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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수행'(正修)이란,···
2.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3. '허공'에는 '방향'도 '위치'도 없다
4. 모든 것은 빛의 얼룩으로 화(化)하고,···
5. 우주 공간에는 <절대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6. 그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7. 눈앞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밤하늘의 별들을 바라본 지도 무척 오래 됐지요? 도시의 매연에 찌든 하늘만 이고 살다 보니, 어느 새엔가 그 아름답던 밤하늘의 모습은 아득한 옛 추억으로만 남게 됐습니다. 옛날 같으면 마음이 이렇게 서정적인 분위기에 젖어들라치면 기꺼이 그 마음의 흐름을 타면서, 마냥 상상의 날개를 펼치곤 했는데, 어설피 '마음 공부'를 한답시고 마음의 그런 흐름을 살피다 보면, 저도 모르는 사이에 그 날갯짓이 사그라지는 걸 보게 되죠. 그러면서 그 서정적인 분위기가 어느 새엔가 서사적인 분위기로 바뀌면서, 그 동안 줏어들었던 법문의 토막들이 슬금슬금 고개를 치켜들면서 그 마음의 흐름을 온통 '지견(知見) 놀이'의 마당으로 바꾸어 놓고 맙니다. 결코 이런 유(類)의 탐색에 오래 잠겨서는 안 됩니다만, 오늘은 그와 같은 마음의 갈피를 추슬러서, 서정·서사를 마음대로 넘나들면서도 결코 그것에 침몰하는 일이 없는, 그런 '마음자리'를 한번 찾아보도록 하지요. ― 밖으로 찾아 나서는 게 아닙니다. 이 '마음' 자체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한번 조심스럽게 살펴보자는 거예요. ― 아까 <도시의 매연에 찌들었다>고 했었지요? 그것을 화두 삼아 한번 시작해 봅시다.

그렇다면 저 '하늘'이 찌든 걸까요? 우리들의 '마음'이 찌든 걸까요? 보통의 경우라면 이런 질문은 거의 하는 법이 없지요. 그러나 '불법'에 인연을 맺으면서부터는 늘 이런 유의 물음에 직면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래서 늘 현실감각과 들은 바 설법의 내용 사이에서 서성거리게 되는 일이 많지요. ―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四大)가 모두 비었다」고 했으니, 그렇다면 찌들 만한 하늘·땅·삼라만상이 모두 실체가 없을 테니, 따라서 찌들 것도 없을 것이고, 그러면 당연히 우리들의 '마음'이 찌들었다고 해야 할 텐데, 그 '마음'이라는 것도 역시 찾아보면 아무 데도 없으니,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찌든 걸까요?

여러분, 이 말에 선뜻 동의할 수 있겠어요? '마음'도 '경계'도 모두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그래서 '마음'이 '경계'를 보고, 헤아리고 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러면 지금 면전에서 전개되고 있는 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요? ··· 이렇게 공부를 지어감에 따라서 여러분의 속마음과 성인들의 말씀 사이엔 분명 넘기 어려운 갭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그래도 그 동안 줏어들은 단편적인 풍월로 그저 적당히 싸바르고 넘어가야 할까요? 공부하는 사람에게 있어서 이런 태도가 가장 좋지 않습니다. 모름지기 의증(疑症)을 내야 합니다. 그것도 아주 큰 의증을 내야 합니다. 그래야 빨리, 또 크게 깨칠 수 있습니다.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는 문제들이 날이 갈수록 더 쌓여 가는 느낌 아닙니까? 그럴 수밖에 없지요. ― 이 준령을 별 탈 없이 훌쩍 넘어서야 이른바 견도위(見道位; 도를 보는 지위)에 들게 될 텐데, ― 온통 '나 자신'까지를 포함한 모든 존재가 그 근본부터 송두리째 흔들리면서, 그 전까지는 전혀 의심해 본 적도 없었든 문제들이 마구 쏟아져 나오니 말이에요. 자! 그렇다면 이제부터 우리는 이 '상식'과, 새로 밝혀진 이른바 '진실'과의 사이에 가로놓인 '틈새'(間隔)를, ― 설사 이치로는 이해된다고 하더라도, 도저히 심정적으로는 납득이 되지 않는, 이 넘기 어려운 갭을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여기에 초점을 맞추어야 하겠습니다. 이 의증이 말끔히 해소되지 않는다면 결코 공부는 한 걸음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아니겠어요? 제가 저를 속여서 어떻게 하겠어요? 모름지기 진정한 수행자라면 털끝만한 의증도 남겨두어서는 안 됩니다.

