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과학이 이 <지극히 비밀한 이치>를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밝혀냈다는 사실입니다. ··· 양자역학으로 대표되는 현대과학은 우주를 구성하는 궁극의 질료를 찾기 위한 오랜 노력 끝에 「<그런 것>은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한 겁니다. 동시에 양자이론은 그간, 우주의 '궁극적인 질료'라고 여겨왔던 '양자'가 바로 구경(究竟)에 가서는 '관찰자의 마음'과 다르지 않다는 강력한 여러 징후들에 직면하게 됩니다. 이것은 바로 다름 아닌,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심경불이(心境不二), 즉 「'마음'과 '경계'는 둘이 아니다」라고 설파한 것과 같은 자리에 다다랐다는 걸 의미합니다. 결국 2500년이라는 세월을 격(隔)해서 동·서양의 지혜가 극적으로 '하나의 접점'을 얻은 셈이죠. 만약 이런 견해가 온전히 제 자리를 얻을 수만 있다면,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다 중생의 망상으로 지어진 거라오」 하는 말도 머지 않아 모든 사람들에게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 않겠어요? 마치 '천동설'이 '지동설'로 대체되었듯이 말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이 '양자'들은 '관찰자'가 어떤 실험방법을 택하는가에 따라서, 즉 '관찰자'가 '보는 바'대로, 그 모습이 '물질'로도 나타나고 '비물질'로도 나타난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은 곧 바꾸어 말해서 '관찰자'가 '있다'고 하면 '있고' '없다'고 하면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양자'라는 거예요. 그렇다면 이 '양자'는 당연히 사람의 '마음'과는 별개로 존재하는 물질적 실체(實體)가 아니라, 바로 '마음'에 의해서 투영된 '마음의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을 피할 수 없지 않겠어요?

'양자이론'에서는 이미 '양자'가 먼지와 같은 '알갱이'가 아니라는 사실이 구명된 지 오랩니다. 이쯤 되면 벌써 이것은 과학자들이 감당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난 게 아니겠어요? ― '양자'가 그대로 '마음'이고 '마음'이 그대로 '양자'라는, ― 이 사실을 과학적인 방법으로 증명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더구나 '양자'도 이미 통상적 개념의 '물질'이 아니고 보면, 더더욱 그렇지요.

이런 의미에서 입자물리학(粒子物理學)의 세계관은 곧 <'물질'이 없는 세계이며,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이 둘이 아닌 세계>입니다. '질량'(質量)과 '에너지'의 이원론(二元論)은 이미 폐기되었습니다. 즉 '질량'이 '에너지'로, 또는 '에너지'가 '질량'으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질량'이 그대로 '에너지'요, '에너지'가 그대로 '질량'인 겁니다.



양자이론의 체계가 완성됨에 따라서, 초기의 입자물리학자들이 물질의 '기본 입자'를 찾기 위해 기울였던 노력들이 얼마나 헛된 것이었던지 속속 드러납니다. ··· 곧 양자역학(量子力學)이란 관찰의 대상인 '과녁 입자'에, 관찰수단인 '탄환 입자'를 충돌시켰을 때, 그 충돌현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살펴보고 연구하는 학문입니다. 두꺼운 유리벽 뒤에서 '관찰대상'을 그저 가만히 지켜보는 게 아니고, '관찰대상'에 직접 '탄환 입자'를 충돌시키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미 여기에는 '객관적'이라는 용어는 끼여들 여지가 없지 않겠어요? 모름지기 과학의 권위를 지탱해 주는 기본요건은 그 언급되어진 바가 '객관적 관찰'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러나 '관찰행위' 자체에 의해서 이미 '관찰대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면, 그와 같은 '관찰행위'는 결코 객관적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마치 눈송이의 아름다운 결정을 촉감으로 확인하기 위해 손가락으로 그 눈송이를 만졌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러므로 '양자역학'은 기묘하게도 <더 이상 '객관적인 관찰'은 불가능하다>고 선언하는 데서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다루고 있는 '양자'가 딱히 무엇인가에 대해서 결정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즉 다시 말해서, '양자이론'이 무엇에 관해 연구하는 학문이건 간에, 그것은 차치하고, 어쨌거나 '양자이론'의 여러 법칙들은 고전물리학의 그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게 일상의 여러 경험들을 설명해 낼 수 있다는 겁니다. 즉 '기계론적 세계관'에 비해 '확률론적 세계관'이 훨씬 더 진실에 가깝다는 거죠.

요약컨대 그들은 '완벽한 이론', 즉 '절대진리'에 의해서 뒷받침되는 뉴턴식 세계관 대신, 그저 평상한 삶의 현장에서 순간순간 피부에 와 닿는 그대로의 산 체험 가운데서 '진리'를 발견하려 하는 겁니다. 만약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상사를 여의고 달리 '진리'를 찾는다면, 그것은 '기본적인 의미'에서조차도 '진리'가 아님이 분명하지 않겠어요? '진리의 세계'에는 결코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취하는 것과 같은, 그런 일은 없을 테니까요.

