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며칠 전, 이 우주 공간에는 '지금'이라는 시간적 눈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빛의 속도'가 초속 30만㎞나 된다는 사실을 비롯해서, 이 빛이 1년 동안 허공 속을 직진(直進)하면서 통과하는 거리를 1광년(光年)이라고 한다는 것 등을 알았어요. 즉, 가령 50광년 떨어진 곳에 있는 별을 '지금' '여기'에서 보고 있다고 가정한다면, 그것은 곧 그 별에서 출발한 빛이 50년 동안을 초속 30만㎞라는 어마어마한 속도로 허공 가운데를 직진한 끝에 '지금' 막 나의 망막에 와 닿은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새삼 어리둥절했던 적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그 별이 '지금'도 아직 그 자리에 있는지의 여부를 알아내려면, 속절없이 다시 앞으로 50년을 더 기다리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도 알았구요.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을 가리켜 '지금'이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즉 다시 말해서, '나'와 그 '별' 사이에서 일어난 일의 시제(時制)를 어디에 설정해야 할까요? 또 만약 '지금'이라고 할 만한 게 없다면 '과거'니 '미래'니 하는 것인들 어떻게 세울 수 있겠어요?

그런데 오늘은 어떻습니까? 모든 존재는 본래 '제 체성'(自體性)이 없어서, 즉 '허공성'(虛空性) 바로 그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생멸하는 일도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다는 게 아니겠어요? 양자이론에서처럼 「도대체 '무엇'이 움직이는가?」 하고 물음을 던졌을 때, 도무지 '이것'이라고 가리킬 만한 '작용의 주체'를 찾을 수가 없으니,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작용'이 어떻게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바로 이때 양자물리학자들이 「지금 '무엇'이 움직이고 있는가?」 하고 물었을 때의 이 '무엇'말입니다. 이 '무엇'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자꾸만 홀리거든요. 즉 무의식중에 이 '무엇'이 '실체'(實體)를 가진, 구체적인 '있음'으로 다가오기 십상입니다. 그들이 「'무엇'이 ···」 하고 말했을 때엔 '양자'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인데, 그들은 이 '양자'가 '있다'고 할 수도 없고, '없다'고 할 수도 없는, 쉬운 말로 허깨비 같은 존재임을 이미 잘 알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내가 <그것>을 볼 때에만 <그것>은 '있음'이나 '없음'의 형식으로 드러나고, 내가 보지 않을 때에는 <그것>이 <거기>에 있는지 없는지 아무도 말할 수 없다는 겁니다. 바로 '허공성'인 거지요. 따라서 이 '허공'은 통상적인 의미의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그것>들을 포함하고 있으면서 '인연'만 닿으면 즉각 <그것>들이 '모습'을 드러내는, 항상 스탠바이 상태에 있는 '창고'와도 같은 그런 존재인 겁니다. 이 경우에도 조심해야 할 일은, '허공' 속에 <그것>들이 포함되어 있는 게 아니고, '허공'이 바로 <그것>들이고, <그것>들이 바로 '허공'이라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겉으로 보기엔 '허공'과 같아서, 아무리 찾아도 볼 수 없기 때문에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그 내용이 일체만유(一切萬有)로 꽉 찬 광(藏)인 겁니다. 이른바 '불법'에서 말하는 '법계장'(法界藏)이지요. 따라서 이 '법계장'은 '허공'과 '존재'의 성품을 동시에 갖고 있는, 만유(萬有)의 근본인 거예요. 이 점을 철저히 이해해야 합니다.

따라서 오늘은 이 ― '존재'와 '허공', '있음'과 '없음' ― 의 관계를 명료하게 이해하도록 단단히 자기 자신을 다그쳐야 하겠어요. 하기사 이것만 온전히 이해된다면 '깨달음'은 바로 코앞에 있는 거나 다름없습니다.

여기서 사람들을 가장 헷갈리게 하는 부분이 바로 '허공'과 '존재'에 대한 일반적인 정의(定義)입니다. 간단히 말해서 이 '둘'이 서로 대립적인 관계에 있는, 각기 독립적인 '실체'로서 정의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건 전적으로 '의식'의 장난입니다. 여러분, '허공'이라는 게 그 속에 '존재'의 흔적이 없어도 '허공'이 제 혼자서 '허공'이라는 존재성을 유지할 수 있을까요? 그런데 놀랍게도 「그렇다!」고 대답하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에요. 누군가는 「나는 그렇지 않은데, ··· 」라고 말하고 싶겠죠? 그러나 안됐지만 「그렇다」도 「그렇지 않다」도 다 아닙니다. 그것은 모두 '허공'에 대한 설명일 뿐이지, 결코 '허공' 그 자체는 아닌 겁니다.

