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절과 인연을 따르되 조작하지 않는다.
  2. 법문(法門) :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란 개념은 환상이다.
  3. 공안(公案) :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찬양하고, 빈 말로 서로 이야기할 뿐이다.
  4. 게송(揭頌) : 백천 가지 법문이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어떻게 수행해야 하는가? · · · · · · 아마 불자(佛子)들이 가장 많이 품고 있는 의문 중의 하나가 이것일 것이다. 수행의 주체가 '나'인 동안은 천리 밖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또 그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돌아서면 다시 고개를 추켜드는 궁금증이 이것인 거 보면, 행위의 주체, 의식의 주체로서의 '나'라는 생각이 얼마나 뿌리깊은 멍에인지 알 수 있다.


바다는 오늘도 쉴 새 없이 출렁이고 있지만, 그 어떤 파도도 어떻게 물결쳐야 옳은가를 묻는 일은 없다. 천파만파가 다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다만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물결치고 바람이 없으면 잔잔할 뿐이다. 이 간단한 이치가 확연해져서 모든 행위와 사고(思考)의 흐름 가운데에 '나'라는 자취가 쑥 빠지고 나면, 그저 시절과 인연을 따를 뿐 조작하는 일이 없을 터이니 새삼스럽게 무슨 다른 수행이 필요하겠는가?




매사 이분법적으로 알아듣는 것에 이력이 난 범부들은 이 말을, 수행을 하면 틀리고 수행을 안 해야 옳다는 얘기로 알아듣기 십상이다. · · · · · · 마음은 그 자체가 본래 스스로 온전하여 전혀 인간의 조작 따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따라서 그것이 아무리 역사적으로 전통 있고 유명한 수행 방법일지라도 본래 마음 자리와는 전혀 상관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결국 유위의 공력(功力)을 들인 그 어떤 수행일지라도 그것은 새로운 조작이요, 새로운 업(業)을 길들이는 것에 불과하다. 모름지기 함이 없어야(無爲) 참된 수행이라 할 수 있으니, 이것이 곧 닦되 닦음 없는 닦음(修無修修)인 것이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연기법(緣起法)의 비밀한 뜻을 철저히 구명(究明)하여 만법이 성품 없음을 투철하게 사무친다면,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갈고 닦아 그 공덕으로 수행의 주체인 '내'가 깨달음을 얻겠다고 헛애를 쓰는 일은 없을 것이다.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고 늘 되뇌면서도, 있지도 않은 몸과 마음을 계속 들들 볶아서 깨달아 보겠다는 것은, 모래를 쪄서 밥을 하겠다는 것보다 터무니없는 일이다.




모든 중생이 일찍이 한 순간도 깨달음의 자리를 떠난 적이 없음에도, 다만 제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헛되이 밖을 향해 해탈, 열반을 구하느라 온갖 방편에 매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이 몸과 마음이 몽땅 무생이라 환(幻)과 같은 존재인데 어찌 그 허깨비가 작용이 있을 수 있겠는가? 참으로 이 사실을 사무쳐서 일체의 유위의 조작과 대처가 저절로 쉬게 되면,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상사가 손 하나 까딱 하지 않은 채, 그대로 참임을 알게 될 것이다.


수행한다는 생각도 놓고, 깨쳐야겠다는 생각도 놓고, 그저 시절과 인연을 따르며 조작하지 않는다면(隨緣無作) 이것이 곧 해탈이니, 따라서 고인도 이르기를 「있는 그대로이면 빠르거니와 조작하면 더디다」고 했던 것이다.




경전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그 뜻을 깊이 새겨 볼 일이다.


『성인이 정각(正覺)의 체성에서 작용을 일으킬 때, 마음에 지음이 없는 것(無作)이 부처인지라, 수행할 필요가 없으며, 설령 수행이 원만하다 하더라도 지금의 것을 바꾸지 않는 줄 알아야 한다.

따라서 마치 화신불(化身佛)이 변화한 몸매를 이룬 때, ― 고행하면서 깨와 보리를 잡수시고, 머리를 깎고 가사(袈裟)를 입고, 모든 장식(裝飾)을 버리는 일 등은 ― 모두 외도를 교화하기 위한 것이요, 결코 부처님 자신이 이와 같은 행을 필요로 해서가 아닌 것이니, 증상만(增上慢)이 없는 이가 어찌 이런 것을 구하겠는가.

한 생각이나마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담담히 지켜보면서) 조작 없는(無作) 성품에 맡길 수 있다면, 부처 지혜는 곧 앞에 나타나서, 얻음도 없고 증득함도 없는(無得無證), 이것이 바로 부처이리라』


또한 이르기를, · · · · · ·


『대저 본체는 현상을 장애하지 않나니, 구(求)함을 방해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한 현상은 본체를 장애하지 않나니, 구해도 구함이 없기 때문이다. 만약 이와 같이 닦으면, 닦음이 곧 닦음이 없어서 비로소 참 닦음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