ㅁ
1. '올바른 수행'(正修)이란,···
2.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3. '허공'에는 '방향'도 '위치'도 없다
4. 모든 것은 빛의 얼룩으로 화(化)하고,···
5. 우주 공간에는 <절대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6. 그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7. 눈앞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그러면 이번에는 마음먹고 크게 한번 장면을 전환해 보도록 합시다. ― 여러분의 일상생활은 지금 무엇을 좌표계로 삼고 있습니까? 대지, 즉 이 '지구'가 그것 아니겠어요? 그런데 이 지구가 자전하면서 다시 태양 주위를 공전하고 있다는 건 다들 알고 있을 테고, 그러면 이 지구의 자전속도는 과연 얼마나 되는지 아는 사람 있어요? 별 자신도 없는 기억을 더듬는 것보다는 우리 한번 직접 따져보도록 합시다. 아주 간단한 산수니까 꽁무니 빼지 말고 다들 한번 해보세요.

지구 적도의 둘레를 대략 40,000㎞로 잡으면, 이것이 하루 동안에 지구가 한 바퀴 돌 때 경과하는 거리가 될 테니까, 이것을 24시간으로 나누어 보세요.

40,000÷24≒1,600㎞/h ··· 이것이 바로 자전속도예요.

그러니까 지구는 시속 약 1,600㎞의 속도로 자전한다는 겁니다. 여러분 혹시 고속도로를 시속 130㎞로 달려본 적이 있어요? 아마 대단한 속도감을 느낄 겁니다. 그런데 이것은 그의 10배도 훨씬 넘는 속도니까 어떻겠어요? 바로 지금 여러분은 이런 엄청난 속도로 허공 가운데를 맴돌고 있는 겁니다. 실감이 납니까? 그런데 그것뿐이라면 그래도 참을 만하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다시 여기에 더해서 공전속도까지 알고 나면 정말 기절할 지경입니다. 내친 김에 그것도 한번 직접 알아볼까요?

이미 알려진 지구의 공전속도가 초속 약 29.8㎞라고 하니까, 이것을 30㎞/sec로 잡고, 이것을 시속으로 바꿔봅시다.

30×60×60=108,000㎞/h ··· 이것이 지구의 공전속도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 자신이 시속 10만㎞가 넘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이 허공 가운데를 돌진하고 있다는 사실이 믿어집니까? 그것도 시속 1,600㎞의 속도로 자전하면서 말입니다. 그것뿐이 아닙니다. 이 '지구'는 태양계 안에서만 이렇게 소용돌이치는 게 아니라, 동시에 다시 태양계 밖의 수많은 별들과도 서로 껴잡고 돌면서, 다시 몇백만 광년 떨어진 안드로메다 성군 같은 별무리들과도 이런 상호운동을 계속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인간의 상상을 초월하는 장엄하고 웅대한 규모의 운동을 끝없이 계속하고 있는 거예요. 이것은 말 그대로 '혼돈' 그 자체입니다. 그런데 총체적으로는 이와 같이 엄청난 규모의 '혼돈상'(混沌相)을 연출하면서도, 그 낱낱의 부분들은 저마다의 조화를 유지하면서 '등속도운동'을 하는 좌표계 안에서는 결코 자연법칙이 혼란에 빠지는 일이 없으니, 참으로 묘하지 않습니까?

영겁토록 끊일 줄 모르고 이어지는 이 장엄한 무대는 그 역동성과 양적인 방대함에 곁들여, 아기자기한 정감까지 넘쳐나고 있으니, 이야말로 가히 신성(神性)의 연출이라 할 만하지 않습니까? '전체'와 '부분', '혼돈'과 '조화', '찰나'와 '영원' ··· 이 불가사의한 균형은 우리들의 좁은 소견으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건, 바로 우리들 자신이 이 경이로운 무대의 연출자인 동시에 관객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말이 과연 믿어집니까?···

어디까지나 '마음'은 이 안에 있고, '경계'는 저 바깥에서 각기 저마다의 법칙을 따르면서 제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있고, 무시(無始) 이래로 그렇게 알고 살아온 우리 범부들에게 있어서 이건 진정 기상천외의 천고(天鼓) 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공력(功力)도 들임이 없이, 오직 한 찰나 한 생각으로 능히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지어내고, 또 능히 거두어들인다고 하니, 도대체 이보다 더한 신통력이 또 어디 있겠어요?

