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1. '올바른 수행'(正修)이란,···
2.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3. '허공'에는 '방향'도 '위치'도 없다
4. 모든 것은 빛의 얼룩으로 화(化)하고,···
5. 우주 공간에는 <절대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6. 그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7. 눈앞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어느덧 그늘이 그리운 계절이군요. 요즘엔 시골에 가도 잘 볼 수 없게 된 정경이지만, 어릴 적에 땡볕에서 뛰놀다가 땀방울이 송송 배어난 이마에 매미소리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정자나무 그늘은 더 없이 정겨운 쉼터였죠. 그런데 이때, 한숨 돌리고 난 어린 눈에 아득히 다가선 건 뭉게구름과 맞닿을 듯이 솟아 있는 나뭇가지예요. 그 맨 끝에 한들한들 매달린 잎새에 시선이 멈출 때면, 어린 소견에 문득 엉뚱한 생각이 일곤 했던 기억이 납니다. ― 저 가냘픈 나뭇잎이 어떻게 저 땅속 깊은 데서 저렇게 까마득히 높은 데까지 물기를 빨아올릴 수 있는 걸까? ― 사람들이 만든 힘센 펌프로도 쉽지 않을 텐데, 그것도 밤낮 없이 계속 그렇게 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대체 누가, 무엇이 그렇게 대단한 일을 해내는 걸까? 뿌리는 또 어떻고? 저 딱딱하고 캄캄한 땅속에서 어떻게 구석구석까지 가는 실 뿌리를 뻗어선 그리도 용케 수분과 양분을 가려낼 수 있는 걸까? 참 신기했어요. 그러다간 또 장난에 팔려서 그런 생각은 까맣게 잊은 채 그럭저럭 오늘에 이른 거죠.



사람들은 보통 이 경우 우선, 그 <'본래 하나'인 나무>를 토막토막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즉 뿌리와 줄기와 가지, 잎사귀 등으로 말입니다. 그런 다음, 이것들이 마치 각기 고유의 기능을 하는 독립적인 존재인 양 치부하고는, 이들 상호간에 서로 주고받는, 주체와 객체의 인과관계를 설정하는 거예요. 즉 그 뿌리가 땅속에서 수분과 양분을 섭취해서는 이것을 줄기에 전달하고, 줄기는 이것을 받아서 가지로 전달하고, 가지는 다시 이것을 잎새에 전달하는 식으로, 이렇게 해서 마침내 저 맨 끝의 잎새에까지 수분과 비료 기운이 전달된다는 겁니다. 꽤 그럴싸한 시나리오 아닙니까?

그런데 본래 <하나의 나무>라는 사실을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곧잘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뿌리나 가지나 잎새들은 각기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서로가 서로에게 전적으로 의지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이른바 상생(相生)의 관계인 겁니다. 붓다의 말처럼, 「'이것' 있음으로써 '이것'이 있고, '이것' 없음으로써 '이것'이 없느니라」 한 게 바로 이런 경우를 두고 한 말입니다. 왜냐하면 나무는 그 중의 어느 하나만 없어도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들이 마치 따로따로 존재하는, 독자적인 실체라는 생각을 하게 됐는지 참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이건 아직 서막에 불과합니다. ··· 그 '나무' 자체는 또 어떨까요? 그건 과연 독립적인 실체일까요? '땅'이나 '물'이나 '공기', '햇빛' 등이 없이도 혼자서 살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또한 '산소'를 호흡하고, '탄산가스'를 뱉어내는 여러 '동물'들이 없이도 '식물'이 혼자서만 살 수 있겠어요? 이것은 물으나마나 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이 세상엔 홀로 독립해서 존재할 수 있는 건 단 하나도 없다>는 걸 어렵잖게 알 수 있어요. 그렇다면 그 무수히 많은 낱낱의 존재들은 다 뭘까요? 이 모두가 다만 사람들의 허망한 분별심으로 억지로 지어진 가상적 존재에 불과하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야 평소 이런 유의 말을 하도 많이 들어서 하나도 신기할 게 없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아무 생각 없이 이 대자연의 눈부신 광경에 넋을 잃고 있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면 어떻겠어요? ― 자기 자신까지 포함한 이 세상이 몽땅 인간의 무지 때문에 생겨난 허망한 그림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친다면 ― 그것은 진정 강력한 전류에 닿은 듯한 충격이 아닐 수 없을 거예요. 이런 경로로 깨달음에 이른 사람들이 바로 이른바 연각(緣覺, Pratyeka-buddha)입니다.