여러분! 이 점을 꼭 알아야 합니다. 실상 사람들의 입에 그렇게도 자주 오르내리는 그 '진리'라는 말은, 그 말에 따라붙는 그럴싸한 내용까지를 포함해서, 그 모두가 지난날 어딘가에서 읽었거나 들었거나 해서 머리 속에 기억되어진, 그래서 궁극적으로는 전혀 뿌리가 없는, 순전히 인간 두뇌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 속의 '진리'라는 말 대신 '불법'이라는 말을 고스란히 갖다 놓아도 결과는 마찬가집니다. 이 점이 바로 여타의 흔한 수행자들과 '일승의 보살'(一乘菩薩)이 유별나게도 다른 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여기 아인슈타인과 닐스 보어 사이에 벌어졌던 유명한 논쟁의 한 토막을 소개하기로 하죠. 아인슈타인이 시종 주장합니다.

『우리들의 '이론'(理論)은 '경험'을 표현하기엔 너무나 빈약해요.』

이에 대해 보어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응수합니다.

『아니, 아니에요. '경험'은 우리들의 '이론'에 비해서 너무나 풍요로운 거예요.』



동일한 상황을 앞에 하고, 이 두 사람이 보여준 관점 차이는 우리들에게 참 많은 것을 시사해 줍니다. 고전적인 세계관에 사로잡혀 있는 한 사람은, 스스로를 절대진리에 접근시키기 위한 노력의 과정에서, 불확실성의 현실 앞에 부단히 선택을 강요당하는 상황에 힘겨워하는 반면에, 다른 한 사람은 모든 거추장스러운 겉치레를 다 치워버리고, 다만 지금 현재에서 순간순간 용솟음치는 삶의 환희를 만끽하고 있는 듯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습니까? 이건 마치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학자(學者)의 길'을 가는 사람과, '새의 길'을 가는 사람과의 차이라고나 할까요? ··· 이 대목이 곧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 그 뛰어난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고전물리학'으로 분류되는 빌미가 됩니다. 요컨대 그 발상이 아무리 뛰어나고 정교하다 하더라도, 그것이 이른바 '합리적 사유'의 영역에서 말아내는 '지견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 결코 '진리'에 계합할 수는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결국 인간의 두뇌에 의해서 이해되어진 모든 것은 '유한한 것'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선현이 이르기를, 「결코 '이해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으며, 다만 '앎'을 허락할 뿐이다」라고 했던 겁니다.

결국 '양자역학'이 걸어온 길은 시종 '고전물리학'의 경직된 오류를 반증하는 과정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이것은 마치 구도자가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간파함으로써 모든 법의 허망(虛妄)을 깨닫고, '견도위'(見道位)에 드는 것과도 비견되는 과정입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요컨대, <통틀어 '현상법'을 회통(會通)하여 '진리'에 돌아가는 것>(會事歸理)이니, 그러므로 이르기를 「'현상법'이 이미 허망하여 그 모습이 다하지(盡) 않음이 없고, '진리'가 항상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므로, 따라서 모든 '업'(業)과 '과'(果)가 다 '공'(空)이다」라고 한 것이다.

'업'이 이미 '공'이므로 그 체성이 능히 '보'(報)를 부를 것이 없겠거늘, 하물며 어찌 「'인'(因) 중에 '과'(果)가 있다」고 하겠으며, 또한 이미 '보'가 공하므로 그 체성이 능히 '인'을 갚음(酬)이 없겠거늘, 하물며 어찌 「'과' 중에 '인'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양자역학이 태동하기 시작한 초기에는, 물질의 '기본입자'를 찾으려는 일련의 시도에서, ― 모든 새로운 시도가 다 그렇듯이 ― 전혀 예기치 않았던 숱한 시행착오를 겪게 됩니다. 사실은 이 같은 시행착오를 딛고 새로운 발견은 이루어지는 거지만, ··· 어쨌거나 이렇게 해서 '탄환 입자'가 '과녁 입자'에 충돌하면 두 입자는 모두 부서지고 맙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때, 그 자리에는 <새로운 입자들>, 즉 충돌하기 이전의 입자들과 똑 같거나, 아니면 비슷한 입자들이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그 비밀은 의외로 간단한 데 있었습니다. 즉 새로 생겨난 입자들은 '탄환 입자'의 운동 '에너지'와 '과녁 입자'의 '질량'으로부터 생성되었다는 겁니다. 즉 입자의 '질량'이 그대로 입자의 '운동 에너지'이며, 이 '질량'과 '에너지'는 상황에 따라서 순간순간 서로 그 모습을 엇바꾸면서 나타난다는 설명입니다. '탄환 입자'의 속도가 빠르면 빠를수록 충돌지점에서 '새 입자'를 생성할 수 있는 '운동 에너지'는 많아지는 거구요.

미시세계에서의 이 같은 현상은 거시세계인 현상계에선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양자이론은 '거시세계'나 '미시세계'를 통해서 그 모두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입니다. 그렇다면 '거시세계'에서도 '입자'의 충돌실험에서와 같은 반응이 일어나야 할 텐데, '현상계'에선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요?

