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으로 깨달아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2. 모든 ‘말’은 뿌리 없는 나뭇가지에 바람 스치는 소리와 같다
3. ‘말’은 ‘경험’에 대한 이야기일 뿐, ‘경험’ 자체는 아니다
4. 모든 ‘수’에 ‘0’을 곱하면 왜 ‘0’이 되는가?
5. ‘분별 없는 분별’이 ‘동력’(動力)이 된다
6. 가로 세로 높이는 없는데 ‘위치’만 있다니?
 
 
 
     
   

우리는 이미 모든 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무성’(無性)이기 때문에 일성’(一性) , ‘한 성품이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어떤 노선사(老禪師)의 독백이 생각나는군요. 「모든 것이 한 성품이라면 어떻게 그런 소식을 알았을꼬?」― 만약 이 이치를 알지 못하면 <mn>이라는 수식도 한갓 재치 있는 연산기법 정도로 치부되어도 할 말이 없겠지요. 그러나 <모든 법이 끝내는 한 성품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마당에서는 이 <mn>이야말로 가히 인간예지(人間叡智)의 결정(結晶)이라고 할 만하지 않겠어요? 결국 사람들이 이 한 성품의 이치’(一性之理)를 알았건 몰랐건, ‘진실은 본래부터 스스로 그러했던 거예요.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어떻게 이 수학이 인공위성을 달에 쏘아 올리는 일에서 능히 중추적 역할을 다할 수 있었겠어요?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 · ·

mn mn0 · · · 이것은 만법의 ’(), 즉 이법계(理法界)를 수식으로 나타낸 겁니다. 이것이 이른바 불가에서 말하는 차전(遮詮)의 수학적 표현이에요. ‘이체’(理體) 자체는 정한 성품도 정한 모습도 없으므로 이런 방식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는 거예요. 즉 「이것이 만법의 본체다」라고 하는 말처럼 <mn>도 하나의 언어라는 말입니다. 결코 이 기호자체를 본체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니, 혼동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 · ·

m≠n 일 경우, m>n 이면 m-n 은 '+' 즉, 양(陽),
m≠n 일 경우, m<n 이면 m-n 은 '-' 즉, 음(陰)

으로 나타나는 이것은 만법의 ’(), 즉 사법계(事法界)를 나타낸 겁니다. <mn> , mn이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이라는 말입니다. · · · <mn>은 여여(如如)본체를 나타내고, <mn>이면 홀연히 음양(陰陽)이 갈라지면서 이 현상계가 나타나는 겁니다. 따라서 <mn>뿐이면 마치 허공이나 목석처럼 작용이 없을 것이고, <mn>뿐이면 경계에 휘말려서 헤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따라서 <mn><mn>이 서로 원융(圓融)해야 즉< m≦n 이면서 m≧n >이라야 비로소 활력(活力)을 얻게 되는 겁니다.

흔히 이승(二乘)의 근기들은 <선정에 들었다>(入定)가는 다시 <선정에서 나고>(出定) 하는데, ‘법계에 계합(契合)한 제대로 된 본분납자라면 하루 종일, 항상 선정(禪定)에 들고, 동시에 항상 선정에서 나는 겁니다. <들고 나는>(出入) 것이 자취가 없는, 이것이 바로 본분(本分)의 자리인 거예요. ‘고와 낙’(苦樂)이 모두 성품이 비어서 다르지 않으며, ‘번뇌가 그대로 ’(), 지금 이렇게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니, ‘선정에 들고 나는 데 무슨 자취가 있겠어요? 그러므로 행주좌와(行住坐臥)가 늘 선정인 거지요. 그러므로 적멸(寂滅)한 경지가 결코 구경’(究竟)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온갖 법, mn같음가운데의 다름이고, ‘다름가운데의 같음이어서, 같음다름이 항상 원융되어서 걸림이 없는 것이 바로 법계’(法界)의 여실한 실상인 겁니다. 이 늘 한 가지로 원융무애(圓融無碍)하여야, <mn><mn>, 이 둘이 항상 서로 엇바뀌면서 홀연히 한 가지로 어울려서 걸림이 없어야, 비로소 이 우주는 하나의 살아 있는 <무한한 동력>(無限動力)에 의해서 <다함 없는 운행>(無盡行)을 계속할 수 있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작용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의 진상이며, <공용 없는 행>(無功用行)이기 때문에 한량 없고 다함 없는 행이 되는 겁니다. 이것이 곧 비밀한 불법의 진수인 겁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mn>, 즉 이 현상계에만 빠져서 헤어날 줄 모르는가 하면, 또 지견이 좀 열린 사람들은 금방 <mn>, 즉 움직임 없는 본체야말로 유일한 진실이라 여기면서, <mn>인 이 세속을 멀리 여의고, 다시금 본체에 대한 집착을 일으키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이른바 정위(正位)에 머무르는 것이야말로 구경의 깨달음인 양 오인하고 있으니, ‘법계 허공계’(法界 虛空界)에 무슨 정위’(正位)편위’(偏位)의 차별이 있겠습니까?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결코 수승(殊勝)한 자리를 탐내어 구하고, 머물고 하는 일은 없습니다. 그러나 법의 평등을 사무치지 못한 사람들은 오늘도 그 허망한 유위행을 쉬지 못하고 있으니, 이러고서야 어느 세월에 성지(聖旨)를 깨칠 수 있겠습니까? 거기는 본래 범부와 성인’(凡聖), ‘깨끗함과 물듦’(染淨)의 자취가 없는 자리인 겁니다.