우리들은 이미 온갖 법이 오직 정식(情識)의 지은 바요,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 밝힌 터이므로, ― 그렇다면 우리가 일상을 살아가는 이 세상은 '마음'이 나툰 것이라 치고 (그것도 사실은 충분히 납득되는 건 아니지만), 앞에서 잠시 살펴봤던 저 광대한 우주공간은 우리들의 의식과는 상관없는, 즉 우리의 의식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니까, 따라서 그 숱한 천체들은 모두 자연법칙을 따르면서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은 혹시 없습니까? ··· 사실은 이 부분이 그 변덕스러운 '의식'이 변전(變轉)해서 '부처 지혜'로 바뀔 수 있는가의 여부가 판가름나는 분수령이라고 할 수 있어요.

분명한 사실은 「우리는 의식의 영역 밖에 있는 것을 알아볼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하다」는 겁니다. '마음'으로 인지해서 취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떻게 제 혼자서 '마음' 속으로 비집고 들어와서 알음알이를 이룰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그것이 아무리 아득한 우주의 저 끝의 일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마음'을 떠나서는, 그 '이름'도 '모습'도 '움직임'도, 어느 것 하나도 성립될 수 없는 겁니다. 멀고 가깝고, 많고 적고, 빠르고 느리고 하는 일체의 현상들은 이것이 모두 '마음'의 느낌에 의해서, 우리의 마음 속에만 존재하는 겁니다. 이건 너무나 분명한 사실인데도 우리의 '마음'이 뒤바뀐 지 워낙 오래 돼서, 옛 어른들의 꾸지람을 면치 못하는 겁니다.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



조(肇) 법사가 이르기를,···

『만 가지 일, 만 가지 형상은 모두가 '마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마음'에 높낮이가 있으므로 언덕과 골짜기가 생긴다.』고 했어요.



그렇다면 이제 모든 법은 오직 '마음'이 지은 바라는 건 알았어요. 따라서 '마음'은 본래 '두 마음'이 없으므로, 이에 의지해서 세워진 모든 법도 당연히 '두 법'이 있을 수 없겠지요. ― 그런데 이 '수행 길'에는 늘 수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래서 선지식들은 언제나 경책하기를, 「차라리 한강 물이 거슬러서 오대산으로 흘러간다고 말할지언정 결코 '두 법'을 말하지는 말라」고 했던 겁니다. ― 그런데 저 망망한 우주공간을 탐색하다가 우리 앞에는 뜻하지 않게, 엄청난 '혼돈'(混沌)과 절묘한 '조화'라는 '두 법'이 대두하게 되었습니다. 이게 바로 위태로운 순간이에요. 이렇게 '두 법'이 나타나면, 범부의 정식(情識)은 금방 이 중의 어느 하나를 취하고, 다른 하나를 버리려고 대들거든요. 이것이 인간의 '의식'이 짊어지고 있는, 이른바 '국소적 편향성'입니다. 이것이 '일체지'(一切智)의 성취를 가로막는 원흉이에요. 이 '의식'이라는 놈은 일이 이 지경에 이르러서, 자신의 그 고약한 국집성이 여지없이 폭로됐는데도 한순간, 다시 놀라운 변신 솜씨를 발휘해서, ― 그 '국집성'을 제거하고 '원융된 안목'을 갖춰야 한다 ― 고 우기는 거예요. 그리고는 다시 목소리를 바꾸어서 말하기를, 「그래, 맞아! 그 '분별심'이야말로 모든 갈등의 발단이야」 하고는, 이내 이 '분별하는 마음'을 '분별 없는 마음'으로 바꾸기 위해서, 어두운 스승이 좋다고 권하는 '방편'을 따르면서 온갖 유위행을 감행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제가 하는 일이 또 하나의 '선택 행위'임을 까맣게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조주 선사(趙州禪師)가 시중(示衆)할 때 말하기를,···

『'지극한 도'(至道)는 어려움이 없으나, 다만 간택(揀擇)하는 것을 꺼릴 뿐이노라. <겨우 '한 마디 말'이 있기만 해도> 벌써 간택 아니면 명백(明白)이다. 나는 ('간택'은 물론이고)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나니, 그대들은 그래도 나를 지키고 아껴 주겠는가?』 했어요. 이때 어떤 중이 묻기를, ···
『이미 '명백함' 속에도 있지 않다면 '아낄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나도 모르겠노라.』
『화상께서 모르신다면 어째서 '명백함' 속에 있지 않다고 하십니까?』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이제 문답은 됐으니, 그만 절이나 하고 물러가거라.』 했습니다.



