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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올바른 수행'(正修)이란,···
2.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 알지 못한다
3. '허공'에는 '방향'도 '위치'도 없다
4. 모든 것은 빛의 얼룩으로 화(化)하고,···
5. 우주 공간에는 <절대 정지해 있는 것>은 없다
6. 그 '영리한 마음'이 공부에 가장 해롭다
7. 눈앞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다
8. '여실히 본다'란, '허깨비처럼 본다'는 뜻이다
 
     
   

이제 다시 처음에 장을 벌였던 '밤하늘'로 돌아가서, ··· 그 숱한 별들 가운데는 분명히 몇십 '광년'(光年)에서부터, 몇백 광년 나아가서는 몇백만 광년 떨어진 데 있는 별들까지, 무수히 많은 별들이 어울려서 끝날 줄 모르는 장대한 원무(圓舞)를 추고 있습니다.

여기서 1광년이라는 건 초속 30만㎞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 가운데를 직진한 '빛'이 1년 동안 통과하는 거리를 말합니다. 그런데 300,000㎞/sec라는 빛의 속도는 1초 동안에 자그마치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이나 도는 속도니까, 이런 속도로 1년 내내 허공 가운데를 돌진한다면 그 거리가 과연 얼마나 되겠어요? 상상이나 갑니까? ··· 혹시 여기, 숫자 알레르기 있는 사람 없어요? 혹시 그렇더라도 안심하세요. 여기서 앞으로 제가 다루는 숫자는 그 알레르기 증세뿐 아니라, 여러분 마음 속의 온갖 묵은 체증까지를 말끔히 씻어내 줄 테니 속는 셈치고 괜히 마음을 사리지 마세요.

        300,000×60×60×24×365km

이것이 곧 '빛'이 일 년 동안 달리는 거리입니다. 즉 1'광년'이죠. 시간이 있으면 한번 계산해 보세요. 이건 우리가 일상 느끼는 속도감각으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지 않는 거리 아니에요?

이쯤에서부터 인간의 인식작용은 서서히 그 한계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즉 '지금'이니, '여기'니, '이것'이니 하는 따위의 이른바 한정적이고 주관적인 모든 용어들은 점차로 아무 의미도 없는, 그야말로 '빈 말'로 퇴화해 버리면서, 인간의 지각작용은 비로소 그 '유한한 틀'을 벗어나, 본연의 기능을 회복할 수 있는 계기를 맞습니다. 이 말이 갖는 의미를 아십니까? 여러분이 갈망하는 그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는 뜻입니다. ― 이 '깨달음의 순간'은 300,000㎞/sec라는 엄청난 속도가 바로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은 순간입니다. ― 그리하여 그 어지러웠던 '의식'이 반전하면서 '지혜'(知慧)가 드러나기 시작하는 겁니다.

어떤 사람이 꿈에서, 여러 무심도인(無心道人)들과 어울려서 신선(神仙)들의 세계를 소요하다가, 깨고 나서도 그 꿈속에서의 감각이 그냥 이어진다면, 그때의 눈빛은 아마도 저 어린 아기의 호기심에 가득 찬 눈빛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만약 그렇다면 그의 눈에 비친 이 세상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요? 억지로라도 한번 그런 눈빛이 된 것으로 쳐볼까요? 그렇게 되면 혹시 이런 물음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지금' '여기'서 '내'가 저 '하늘'의 '별'을 보고 있다는 건 과연 무슨 뜻일까? ― 별 희한한 질문을 다한다는 표정들이군요. 그런데 그게 사실은 희한한 게 아니에요.