모든 숫자에 ‘0’을 곱해서 몰록 ‘0’으로 사라져 버리는 순간의 통쾌함만을 즐겨하여, 그 말쑥한 고요함에만 머무른다면, 그야말로 이 세상을 몽땅 허물고, 흔한 말로 자손을 영영 멸망시키는 우()를 범하게 되기 십상입니다. 참으로 두려워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제 이에 이르러선 그 어떤 한 법도 불사(佛事)가 아닌 것이 없고, 그 어느 것도 부처의 출흥(出興)’이 아닌 것이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이 늙은이도 없고, 이 자리에서 이 말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모두 없고, 오직 이 모두가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응현(應現)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앞에서도 이 부처라는 이름에 달라붙은 그 토속적인 때()를 씻어내야 한다고 말했던 적이 있지만, 불사’(佛事)라는 말도 역시 앞으로는 순수히 진리에 즉()사업’(事業), <모든 일이 그대로 참 이치, ‘참 이치가 그대로 모든 일이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합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든 크고 작은 일이 다 참 이치인 겁니다. 그런데 이 참 이치는 영겁(永劫) 전에도, 지금 이 순간에도,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전혀 움직이고 변하고 하는 일이 없거든요. 그러면서도 한 순간도 멈춘 적이 없는 거예요. 거듭되는 말이지만,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야말로 바로 다함 없는 불사의 정수(精髓)인 겁니다.  



동산(洞山)이 스승 운암 선사(雲岩禪師)에게 물었습니다.

『화상께서 백년(百年, 涅槃)하신 뒤에 누군가 묻기를 「스님의 모습을 그릴 수 있겠는가?」 한다면 무엇이라 대답해야 하겠습니까?』 했어요.

이에 운암이 양구(良久)했다가 말하기를, · · ·

『그저 이것뿐이니라. 했습니다. 이 말에 동산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니, 운암이 말하기를, · · ·

『이 일을 이해하려면 모름지기 자세히 살펴야 되느니라.』 하였는데, 동산이 그래도 의심이 풀리지 않더니, 나중에 물을 건너다가 물 속에 비친 그림자를 보고는 크게 깨달았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송했어요.  



절대로 딴 곳에서 찾지 말지니
멀고 멀어서 와는 소원하다.
나 지금 혼자서 가지만 곳곳에서 를 만난다.
그가 바로 지금의 나요, 비로소 여여(如如)에 계합하리라.  



후에 동산이 운암의 진영(眞影)에 공양하는데 어떤 중이 묻기를, · · ·

『운암께서 말하기를, 「그저 이것뿐이니라」 한 뜻이 무엇입니까?』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 ·

『내가 그때, 자칫했으면 선사(先師)의 뜻을 잘못 알 뻔했었느니라.

『그러면 운암은 알고 있었습니까?

『만약 알지 못했다면 어찌 그렇게 말할 줄 알았겠으며, 만약 알았다면 어찌 그렇게 말하는 것을 수긍했겠는가?』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