어때요? 여러분은 알 만합니까? 그런데 보아 하니, 이 좌중에서도 벌써 태반이 걸려들었어요. 「아! 저는 알았어요」「저는 이제 안 걸립니다」··· 오대산 밑의 노파가 한 말이 생각나는군요. 「멀쩡한 스님네들이 또 저렇게 가는구나!」 ··· 도무지 그 어디에도 '알았다'는 소견을 붙일 데가 없는 겁니다. 모르면 '무기'(無記)에 떨어지구요.···

그렇게 총명을 자부하던 사람들도 열이면 열, 다 여기서 속거든요. 아니, 사실은 매우 역설적이게도, 그 '총명'이 바로 여러분의 '의식'이 교활한 변신을 이룰 때 쓰는 상투적인 '가면'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영리하면 할수록 더욱 잘 속게 마련입니다. 참 바보가 되기가 어려워요. 또 바보가 된들 무슨 소용입니까.



박산(博山) 무이 선사(無異禪師)는 그의 선문경책(禪門警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공부를 하되, 그 '영리한 마음' 하나가 가장 두려우니라. 이 '영리한 마음'은 마치 독약과도 같아서 한 번 중독되면 비록 진짜 약이 나타나더라도 구제하지 못하느니라.

만약 진정한 참선객(參禪客)이라면, '눈'은 마치 소경 같고, '귀'는 마치 귀머거리 같고, 생각이 겨우 일어나기만 하면 마치 은산철벽(銀山鐵壁)에 부딪친 것 같으리니, 이렇게 공부해야 비로소 조금은 상응(相應)하리라.』라고 했습니다.



결국 우리들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체의 지견은 '진실'을 드러내는 데는 전혀 소용이 닿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견문각지'를 떠나서 '진실'을 찾는 것도 허물이기는 마찬가지구요. 그러므로 우리가 정식(情識)으로 굴리는 모든 생각은, 그것이 옳건 그르건, 또 참이건 거짓이건 간에 몽땅 망상인 겁니다. 우리들이 매일같이 눈을 떠서부터 잠들 때까지 '하는 일', '짓는 일'이 모두가 망상 아닌 게 없고, 심지어 잠을 자고 꿈을 꾸는 일까지 모두가 망상 아닌 게 없어요. 심지어 망상을 쉬려고 하는 노력까지도 역시 망상을 가지고 망상을 억누르는 것이니, 이 어찌 망상이 아니겠어요? 무릇 '생각하는 일', '일으키는 일', 어느 것 하나 망상 아닌 게 없는 겁니다.

요컨대 이 모든 '생각'이 본래 남(生)이 없는 줄 깨달아 알아서 집착만 일으키지 않는다면, 지금 있는 이대로가 몽땅 '마음의 근원'을 여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겁니다. 어느 '물결'이 '바다'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니 '망상'을 여의고 '참 마음'을 구하는 건, 마치 '물결'을 여의고 '바다'를 찾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어찌 헛수고가 아니겠습니까?

그러므로 온갖 법이 모두 '한 마음'으로 돌아가고, 무한한 공덕이 모두 '마음의 근원'에 본래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태여 '관(觀)의 힘'을 기를 것도 없고, '청정한 행'을 쌓을 것도 없으며, 또한 '마음'을 맑힐 것도 없고, 탐욕을 부리거나 성을 낼 것도 없습니다. 근심도 걱정도 다 놓고, 그저 호탕하게 걸림 없이 마음대로 사세요.

어때요, 그렇게 할 수 있겠어요? 그런데 참 묘한 게, 말끝마다 '자유'를 외치면서도 막상 그렇게 마음대로 하라고 하면 못하거든요? 그건 중생들이 모두 제가 길들여진 업(業)대로 사는 게 편안하기 때문에, ― 제가 길들여진 '의식의 울타리' 안에서 버릇들인 대로 사는 게 편안하니까, ― 그것이 마치 '자유'인 줄 알고 있어서 그래요. 따라서 지금처럼 그저 늘 이것저것 눈치나 살피면서 뭔가에 순종하기도 하고, 혹은 거역하기도 하면서 그럭저럭 살아가는 게 편안한 거예요. '완전한 자유'에는 안전이 보장되지 않거든요. ··· 그러므로 안전하게 지켜야 할 '나'가 있는 동안에는 아무리 '자유'를 외친다 해도 다 '공염불'임을 알아야 합니다.



