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저 위대한 <깨달음의 순간>에는 '나 자신'까지를 포함한 이 세계가 온통 '완전한 하나'로 나타나는 순간입니다. 본래 '하나'인 이 '법계 허공계'(法界 虛空界)를 토막토막 갈라놓았기 때문에 우리들의 삶이 지금처럼 이렇게 시끄럽고 어지럽고 고달프게 된 겁니다. 이렇게 분석적이고 이분법적인 사고방식과 행동양식이 평소 우리들의 삶을 은연중에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은 항상 사물을 관찰할 때, 이것을 <주어+술어>의 형식으로 분리해서 생각하게끔 틀 지워져 있는 겁니다. '주체'와 '객체'를 전혀 별개의 것으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것, 이것이 곧 '인식작용'(認識作用)의 '기본 틀'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인식작용'은 이루어질 수 없겠지요.

지금 여기에 있는 '나'가 저기 바깥에 있는 '관찰대상'을 똑똑히 인식해야 그것이 '나의 체험'으로 기억되지 않겠어요? '기억'이 수반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코 '나의 체험'이 될 수 없을 테니까요. 이것은 아주 뿌리깊고 오래 된 '사고의 틀'이에요. 본래 '하나'인 이 세계를 감쪽같이 둘로 갈라놓고도 전혀 그와 같은 사실을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는 게 범부들의 근성입니다. 제가 토막낸 게 아니고, 그것들이 본래 스스로 그렇게 따로따로 존재하는 별개의 물건들이라는 거죠. 따라서 지금 이렇게 거론하는 것조차도 「그게 어쨌다는 건데? ··· 」 하고, 오히려 의아하게 여길 정도거든요.

이 '인식작용'이란 곧 '의식'(意識)의 작용인데, 이 '의식'은 우리들이 상대경계(對境)와 접촉할 수 있는 오직 하나뿐인 통로입니다. 이 '의식'말고는 달리 '바깥의 경계'와 교섭할 수 있는 길이 있을 수 없지 않겠어요? 이것도 나중에 '의식'과 '경계'의 관계가 완전히 드러나고 보면, 이 "서로 교섭한다"는 말도 전혀 허구였다는 사실이 밝혀지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이 '의식'이 해내는 기능이라는 게, 때때로 사물을 여러 토막으로 갈라놓고는, 그것들을 상대로 '헤쳐, 모여'를 거듭하면서 사뭇 법석을 떨던가, 아니면 다시 이것들을 '하나'로 합쳐 놓음으로써 '고요해지기'를 도모하던가 하는 등이 고작입니다. ··· 이 '식'(識)이라는 글자를 가만히 살펴보세요. <言+音+戈> 즉, <말과 소리와 창>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분위기부터가 벌써 시끌시끌하잖아요? 이 '의식'이야말로 본래 '하나'인 '본체'를 토막토막 갈라놓음으로써 숱한 사단(事端)을 만들어낸 바로 그 원흉인데, 그러는 한편으로는 다시 변덕을 부려서, 지금처럼 이렇게 스스로 자신의 부정적인 면을 들추어내기도 하면서, 「이 '의식'이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 결코 안정은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답니다. 그리고는 그 '의식', 곧 '제 자신'을 내쫓거나 찍어누르는 일에 앞장서기도 하구요. 어쨌거나 참으로 종잡을 수 없는 괴물이 바로 이 '의식'이라는 물건입니다. 오죽하면 '놓아 기른 망아지'(意馬) 같다고 했겠어요?

어쨌거나 '의식'이 하는 일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하나도 취할 만한 게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맨 처음부터 천진한 '본래 마음'을 등지고, 밖으로 내달으면서 사사건건 사단을 일으킨 놈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이렇게 전혀 종잡을 수도 없고,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이 '의식'을 우리의 '마음'인 줄 잘못 알고 지금까지 지성으로 좇으면서 섬겨왔던 겁니다. 참 알고 보면 어이없는 일이지요. 지금에 이와 같은 말을 듣고는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그래, 맞아! 이제부터는 결코 '의식의 장난'에 홀려서 그것을 좇고 섬기고 하는 일은 없어야지, ···」 하고 다짐하는 게 바로 그 놈입니다.

이 '의식'이라는 건 '마음'이 아니고, 다만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였던 겁니다. 이 놈이 요술처럼 온갖 장난을 부리면서 사람들을, 아니, 자기 자신을 감쪽같이 속여왔던 겁니다. 세상에 자기 자신의 속임수에 제가 넘어가는 경우를 봤습니까? 그만큼 이 '의식'이라는 놈은 다스리기 어려운 물건입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이와 같이 '의식'의 결정적인 허물을 밝혀내고, 다시는 그에 속아서 휘둘리는 일이 없기를 다짐하면서 '마음 공부'를 하고 있는 사람들 가운데에도, ― 거개가 모두 그렇지만, ― 여전히 '마음 공부'의 방편으로써 이 '의식'에 의존하고 있는 걸 보는데, 그러면서도 전혀 그 같은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으니, 참 어처구니없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수행자라면 마땅히 알아야 합니다. 만약 '마음 공부'를 하는 데 있어서 <올바른 '발심'(發心)을 하지 못하고>, 어떤 방편 ― 어떤 방편이건 간에 ― 에 의지하면서 보다 바람직한 어떤 결과를 얻기 위해서 노력한다면, 이런 사람은 모두 예외 없이 '의식'의 포로가 된 사람들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의식'을 앞세워서 그것에 의존하는 사람이나, 또는 '의식'을 쓸어내고 고요함에 처한 사람이나, 모두가 '깨달음'을 얻기는 글렀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 일입니다.