이렇게까지 바닥을 치지는 못하더라도, 조금만 주의 깊게 살펴보기만 해도 우리들의 사물을 보는 안목이 얼마나 모호하고 엉성한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인지를 금방 알 수 있는 일입니다. 이와 같은 모호한 시각을 깨끗이 해소해 준 게 바로 우리가 이미 밝힌 바 있는 '연기설'(緣起說)입니다. 모든 것이 인연화합(因緣和合)이라는 거죠. 그런데 여기서도 자칫 놓치기 쉬운 함정이 있다는 걸 잊어선 안 됩니다. 즉 이 인연화합이 이루어질 때, 화합하는 '인연'이 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미 알아봤 듯이 낱낱이 독립해서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온갖 것은 다 '제 성품'이 없는, 말하자면 전혀 가상적인 존재라는 사실이 이미 밝혀진 것이 아닙니까? ― 그 모두가 '본래 하나'인 이 세계를 다만 사람들이 '망령된 의식'(妄識)으로 토막토막 분별한 것일 뿐, 이 세상의 그 무수히 많은 유정·무정이 몽땅 그 실재성이 없는, 허망한 존재일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있어서 인연화합하겠어요? 그러므로 '인과법' 가운데는 진실한 법이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인과법'에 떨어져서는 안 되는 이유지요. 그러나 이렇게 '인과법'이 비록 속 빈 강정처럼 '빈 말'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지만, 또한 '인과법'을 결코 허물지 않을 줄 아는 게 바로 '눈밝은' 납자(衲子)이기도 한 겁니다.



모든 존재가 각기 개별적인 실재성이 없다는 사실, ―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름'이 결코 스스로 성립될 수 없고, '모습'도 사람의 마음에 의지하지 않고선 저절로 세워질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늘'과 '땅', '산'과 '물', '유정'과 '무정' 등, 이 온갖 '이름'들은 다 가짜 이름이요, 온갖 모습은 다 '허깨비' 같은 존재일 뿐입니다. 이 모두가 범부들이 망령된 의식으로 지어낸, 실로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존재임을 확연히 밝혀냄으로써, 이 세상에 더는 '볼 만한 것'이 없고, '알 만한 것'도 없어서, 그 마음이 언필칭 백 개의 태양이 동시에 뜬 것처럼 환히 밝아지면, 이것이 바로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 우뚝 드러나는 순간이요, 이것이 곧 '부처'가 출흥(出興)하는 순간인 겁니다.

이것이 바로 '마음'이 곧 '부처'인 도리요, '마음'이 곧 '법'인 도리입니다. 이 '마음'과 '법'과 '부처', 나아가서 온갖 '있는 것', 모든 '일어나는 일'이, 이 모두가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이요, '같은 것'의 다른 현상일 뿐, 다시 다른 건 아무것도 없어요. 이 본래 스스로 청정한 '한 마음'을 떠나서는 티끌만한 한 법도 있을 수 없는 겁니다. 따라서 종일토록 어지럽게 '가고 오고'(去來), '들고 나고'(出入),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成壞) 한다 하더라도 이 모두가 다만 '마음의 거울'에 비친 허망한 그림자일 뿐, '본래 마음' 자체는 전혀 미동도 한 적이 없는 겁니다.



승조(僧肇)의 불천론(不遷論)에 이르기를,···

회오리바람이 큰산을 쓰러뜨리는데도 항상 고요하고, 강물이 앞다투어 쏟아지는데도 흐르지 않으며, 아지랑이가 떠다니며 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해와 달이 하늘을 돌아다니는데도 돌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소(疏)에 이르기를,···

『'앞의 바람'이 '뒤의 바람'이 아니므로 큰산을 쓰러뜨리는데도 언제나 고요하고, '앞의 물'이 '뒤의 물'이 아니므로 앞다투어 쏟아지는데도 흐르지 않으며, '앞의 기(氣)'가 '뒤의 기'가 아니므로 떠다니며 치는데도 움직이지 않고, '앞의 해'가 '뒤의 해'가 아니므로 하늘을 돌아다니는데도 돌지 않는다.』고 했어요.

다시 초(抄)에 이르기를,···

『'자체'는 생각 생각마다 동일하지 않나니 곧, 첫째 번의 한 생각이 일어날 때는 둘째 번의 생각일 때가 아니다. 내지 맨 나중에 바람이 불어서 산에 닿았을 때는 처음에 바람이 일어난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앞생각'일 때의 '바람 자체'가 결코 그로부터 와서 그 산에 불린 것이 없다.