우리가 알고 있는 이른바 광학(光學) 지식에 의하면 <'지금' 우리들이 보고 있는 '별'>이라는 것은, 실은 그 별에서 출발한 빛이 몇십 년, 혹은 몇백 년 동안을 초속 30만㎞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 가운데를 여행한 끝에 바로 '지금' 막 우리들의 망막에 와 닿은 게 아니겠어요? 예민한 사람이면 이 말을 듣는 순간, 이 '지금'이라는 말의 입지(立地)가 매우 위태롭게 흔들리는 걸 느낄 겁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 너무 멀리 떨어져 있는 별은 실감이 잘 나지 않을 테니까, ― 가령, 이 지구에서 50광년 떨어져 있는 별이 있다고 가정합시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별'은 자그마치 지금으로부터 50년 전, 그러니까 1951년에 그 별에서 출발한 빛을 '지금' '여기'에서 보고 있는 게 아니겠어요? 그렇다면 그 '별'이 2001년인 '지금 현재'까지도 그 자리에 아직 그냥 있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려면, ― 이건 참 이상한 일이 아닙니까? 지금 현재 멀쩡하게 보고 있으면서도 그것이 거기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를 알 수가 없다니 말입니다. ― 우리는 다시 50년 후인 2051년까지 기다려야 할 판입니다. 그리고 설사 그때에 가서 가부간 무슨 소식을 들었다고 하더라도 그 소식은 그때 이미 50년 전의 묵은 소식일 테니, 그렇다면 도대체 우리는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 것일까요? ··· 이건 완전히 말 그대로 <'제3의 손'으로 '허공꽃'을 만지는 격>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흔히 어떤 상황을 기술할 때, 그 글의 기본 골격을 세우는 데 쓰는 본(模型) 가운데 육하원칙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즉 <언제, 어디서, 누가, 무엇을, 왜, 어떻게> 하는 게 바로 그건데, 이 경우엔 '지금'이라고 하려니, 도무지 '지금'이라고 딱히 찍을 만한 시점(時點)을 잡을 수가 없고, 그렇게 되면 더욱 혼란스러운 게, 대체 '지금'이 없으면 '먼저'와 '나중'을 어떻게 분간할 수 있겠어요? '지금'도 없고, 따라서 '먼저'도 '나중'도 없다면, ― '시간'이라는 게 도시 '과거' '현재' '미래'를 빼고 나면 뭐가 남겠어요? ― 졸지에 '시간'이라는 문서가 종적을 찾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는데, 이것이 어찌 미증유의 큰 일이 아니겠어요?

더구나 그 '별'이 '지금'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조차 도무지 알아낼 길이 없다면, 이야말로 갈수록 태산 아닙니까? 육하원칙 중 어느 하나도 들이댈 게 없으니 말입니다. ··· 텅 트인 허공 가운데 무엇 하나 붙일 데가 없으니, 그렇다면 우리가 별을 본 경험을 무슨 수로, 어떻게 묘사할 수 있겠어요? 과연 '별'을 보기는 본 걸까요? 우리들은 과연 지금 무엇에 관해서 논의하고 있는 걸까요? ··· 이것이 바로 「말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헤아릴 곳이 없어졌다」(言語道斷 心行處滅)는 말이 홀연히 저절로 현전(現前)하는 순간입니다. 누가 억지로 입을 틀어막고 '묵언계'(默言戒; 침묵하는 계율)를 지키며, 누가 억지로 마음을 찍어누르면서 '멍청한 선'(癡禪)을 고집하겠어요?

망식(妄識)이 경계를 미혹하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이 모두가 실제인 듯해서 세속을 벗어날 길이 없고, 경계의 성품이 빈 것을 깨달아서 마음을 돌이키면, 지금처럼 보고 듣고 하면서도 아무 일이 없어서,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항상 적멸한 거예요. 즉 인연으로 말미암아 생멸하는 현상계에서 보면 모든 것이 실제로 있는 듯해서 걸음걸음마다 장애를 이루고, '장소'도 없고 '방향'도 없는 '법계 허공계'에서 보면 종일토록 굴리면서도 <본래 없는 것>을 굴리는 것이므로 항상 여여(如如)하고 참된 거예요.



경에 이르기를, 범천(梵天)이 문수(文殊)에게 말했습니다.

『어진 이의 말씀하신 바는 모두가 '진실'이십니다.』
이에 문수가 대답하기를, ···
『선남자여, '온갖 말'은 모두가 진실이니라.』
『'허망한 말'도 역시 진실입니까?』
『그렇니라! 왜냐하면 모든 언설(言說)은 허망하여 '처소'(處所)도 없고, '방향'(方向)도 없기 때문이니, <만약 법이 허망하여 '처소'가 없고, '방향'도 없으면, 곧 이것은 '진실'이니라>. 왜냐하면, 온갖 언설은 이 모두가 '여래의 언설'이며, '여'(如)에서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언어로써 말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말할 바가 없기 때문에 말할 바가 있게 되느니라.』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