영명수 선사(永明壽禪師)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어찌 의식의 성품을 떠나서 따로이 진심(眞心)이 있겠습니까?』 하니, 영명수가 대답하기를,···

『부처님이 능엄회상(楞嚴會上)에서 자세히 분별해 주셨거늘, 그대들이 여전히 믿지 않을 뿐이다.

그때, 아난(阿難)이 <추측하여 따지는 마음>(識心)으로써 '마음'이라고 여기다가 부처님의 꾸지람을 들었는데, 이 <추측해 따지는 마음>은 '마음'이 아니라 '의식'이니라. 만약 '의식'이 형상을 따르면서 움직이면 (움직임이 없는 것으로써 옳음을 삼아도 마찬가지이다) 이것이 곧 '번뇌'이고, '의식'이라 할 뿐 '마음'은 아니니라.

'뜻'(意)이란 곧 '기억'이니, '앞의 경계'(前境)를 기억하여 망상을 일으키는 것이므로, 이 모두가 허망한 '의식'이요, '본래 마음'(本心)과는 상관이 없는 일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의식'이란 이렇게 과거의 기억이 쌓이고 엉켜서 이루어진 건데, 이것이 사물을 대할 때마다, <이 일회적이고 찰나적일 수밖에 없는 신선한 삶의 체험>을 온통 과거의 기억에 얽힌 묵은 감정으로 뒤덮어버리고 마는 거예요. 때문에 우리 모두는 늘 이 '삶'을 새롭게 살 수가 없는 겁니다. 우리들의 '삶'의 순간순간은 늘 스스로 새로운 건데도 말입니다. 그것이 사람이건 사물이건 간에 그 자체는 늘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그 새롭다는 것도 찰나뿐이고, 곧 낡은 것으로 되고 맙니다. 생각해 보세요. 그것이 생전 처음 대하는 거라면, 그에 대해 무슨 끈적한 묵은 감정이 있을 수 있겠어요? 순간순간 늘 스스로 신선하고, 오직 경이롭기만 한 삶, 이것이 곧 '창조적인 삶'이며, 이야말로 삶의 진정한 아름다움입니다. ··· 그런데 우리가 늘 그 비뚤어지고 때묻은 '의식'을 앞세워서 사물을 대하기 때문에 그 삶의 아름다움을 누리지 못하고, 항상 따분하고 고달프고 근심에 찬 삶을 살 수밖에 없으니,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람들은 자신의 사고체계를 이렇게 주체와 객체의 두 부분으로 갈라놓음으로써 얼마나 엄청난 재난을 자초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어요. 제가 그렇게 갈라놓은 줄이나 아나요? 사실이 본래 '둘'이니까 '둘'이라고 알았을 뿐이라고 여기는 거예요. 불가(佛家)에서는 이 '주체'와 '객체'를 구식으로 능·소(能所)라고 말합니다. 그렇게 표현하는 편이 여러모로 편리한 면이 있지요. 가령 능력(能力)이라는 말도 '작용의 주체'에 갖추어진 '힘'이라는 뜻이거든요. 「능히 할 수 있다」고 말할 때에도 어디까지나 '작용의 주체'를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지 않겠어요?

<'인연'으로 말미암아 나(生)는 모든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인데>, 다시 무엇이 있어서 <'작용'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이 있겠어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간에, 그 모두가 허깨비와 같은 존재여서 생각도 없고, 힘도 없는 겁니다. 이 몸과 마음이 바로 그렇다는 거예요. 지금 내가 이렇게 말하고, 여러분이 이 앞에서 듣고 있는, 이 사실이 몽땅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꿈과 같고 환(幻)과 같은 일이어서, 여기에는 '작용하는 주체'도 없고, '수용(受用)하는 주체'도 없는 것이 진실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몸을 환화공신(幻化空身; 허깨비처럼 실체가 없는 몸)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니 여느 사람들이 <그 모든 일이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작용의 주체'가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이나 할 수 있겠어요? 지금 이와 같이 자세히 일러줘도 믿어지지 않을 텐데 말이에요. 더구나 어떤 개체가 있어서 그가 공력(功力)을 들여서 일을 성사시키는 '주재자'(主宰者)가 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겠어요? 따라서 이제부터는 꼭 명심해야 합니다. <온갖 일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본래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그러므로 선현들도 늘 경책하여 이르기를, 「'수행의 주체'가 '나'인 줄 알고 있는 한, 천리(千里) 밖이다」라고 했던 겁니다.