또한 산은 처음에 움직였을 때로부터 땅에 쓰러질 때까지 그 '산 자체'는 생각 생각마다 동일하지 않다. 따라서 처음의 한 생각에 움직일 때는 둘째 번의 생각에 움직일 때가 아니며, 내지 최후에 땅에 닿았을 때는 처음에 움직였을 때가 아니니, 그렇다면 처음 움직인 산 자체가 결코 그로부터 와서 땅에 닿을 때까지···라는 것이 없다.

결국은 바람이 이르지도(到) 않았고, 산이 땅에 닿지도 않았다. 비록 회오리바람이 큰산을 쓰러뜨렸다 하더라도 일찍이 움직인 일조차 없는 것이다. 이것을 세간에서는 변천하고 이동한 것으로 삼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산을 쓰러뜨리고 하늘을 지난다 하더라도, 이것들이 모두 '서로가 알거나'(相知), '서로가 이르는 것'(相到)도 아니며, 생각 생각마다 스스로 머물면서 저마다 변천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결국 이 세상의 어떤 존재도 주욱 이어지면서 지속되는 것은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한 순간도 머무르는 일이 없는 거죠. 또한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있기는 합니다. 즉 두 손바닥이 맞부딪쳐서 손뼉소리가 나긴 하지요. 그러나 이때 손바닥에 감추어져 있던 무엇인가가 거기에서 튀어나와서 소리가 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결국 어떤 '물질적인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원인'에서 '결과'에로 옮아가는 일은 없다는 사실을 간파하는 게 중요합니다. 이 사실을 분명히 보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만 무엇인가가 이어진다는 착각을 일으키게 되는 겁니다. 이와 같이 무엇인가가 옮아간다는 생각이 마침내 '시간이 흐른다'는 착각을 부르면서, 이른바 '절대시간' '절대공간'이라는 고정관념이 우리의 마음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겁니다. 그렇게 해서 환상으로 생겨난 게 바로 이 세상이구요. 이렇게 '존재'를 미혹한 마음은 '진실'을 등지고 마냥 '미혹한 세계'(迷界)를 헤매게 된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 이렇게 이 세상의 드러난 모습들, 즉 온갖 법상(法相)에 대해 미세하게 파헤쳐 보이는 것도 오직 이 모두가 꿈속처럼 허망한 것이어서 전혀 집착할 게 못 된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밝힘으로써, 끝내 그 '마음'을 돌이켜 진여법성(眞如法性)을 보게 하자는 데 목적이 있는 겁니다. 그러므로 행여라도 옛 습관이 도져서, '현상법'을 들추고 따지고 하는 데에만 골몰해서, 다시 깊은 '지견의 수렁'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명심할 일입니다. 만약 눈앞에 티끌만한 한 법이라도 '있음'을 본다면, 졸지에 온갖 허깨비들이 여러분을 홀려서 헤어날 길이 없는 죄업의 나락으로 떨어뜨릴 겁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훌륭하고 대단한 게 나타나더라도 속지 마세요. 그게 모두 여러분이 스스로 지어내는 '마음의 그림자'일 뿐입니다.



남전 화상(南泉和尙)이 육긍대부(陸亘大夫)와 이야기를 하던 차에 대부가 말하기를,···

『조 법사(肇法師)가 말하기를, 「천지가 나와 더불어 같은 뿌리요, 만물이 나와 한 몸이라」 하였으니, 참으로 기특합니다.』 했어요.

이 말을 들은 선사는 뜰 앞의 한 송이 꽃을 가리키면서 말하기를,···

『요즘 사람들은 이 한 송이 꽃을 보기를 마치 꿈과 같이 여기느니라.』 했습니다.



나중에 법진일(法眞一)이 이 말을 전해 듣고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오직 이 '한 송이 꽃'을 어디에 부칠꼬? 만약 낙처(落處; 귀결하는 곳)를 안다면 당장 '근원'을 똑바로 끊겠지만, 만약 그렇지 못하거든 행여라도 잎을 쳐들고 가지를 찾지는 말라.』고 했습니다.



설두현(雪竇顯)의 게송 한 수를 더 소개하죠.

보고 듣고 깨닫고 앎(見聞覺知)이 낱낱이 모두 아니니
'산하'(山河)도 '거울' 속에서 보는 것이 아니네.
서리 내린 밤하늘에 달이 기울었는데
뉘와 함께 맑은 못에 찬 그림자(寒影)를 비출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