이렇게 고전적인 이론체계와 양자이론의 새로운 견해가 서로 어긋나서 설명이 잘 안 될 때, 항용 입자물리학자들이 던지는 한 가지 물음이 있어요. 즉 「대체 '무엇'이 충돌하는가?」 하는 겁니다. ··· 이건 마치 선문(禪門)에서 "이 뭇꼬?"(是什 )하는 것과 흡사합니다. 「도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은 '경계'에 관한 상투적인 물질관을 타파하기 위한 경책성 물음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양자이론에선 이미 '양자'가 통념적인 '입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낸 지 오랩니다. 즉 '있음'인가 하면 '없음'이고, '없음'인가 하면 '있음'이고, 도무지 정한 '성품'도 정한 '모습'도 없는, 그런 존재가 바로 '양자'인 겁니다. 따라서 '양자'는 통상적인 의미의 '입자'가 아닌 거예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충돌한 걸까요?」 만약 '충돌한 것'이 없다면 '충돌'이 어떻게 이루어지며, 또 '충돌'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부서지는 일'은 또 어떻게 일어나겠어요? 궁리가 이에 이르면, 이 <'입자'의 상호반응>이란 과거의 '고전적 물질관'에서 본다면 <'반응'이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양자이론적 관점'에서 보면 <'반응의 주체'를 찾아볼 수 없는>, 실로 미묘한 현상으로 되지 않겠어요?

불가에서라면 <'연생은 무생'(緣生無生; 인연으로 나는 것은 나는 것이 아니다)이라, '작용의 주체'가 본래 있은 적이 없다>고, 자연스런 법문이 이어지겠지만, 저들은 아직 거기까지는 지견이 열리지 못한 겁니다. 성큼 들어서기만 하면 <본래 아무 일도 일어난 적이 없는, 바로 '그 자리'>임을 알 텐데 말입니다.

또 만약 '입자'의 '질량'과 '운동 에너지'가 '둘'이 아니어서, '탄환 입자'의 '운동 에너지'와 '과녁 입자'의 '질량'에서 '새로운 입자'가 생겨난 것이라면, 그건 다만 인연 따라서 겉모양이 달라진 것뿐이지, 거기에 「'새로운 입자'가 생겨났다」고는 말할 수 없지 않겠어요? 「이 '허공'과 저 '허공'이 부딪쳐서 새로운 허공이 생겼다」면 이건 우스개도 아니죠. 모름지기 '이것'과 '저것'이 둘이 아니라는 것은, 각기 '제 성품'이 없어서 본래 '하나의 허공성'일 뿐이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이 '입자의 충돌반응'에선 「과연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결국 '탄환 입자'와 그의 '운동 에너지' 및 '과녁 입자'와 그 '질량', 나아가서 '충돌'과 '파괴', 새로운 입자의 '생성' 등, 이 모든 현상들은 몽땅 '빈 이름'만 있을 뿐이요, 전혀 실다운 것이 아니었던 거예요. 한강 물은 늘 도도히 흐르지만 실은 한 방울도 흐른 적이 없는 겁니다. '앞의 물'과 '뒤의 물'이 다 같은 '하나의 물'일 뿐이므로, 흐르고 옮기는 듯이 보이는 겉모습은 전혀 빈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맨 처음에 던진 물음, 「대체 '무엇'이 충돌했는가」에 대한 답입니다.

그래도 아직 여러분은 <'현상계'에선 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걸까>하고 의증을 내겠어요? 고속으로 마주 달리던 두 대의 자동자가 정면충돌해서 박살나고, 많은 인명피해가 발생한 그 사고현장에는 ― 양자역학에서의 입자 충돌실험에서처럼 ― 왜 사고 이전과 같은 말짱한 '사람'들과 '자동차'가 나타나지 않느냐? 이거 아닙니까? ··· 그렇다면 여러분도 성큼 그 마음을 침착시켜서, 크게 한번 일갈(一喝)해 보세요. 「대체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하고 말입니다.



고사미(高沙彌)가 약산(藥山)에게 갔더니, 약산이 묻기를,···

『듣자 하니, 요즘 장안(長安)은 몹시 시끄럽다는데 그대도 아는가?』 하니, 고사미가 대답하기를,···
『저의 나라는 안연(晏然)합니다.』 했습니다. 이에 약산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
『그대는 경전을 보아서 얻었는가? 물어 배워서 얻었는가?』 하니, 고사미가 대답하기를,···
『경전을 보아서 얻은 것도 아니고, 물어 배워서 얻은 것도 아닙니다.』 했습니다. 이에 약산이 다시 묻기를, ···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경전을 보지도 않고 물어 배우지도 않았거늘, 어째서 얻지 못하는가?』 하니, 고사미가 대답하기를, ···
『그들이 얻지 못했다고 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그들이 스스로 알아차려서 수긍하려고 하지 않을 뿐입니다.』라고 했답니다.



이 말을 전해들은 투자청(投子靑)이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흥하고 망함이 마치 구름의 오고 감과 같나니
그는 국토가 없어서 티끌이 몽땅 끊겼도다.
수미산(須彌山) 정상의 뿌리 없는 풀이
봄바람이 불지 않았는데도 저절로 꽃이 피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