그러면 여기서 '허공'이라는 말 대신 '공간'(空間)이라는 말을 놓고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공간'이라는 말은 그 말 그대로, <'이것'과 '저것' 사이의 빈 간격>이라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입니다. 그렇다면 '이것'과 '저것'이 모두 없을 경우에는 이 '공간'은 어디에 의지해서 그 이름이 붙여지겠어요? 그러므로 '이것'과 '저것', 즉 <온갖 '존재'가 있건 없건 간에 항상 스스로 혼자서 존재하는 '절대공간'이라는 개념은 전적으로 망상(妄想)의 소산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 '허공'조차도 붙을 수 없는 자리 ― 그렇다면 이와 같은 사실을 '누가' 알까요? 어떻게 알까요? 알면 망상이요, 모르면 무기(無記)입니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여전히 <그런 경지>에 대해서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는 버릇을 쉬지 못하거든요.

그러므로 '허공'에 대해서 어떻게 알아도 그것은 '허공'이 아니라, '허공'에 대해서 그려내는 '의식'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겁니다. 지금의 이와 같은 설명에 대해서 전적으로 수긍하는 사람은 결코 '허공'을 알 수가 없습니다. 물론 이 설명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더 말해서 무엇하겠습니까? 「'허공'이 그대로 '존재'요, '존재'가 그대로 '허공'인 겁니다.」 즉 '허공'과 '존재'라는 이름은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해서 세워진 것>(相生)이기 때문에 '존재'가 없으면 '허공'도 없고, '허공'이 없으면 '존재'도 혼자선 있을 수 없는 겁니다. 이것이 곧 <색불이공 공불이색 색즉시공 공즉시색>(色不二空 空不二色 色卽是空 空卽是色)의 진짜 뜻입니다. 따라서 이 뜻을 철저히 사무쳐야 비로소 '진여법성'(眞如法性)을 보아서 '실상의 해탈'을 이룰 수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 때, 그 '깨달음'을 얻은 이는 과연 '무엇'을 깨달은 걸까요? ··· 그래서 옛날부터 무엇인가를 알아내려고, 또는 무엇인가를 얻으려고 공연히 바삐 서두는 꼴을 보면 「중이 뿔났다!」, 「중 뿔나게 무엇이 그리 바쁜고?」 하고 핀잔을 줬던 것 같아요.

그러므로 '허공'도 '존재'도 다 무명 중생을 이끌기 위해 성인들이 시설한 방편의 말씀일 뿐입니다. 따라서 이 '빈 말'에 끄달리면서 '지견(知見) 놀이' 만을 일삼는다면 끝내 <성교(聖敎)의 참뜻>은 알지 못하고 말지 않겠어요? 요컨대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순일한 허공성으로서의 '본분'(本分)밖에는 보지 않는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것만이 인연으로 말미암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참되며, 그 밖의 '모습'이 있고 '이름'이 있는 모든 '존재'는 '자체의 성품'(自體性)이 없어서, 전혀 '의식'에 의해서 지어진 환(幻)과 같이 허망한 존재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본분납자'의 안목으로 본다면, 목전에 산하대지 삼라만상이 마구 뒤섞여서 어지러울 때에도 그 모두가 오직 '한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일 뿐인 겁니다. 오직 <'나' 하나뿐>인 거지요. 그러니 '누가' '무엇'을 보며, '누가' '무엇'을 들을 수 있겠어요? ··· 보지도 듣지도 못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보는 자'가 있어서 '경계'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모두가 다만 작용 없는 '참 성품'이 인연에 감응해서 나투는 '성품의 비추어 냄'(性曉)이라는 겁니다. 지금에 이렇게 면전에 전개되는 모든 존재는 다만 무명 때문에 '마음의 거울'에 나타나는 업(業)의 그림자일 뿐이며, 따라서 '마음'도 '경계'도 이 모두가 다 '참 나'의 분신(分身)일 뿐입니다.



어느 비 오는 날, 경청 선사(鏡淸禪師)가 어떤 중에게 묻기를,···

『문 밖에 무슨 소리인가?』
『빗방울 소리입니다.』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중생이 뒤바뀌어서 '자기'를 잃고 '물건'을 좇는구나.』 했습니다.
이에 중이 도리어 묻기를, ···
『화상께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마터면 '자기'를 잃지 않을 뻔했도다.』
『'자기'를 잃지 않을 뻔했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몸을 빼내기는>(出身) 그래도 쉽거니와 <몸을 벗어나는 일>(脫體)을 말하기는 참으로 어려우니라.』라고 했답니다.



설두현(雪竇顯)이 이 화두를 들고(拈)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빈집의 빗방울 소리를 작자(作者)도 응수하기 어렵구나.
일찍이 깨달았다 해도 여전히 알지 못한다.
안다(會)거나 알지 못한다(不會) 함이여!
남산과 북산에 더욱 좔좔 흐른다.



백운병(白雲昺)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경청 화상이 비록 잘 거두고 잘 놓았으나 자세히 점검하건대, 칼날을 잡아서 손을 상하는 꼴을 면치 못했다. 무슨 까닭인가?

몸을 빼내건, 몸을 벗어나건 더욱더 '자기'를 미(迷)하나니, 금(金)으로는 금을 바꿀 수 없고, 물로는 물을 씻을 수가 없기 때문이니라. 설사 당장에 망정(妄情)이 다하고, 소견이 없어지더라도, 입술이 달라붙고, 이(齒)가 매달림을 면치 못하리라.』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