요즘엔 믹서가 판을 치는 바람에 자취를 감췄지만, 여러분, 맷돌을 본 적 있지요? 그 축은 아무리 맷돌질을 해도 움직이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세상살이에 항상 바삐 돌아가면서도 결코 움직이는 일이 없는 '본래 마음', 이것을 되찾는 게 바로 <깨달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건 조작에 의해서 움직이지 않게 되는 게 아니라, 본래 스스로 여여(如如)해서 일찍이 움직였던 적이 없는 거예요. 이 점을 명심해야 합니다. 결코 아무것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면 틀려요. 하지 않으면 더 틀려요. 하건 하지 않건, 즉 유위(有爲)와 무위(無爲)를 가릴 것 없이, 그 영성(靈性)은 늘 스스로 여여한 겁니다. 갈고 닦고 한 끝에 비로소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우리의 '본성'(本性)은 본래 움직였던 적이 없고, 앞으로도 영원히 움직이는 일이 없어요.

옛날 사람들도 나름대로 천체를 살필 줄 알아서, 저 수많은 별들이 나름대로의 궤적을 따르면서 천공(天空)을 운행하고 있다는 걸 알았는데, 그 가운데서 유독 북두(北斗), 즉 북극성만이 늘 제 자리를 지키며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낸 거예요. 그래서 옛날 스승들은 참된 수행자가 구경(究竟)에 깨달아 들어가는 경지를 비유해서 북두장신(北斗藏身), 즉 '북두'에 몸을 감춘다고 했던 겁니다. 여러분도 이 점에 특히 유의하십시오. '깨달음'을 얻어야겠다고 잔머리를 굴리면서 함부로 부질없는 유위행을 일삼아서는 결코 될 일이 아닙니다. 어떤 경우에도 가만히 그 마음을 침착시켜서 회심할 줄 알아야 합니다. ··· 어떤 친구가 늘 멍한 표정을 하고 있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한다는 소리가, 「저는 지금 '회심의 상태'에 있습니다」 하는 거예요. 여러분, 그 마음을 움직여도 움직이지 않아도 모두 스무 방망이는 좋이 맞아야 합니다.



수행 시절 어느 날, 약산(藥山)이 가만히 앉아 있는데, 석두(石頭) 선사가 이것을 보고 말하기를,···

『그대는 거기서 무엇을 하는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一切不爲).』
『그렇다면 '한가히 앉은 것'이로구나.』
『만약 '한가히 앉아 있다'면 그것은 '함'(爲)이 있는 것입니다.』
이에 석두가 말하기를, ···
『그대는 '하지 않는다'(不爲)고 말하는데, 그 '하지 않는다'는 게 대체 무엇인가?』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
『천 성인도 알지 못합니다(千聖亦不識).』고 했습니다.



이에 석두는 다음과 같은 게송으로 칭찬했다고 합니다.

원래부터 같이 있었으나 이름도 모르고
되는 대로 맡겨둔 채 그저 이렇게 가노라.
예로부터의 성현들도 알지 못했거늘
<조작을 일삼는 범류(凡流; 범속한 무리들)>가 어찌 밝힐 수 있으랴?



훗날 원오근(圓悟勤)이 소참 때, 이 이야기를 들어서 말하기를, ···
『말해 보라! 필경 '하지 않는다'는 게 무엇인고?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고? 이미 천 성인도 알지 못한다면 어떻게 함께 사는고?···

그러므로 지금 목전에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모든 일에 대해서 결코 그대의 사량계교(思量計較; 분별하고 헤아려 짐작함)를 용납하지 않으며, <가까이할 수도 없고, 귀신도 엿볼 수 없나니>, 모름지기 천만 겹의 나쁜 지해(知解)를 벗어나야만 한다. 그제서야 '마음의 눈'(心眼)이 스스로 보겠거니와, 만약 '소견의 가시'(見刺)를 제하지 못하여 <얻고 잃음과 옳고 그름>(得失是非)의 관문에 걸리면 영원히 교섭할 길이 없도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