'틈새'를 메우는 게 아닙니다. 극복하는 것도 아니구요. 수행자가 점차로 지견이 열리면서, 참으로 기특한 생각이 드는 때가 있습니다. ― 「산이 산이 아니고, 물이 물이 아니니라」 하는 말을 듣고는 의아해 하기는커녕, 차라리 냉소적으로 치지도외해 버리던 그 오만한 마음이, 어느 날 문득 실로 기특한 생각이 드는 거예요. 즉 「이것이 그래도 오랜 세월을 두고 면면히 그 법맥(法脈)이 이어져 온 성인의 말씀인데, 내가 일개 범부의 하찮은 소견으로 그 말씀을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감히 일소에 부치다니, ··· 」 하고, 제 정신이 번쩍 드는 때가 있는 거예요. 누구라도 비록 '불법'에 인연을 맺은 지 오래 된 사람이라도, 모름지기 한번쯤은 반드시 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심기일전해서 올바른 믿음을 내고,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어서 새 출발을 다짐하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가 수도 없이 닥치지요. 그 마음이 늘 뭔가를 추구해 마지않는 사람이라면 더욱 그렇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그 참구(參究)하는 마음을 지탱해 주는 건, 오직 자신의 희망하는 바가 얼마만큼 성취되는지의 여부에 달려 있으니까요. 따라서 <자기 중심적인 '의식'>을 앞세워서 탐색을 계속하고 있는 동안에는 늘 퇴전(退轉; 공부를 그만두고 물러남)의 유혹을 받게 마련입니다.

그러면 「'의식'에 의지하지 않는 탐구란 과연 어떤 걸까요?」 ― 이런 물음 자체가 바로 '의식'의 반란입니다. ― 이 같은 '의식'의 문제 제기에 대해서 어떤 해답을 주려고 애쓰지도 말고, 그렇다고 무시하지도 말고, 억누르지도 말고, 그냥 잠잠히 지켜볼 수는 없을까요? 그렇다고 해서 목석처럼, 불꺼진 재처럼 된다는 게 아닙니다. 환히 다 비추어 알지만, ― '의식'이 지금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가 하는 걸 환히 비추어 알지만, ― 결코 그것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거나 이름을 붙이거나 하지 않고, 그저 담담히 비추는 겁니다. 이렇게 내내 계속할 수만 있으면, 바로 그 물음에 대한 답이 말로써가 아니라, 곧바로 실천적으로 목전에 현전(現前)하는 걸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입니다. 거기에는 이미 '나'도 없고, '나가 없다는 것'도 없습니다. 이때에 환히 비추는 광채는 '의식의 활동'이 아니고, 바로 '신령스러운 광명'(靈光)이 빛을 놓는 겁니다. 이렇게만 된다면 '공부'는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됩니다. 거기엔 이미 어떤 이상적인 경지를 희구하면서 줄곧 애써오던 이른바 '수행의 주체'는 자취를 감추고, 이제 정혜쌍수(定慧雙修)를 통해 갖추어진 '정혜의 힘'(定慧力)이 가만히 '마음'에 깃들면서 오직 다함 없는 '방광삼매'(放光三昧)가 이어질 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남에게 설명할 수 있는 경지가 아닙니다. 아니, 이럴 때 <이것>을 남에게 설명한다는 건 곧, 그 놈의 '의식'이 다시 고개를 추켜들고는, <그것>을 '나의 체험'으로 삼아버리고, 그 '신령한 광채'(靈光)를 다시 '의식의 영역'으로 끌어내고 마는 겁니다. 이것은 워낙 미묘한 부분이라, 처음엔 이런 일이 자주 일어날 겁니다. 그러나 이럴 때에도 실망하거나 자책해서는 안 됩니다. 그저 그렇게 여습(餘習; 남은 버릇)이 아직 꼬물거리고 있는 '의식'의 움직임을 그냥 지켜보기만 하는 겁니다. 그래서 고인(古人)들은 이럴 때, 「절대로 말하지 말라! 말하면 그대 골통을 부셔 버리리라」라고 했던 겁니다.

이것이 바로 '올바른 수행'(正修)이 시작되는 첫머리입니다. 그것은 결코 뜻을 세워서 어떤 결과를 추구해 마지않던, 그런 유위행(有爲行)이 아닌 겁니다. 이것이 곧 '닦되 닦음 없는 닦음'(修無修修)이며, 이것이 '참된 닦음'(眞修)입니다. 즉 그 '의식'은 여전히 '경계'를 따라 흐르면서 또렷또렷하게 '보고 듣고 깨닫고 알고'(見聞覺知) 하면서도 전혀 물드는 일이 없는 겁니다. 항상 인연을 따르되 변하는 일이 없고, 항상 변하지 않으면서도 늘 인연을 따르는, 이른바 수연불변(隨緣不變)하고, 불변수연(不變隨緣)하는 흐름이 잠잠히 이어지면서, 모든 '지견'은 자취를 감추고, 그 변덕스럽던 정식(情識)은 저절로 깨끗한 '정식'(淨識)으로 되어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