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시절과 인연을 따르되 조작하지 않는다.
  2. 법문(法門) :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란 개념은 환상이다.
  3. 공안(公案) : 헤아릴 수 없는 것을 찬양하고, 빈 말로 서로 이야기할 뿐이다.
  4. 게송(揭頌) : 백천 가지 법문이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이 세상 삼라만상이 전부 인연화합으로 이루어진 것이니, 그 어떤 것도 제 고유의 성품이 없소. 그 스스로 독립적으로 성립되는 건 아무 것도 없다 소리요. 제 스스로도 존재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다른 그 무엇을 소유하고 교섭하고 작용을 일으킨다는 일은 전혀 불가능한 것이오.


진실이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범부들은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그 중심에 허망하게도 '나'라는 주재자(主宰者)를 설정해 놓고, '내'가 본다, '내'가 듣는다, '내'가 한다는 생각에 대해 한 치의 의심도 하질 않소. · · · · · · 이 '나'라는 것은 전적으로 생각만으로 빚어진 것일 뿐, 아무 의거할 것도 근거할 것도 없는 거요. 수천만 년 동안 그 허망한 '나'를 중심으로, '나와 너', '내 것과 네 것' 등등, 숱한 분한을 지어놓고 그 사이에서 수많은 갈등을 빚어냈던 거요.


만약 '나'와 '내 것'이 없으면 어떨 것 같소? · · · · · · 아무 갈등도 장애도 없을 것 같지 않소? 내 몸, 내 마음이 없으면 그야말로 무애자재(無碍自在) 해서, 그 무엇에도 걸림도 막힘도 없이 자유롭겠죠? · · · · · · · · · · · · 누가? · · · · · · '나'라는 생각이 그만큼 뿌리 깊은 거요.




시간, 공간적인 모든 제약에서 벗어나 자유롭고자 하는, 이른바 영원한 삶, 안정된 삶, 유복한 삶 등등의 온갖 바램들은, 전부 '나'를 이루고 있는 이 몸과 마음에 의거해서 비롯된 거요. 그런데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전혀 의거할 게 못 되는, 순전히 마음이 빚어낸 환상, 환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확연하게 드러났을 때, 경전의 글귀나 남에게 들은 게 아니고, 자신의 성숙된 깊은 통찰력으로 도무지 마음이라고 할 만한 마음이 없고, 몸이라고 할 만한 몸이 없다는 사실이 확연히 증험됐을 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소?


몸과 마음이 전혀 의거할 것이 못 된다면, '나'라는 삶이 도대체 어디에 의지해서 그 삶을 유지할 수 있겠냐는 말이오. 몸과 마음이 제 성품이 없는 전혀 가공적인 거라면, 우리 인간이 순간순간 보고 듣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면서 이른바 삶이라는 이름으로 영위하고 있는 모든 생명활동은 도대체 어디에 의거하고 있는 거요?


이런 물음에 이력이 난 사람들은 대뜸 법성(法性)이니, 진여(眞如)니 하면서 답을 하려 들 거요. 하지만 그런 식으로 아는 게 그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공덕이 있겠소? 그러한 이름들은 편의상 그저 그렇게 불려지는 것일 뿐, 진여 스스로 진여라고 한 적이 없소. 요는 스스로의 성숙된 통찰력으로 그 자리를 밑둥까지 확연하게 증험을 했는가 못 했는가에 있소. 찾으면 아무 데도 없지만, 인연만 닿으면 뭐든지 나투는 그 자리.




이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전혀 의지할 바 못 되는, 생각만으로 빚어낸 허망한 허공꽃 같은 존재라면, 전혀 실체가 없는 것이라면, 이 몸과 마음은 도무지 갈고 닦고 어떻게 해야할 것이 전혀 못 되는 거요.


지금 여러분이 여기 와서 귀를 쫑긋하고 듣는 이유가 뭐요? 이 몸과 마음을 어떻게 하면 맑고 깨끗하게 할까, 그래서 무애자재한 경지에 닿을 수 있을까, 궁극적으로 어떻게 하면 깨칠 수 있을까, 그런 속셈이 있는 것 아니오? · · · · · · 그런데 그 몸과 마음이라는 것이 전혀 의거할 게 없는 거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하는 걸 지금 보라 소리요. · · · · · · 이건 정답을 대라 소리가 아니오. 그러한 경우를 한번 상상이라도 해 보시오.




시간도 공간도 실체가 없어서, 다만 우리의 한 찰나 한 생각으로 지어내는 게 시간이고, 한 찰나 한 생각으로 지어내는 게 공간이라면, 다시 말해 우리 마음이 지어낸 것이 시간이고 공간인데, 어떻게 그 마음이 그 시간, 공간의 제약을 받을 수 있겠소? 자기가 지은 것에 어떻게 자기가 제약을 받겠냐는 말이오. · · · · · · 그런데 실상은 어떻소? 자기가 지은 것에 자기가 걸려 지금 옴짝달싹 못하고들 있지 않소?


