)라고 해요. 작용하는 자작용은 둘이 아니라」는 거죠. 따라서 이 ’, 주체객체연기법을 이루면서 항상 서로 엇바뀌며 나타납니다. 그러나 이 경지에 이르면, 엇바뀐다’(互換)는 말도 존재에 미혹했던 범부가 진실에 눈을 뜨는 과정에서 중요한 고비가 되기는 합니다만, 역시 무명을 타파하기 위한 방편설(方便說)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주체객체도 모두가 허공성일 뿐이어서, 스스로는 전혀 작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허공허공이 서로 엇바뀌며 나타난다는 말은 군소리에 지나지 않으며, 작용의 주체가 있어서 그가 작용을 일으킨다」는 생각이 얼마나 허망한 생각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때문에 선현들은 이르기를,마음에 능소(能所)가 없으면 곧 정각’(正覺)을 이룬다」고 했던 겁니다. 따라서 이 말은 마음 공부의 요체가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결국 진공숫자는 서로 다르면서도 동시에 같고, 같으면서도 동시에 서로 다른 겁니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여기서 숫자는 바로 온갖 법을 두고 하는 말입니다. ‘분신’(分身)이란 본래 한 몸을 여럿으로 나누었다는 뜻이고, ‘분수’(分數)(수학에서의 분수가 아님) 본래 하나인 원수(元數)를 여럿으로 나누었다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모두가 근본하나인 거예요. 따라서 <같음가운데의 다름이고, ‘다름가운데의 같음인 것>, 이것이 바로 불법에서의 동이법문(同異法門)인 겁니다. 이 이치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 세속을 살면서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이런 전제 위에서 다시 위의 ③식으로 되돌아가 봅시다. · · ·

「모든 숫자에 0을 곱하면 0이 된다」는 이 <획기적 결과>를 이끌어 내는 데에 결정적 계기가 된 건 다름 아닌, 바로 <mn>이라는 간결한 수식이었습니다. 지금이야 「모든 숫자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하고 물으면, 도리어 그 물음이 이상하게 들릴 정도로 거의 상식화된 명제가 됐지만, 따라서 이 <mn>이라는 수식도 그저 연산법 상의 단순한 묘안 정도로 여겨지게끔 돼버렸어요. 그러나 저는 지금 이 <mn>이라는, 별 뜻도 없어 보이는 이 수식에 주목할 것을 권하는 겁니다.

모든 법은 본래 한 성품이었던 거예요. 고로 이 <mn>의 참뜻은 단순히 <가 같다>는 뜻뿐 아니라, 모든 법은 성품이 없어서 <본래 한 성품’(一性)이라>는 뜻이며, 궁극적으로는 <평등불평등까지도 전혀 대등하게 포함한 허공 같은 본래의 마음 자리를 이와 같이 수식으로 나타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평등’(正等)인 겁니다. 그러므로 이 <mn> 가운데는 늘 <mn>이 포함되어 있고, <mn> 가운데는 늘 <mn>이 포함되어 있는 겁니다.

보통 말로는 <‘같음가운데의 다름이요, ‘다름가운데의 같음인 도리>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는 없지 않습니까? 그러나 이 뜻을 수학적 언어로는 우격다짐으로 다음과 같이 표시할 수 있습니다.

< m≦n 이면서 m≧n >이 바로 그겁니다. 이 수식의 뜻은 ‘m’‘n’이 같으면 즉, <mn>이 드러나면, ‘m’‘n’의 다름 즉, < m<n 혹은 m>n >이 숨고, 또 반대로 < m<n 혹은 m>n >이 드러나면 <mn>이 숨는다는 걸 이렇게 수식으로 표시한 겁니다. , ‘’()가 드러나면 ’()가 숨고, ‘가 드러나면 가 숨는다는 거죠. 숨고 드러남’(隱現)이 동시인 도리가 곧 < m≦n 이면서 m≧n >인 겁니다. 그러므로 이 < m≦n 이면서 m≧n >이야말로 이사무애(理事無碍), 사사무애(事事無碍)의 수학적인 표현에 다름 아닌 겁니다.  

아인슈타인이 끝내 미완성인 채로 남겨 둘 수밖에 없었던 저 통일장의 이론’(統一場理論)이라는 것도 결국 알고 보면 3의 손으로 허공을 더듬는 것과 다름없는 일이었던 거예요. 아인슈타인과 같은 천재도 이 <‘통일장의 현장>에서 자기 자신, 나아가서는 자기 자신의 연구행위마저도 결코 제외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깜박했던 겁니다. ‘가 곧 우주통일장이고, ‘통일장이 곧 인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를 알 수 있겠어요? 제 눈으로 어떻게 제 눈을 볼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런데 마지막 깨달음’(究竟覺)이란 바로 참 나’(眞我)를 깨치는 것일 텐데, 그런데 를 알 수 없다면, 그렇다면 참된 깨달음은 과연 어떻게 얻는 걸까요? 말 그대로 참 나’(眞我)라면 영겁토록 변하고 옮기고 하는 일이 없어서 참 나일 터이니, 따라서 참 나를 깨달았을 때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당연히 깨닫기 전깨달은 다음이 여여(如如)해서 조금도 다를 바가 없어야 하지 않겠어요? 결코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님이 분명합니다. · · · 그러기에 고인들은 이르기를, <알 수 없는 그 자리>에서 곧장 깨달아 들어가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그렇다면, 「모든 법이 몽땅 한 성품으로 돌아간다」는 사실은 또 어떻게 알았을까요? 그러고 보면 이 < m≦n 혹은 m≧n >이라는 수식도 결국 제 눈으로 제 눈을 관찰한 결과인 셈이군요?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말하기를, 「모든 법은 이나 가운데서가 아니라, 매 순간마다의 움직이는 모습’(動容) 가운데서 알아봐야 한다」고 했던 겁니다. 어떤 ’, 어떤 인들 그렇지 않은 게 있겠어요? <그게 그저 내내 그런 거예요>. · · ·  



어느 날 위산 선사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 · ·

『어떤 것이 ’()입니까?

무심’(無心)니라.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 알아듣지 못하는가? ‘모르는 그것’(不會底)이 좋으니라.

『어떤 것이 모르는 그것입니까?

그대가 바로 그것이요, 다른 사람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이어서 말하기를, · · ·

요새 사람들이 당장에 <모르는 그것>을 알기만 하면 <그것>이 이 부처, <>가 이 마음이건만, 만약 밖을 향해서 하나의 지해(知解)를 구하면서 그것을 ’()이나 ’()라고 여긴다면 전혀 손을 써 볼 도리가 없도다. 이는 결코 똥을 퍼들이는 사람이라 할지언정, 똥을 퍼내는 사람이라 하지는 못하리니, 그대의 마음 밭’(心田)을 더럽히기 때문에 이는 가 아니니라.』라고 했던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