본래 '하나의 법'이 행해지고 있을 뿐인데도, 이것을 억지로 '짓는 자'와 '받는 자'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놓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무슨 일을 시작할 때면, 으레 시작하기 전부터 "할까 말까" 망설이고, 일을 하면서도 혹시 잘못될까봐 늘 허둥거리고, 일을 마치고 나서는 또 후회하고.··· 이런 못난 짓을 반복하지 않을 수 없는 게 우리들의 일상 아닙니까? 이 모두가 알고 보면 까닭 없이 능·소를 둘로 갈라놓음으로써 꼼짝없이 '인과법'에 갇혀 버렸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다시 말해서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原因行爲)이 나중에 이에 상응하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믿기 때문이 아니겠어요? 또한 그것이 사실이기도 하구요. '원인'으로 말미암아 '결과'가 오는 것은 필연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어떤 구체적인 질적(質的) 이동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원인'은 그저 '결과'를 낳는 데 단순한 '계기'가 되었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여기서 헷갈려서 '원인'에서 '결과'로 주욱 이어지는 어떤 지속적인 존재가 실재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있는 거예요. 즉 인행(因行)을 지어놓고는 그 결과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나'라는 주재자(主宰者)가 실제로 존재하는 것으로 착각한 채 살아가는 게 바로 우리 범부들의 일상인 겁니다. 진정 모든 일은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짓는 자'도 '받는 자'도 없다는 사실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참 나'(眞我)야 목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건, 일찍이 꼼짝 한 일도 없는 겁니다. 영특한 사람이면 여기서 문득 '몸을 벗어날'(脫身) 계기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다시 자세히 언급할 기회가 있겠지만, 어쨌거나 우리들 눈에, 시간의 흐름을 따르면서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실체'로 보이는 모든 것은 그것이 실재하는 게 아니고, '순간순간 다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는 지속적으로 주욱 이어지는 존재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또한 우리들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짓는 자'가 있어서, 그가 공력(功力)을 들여서 짓는 게 아니고, 이 모든 게 다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라는 사실입니다.
즉 '작용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당연히 그 인행(因行)에 대한 과보(果報)를 '받는 자'가 있는 게 아니라는 거예요. 이 모든 일들은 시절과 인연을 따르면서, 다만 그럴 만해서 그럴 뿐인 겁니다. 그 결과가 좋건 나쁘건, ― 그것을 '좋다' '나쁘다' 하고 분별할 자도 없구요. ― "요는 그럴 뿐이다!"라는 거예요. 이것은 '법'이 본래 그런 겁니다. 그러므로 지금처럼 여전히 업(業)도 짓고 보(報)도 받지만, 거기 주재자가 없다는 사실을 잊어선 안 됩니다. 어디를 찾아봐도 '작용의 주체'나 '수용의 주체'라고 할 만한 '나'는 없습니다. '주재자'가 없는데 '업'이건 '보'건 다 어디에 붙겠어요? 이 사실을 깊이 통찰해야 합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대저 <지음이 있는 법>(有作法)은 이루기 어렵거니와, <'인연'을 따르되 지음이 없어야>(隨緣無作) 갖추기 쉽다. '짓는 자'(作爲者)는 수고롭되 그 공(功)이 없나니, <지음이 없이 '인연'을 따르는 것>(無作隨緣)이라야 스스로 성취한다. <공력을 들임이 없는 공>(無功之功)은 그 '공'이 헛되이 버려지지 않으며, <공력을 들이는 공>(有功之功)은 그 '공'이 모두 '덧없는 것'(無常)이다.

오랜 겁(劫)에 걸쳐서 쌓은 모든 공업(功業)이 마침내는 다 부서지고 허물어져 버리나니, <'한 생각으로 인연 따라 일어나는'(一念緣起) '남이 없음'(無生)으로써> 저 삼승(三乘)과 권학(權學) 등의 견해를 초월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고 했습니다.

또한 이르기를···

'있는 법'도 '없는 법'도 모두 '체성이 없다'(無性)는 사실에 바탕하여, '여여한 법'(如法)이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난다. 그러므로 다함 없는 '이름과 말'(名言)들이 서로 '주'(主)가 되고 '반'(伴)이 되면서 세간법을 따라 세워지되, 서로 이루어지고 서로 허물어지면서, 이 하나하나의 명자(名字)에 다함 없는 뜻이 있음이 마치 <'제망'(帝網; 인다라의 그물)의 그림자>가 겹겹이 서로 드는 것(相入)과 같다. 그러나 그 '본원'(本源)을 깊이 살피건대, 이 모든 '이름과 말'들이 다 '환'(幻)과 같은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는 것인지라, 각각 '주재'(主宰)가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이름'은 소리로 더불어 '소리'를 짓지 않고, '소리'는 이름으로 더불어 '이름'을 짓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혜'가 본래 없음>이 마치 '허공'과 같아서, 온갖 곳에 두루하여 '중생계'와 같다. 이와 같은 '지혜의 체성'으로써 '비슷한 소리'(類音)들을 따라 하여금 다 환희하여 '해탈'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