이 말을 듣고 보나마나 속으로 "그래도 그렇지만 · · · · · · " 하고 꼬리를 끄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거요. 지금 여러분이 알기로는 시간, 공간은 절대적인 거요. '나'라는 미미한 존재가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소위 불가침적인. 그래서 이른바 절대 시간이니 절대 공간이니 하는 개념이 생겨난 건데, 20세기 초엽에 들어오면서 이미 과학적으로 그 대단한 절대 공간, 절대 시간 개념이 타파됐소. 특정 종교의 관념적인 가르침을 통해서가 아니고 순수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그 절대 공간, 절대 시간 개념이 타파된 거요. 이미 100 년 전에.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없다는 게 무슨 뜻이오? · · · · · · 우리의 모든 사고, 생각은 일정한 지점(地點)과 시점(時點)의 기준이 없으면 구를 수가 없소. 그 '지금', '여기'라는 것은 전적으로 이 몸과 마음에 의해서 결정되는 거요. 그런데 그 몸과 마음이 전혀 허깨비 같아서 실체가 없다면, 무엇에 의거해서 '지금'이니 '여기'니 하는 것을 한정지을 수 있겠소? 몸과 마음이 없으면, 지점이니 시점이니 하는 게 없는 거요.


그래서 하는 소리요. 오직 텅 트인 법계일 뿐이라고. 허공에 나부끼는 숱한 허공꽃 중의 하나를 붙잡아 '나'라고 알고 '너'라고 알았는데, 이 '나'가 소멸되면 오직 하나의 참된 법계일 뿐, 여기니 저기니, '나'니 '너'니, 먼저니 나중이니 하는 그 어떤 시간, 공간적인 전개가 전혀 근거가 없어지는 거요.


'나'라는 중심이 없어진다는 것은 기준이 없어진다는 말이오. 이 몸과 마음이 전혀 의거할 데가 없다는 사실이 밝혀지는 순간, 모든 낱낱의 소중심(小中心)들이 전부다 해소돼 버리니, 이것이 이른바 지귀(知歸)요. 하나로 돌아가는 거요.




모든 논리체계와 가치체계는 이 몸과 마음을 '나'인 줄로 아는, 전혀 잘못된 출발 때문에 생겨난, 전혀 쓸데없는 이론일 뿐이오. 소위 관찰한다 것, 즉 '내'가 보고, '내'가 듣고, 그래서 그것을 바탕으로 연구해서 깨달아 안 모든 결과는 전혀 환상이오. 이 사실을 확실히 깨닫는다면, 새삼스레 비울 것도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인 채로, 그 동안 긁어모았던 모든 것이 전부다 빈 거로 돌아가오. 그러면 심행처멸(心行處滅)이라, 저절로 말길이 끊어지고 마음이 계속 바깥으로 내달아 뭔가를 헤집고 이루려고 하던 헐떡증이 저절로 쉬어지는 거요.


인간은 인식작용을 통해 자기 경험을 축적하오. 인식작용을 통하지 않으면 경험이 기억되지 않소. 그런데 이 몸을 굴리는 주체인 줄 알았던 '나'라는 중심이 소멸되어, 몸도 마음도 도무지 의거할 데가 없다면, 그럼 그 기억이 어디에 축적되겠소? · · · · · · 몸과 마음이 전혀 허망해서 실체가 없다는 말은, 이 몸과 마음을 사방으로 끌고 돌아다니면서 보고 듣고 해서, 이거는 이렇고, 저거는 저렇고 하며 주워 모아 축적하는 모든 기억, 모든 경험, 모든 지식이 이제 모일 데가 없다는 얘기요. 그 어떤 것도 '나'의 체험이라고 할 만한 게 없는 거요. 모두 법계에 속할 뿐, 그저 인연 따라 법계의 감응 아닌 감응일 뿐이오.




참 지혜, 참 수행이 드러나면, 그 동안에 들었던 모든 지견은 저절로 끊어져요. 색즉시공이니 공즉시색이니, 색즉색(色卽色)이니 공즉공(空卽空)이니, 전부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었을 뿐인데, 만약 여러분이 그 말마디 가운데서 정답이라고 꼼쳐서 간직했다면 그게 바로 그 마음 한가운데 박힌 무쇠말뚝이니, 영원히 구제할 길이 없소.


어머니 배밖에 나와서 지금까지 듣고 읽고 익혔던 모든 게 전부 다하기 전에는 절대로 참된 수행이 있을 수 없소. 제멋대로 참되고 허망한 것을 갈라서 참된 걸 추구하고 허망한 걸 쫓아내려고 헛애를 쓰고 있는 것뿐이오. 본래 한 법계에는 참된 것도 허망한 것도 없는데 다만 인간이 분별을 지어 참되고 허망함을 구분 짓는 것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