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연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2.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에서 
3. 항상 반쪽이면서 동시에 늘 꽉 차 있다
4.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5. 불이 섶을 태우는 게 아니고···
6. "이 뭇꼬?"···
7. 온갖 법은 스스로 성립되는 일이 없다
8.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였느니라
 
     
   

사람들이 보통 어떤 존재에 대해서 관심을 나타낼 때 공통적으로 제기하는 물음이 있습니다. 즉 「'이것'은 '무엇'으로 되어 있는가?」 하는 게 바로 그것입니다. 그런데 이 물음 속엔 사실 심상찮은 가정(假定)이 전제되어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어떤 면에선 우리들의 상식과는 상반되는 것처럼 보이는 '가정', 즉 <모든 존재는 다른 것과는 분명하게 구별되는, 그것만의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다>고 보는 게 일반적인 '상식'인데 비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모든 존재는 그 존재 자체와는 전혀 다른 '그 어떤 것'(窮極的 質料)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막연하면서도 강력한 가정이 늘 사람들의 의식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걸 알 수 있어요. 모든 존재의 '궁극적인 질료', ― 예나 이제나 이것을 '원소'(元素)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 궁극적인 구성 원소를 찾으려는 노력이 분자(分子), 원자(原子)를 거쳐 아원자(亞原子), 즉 '양자'(量子)에까지 이르렀다는 건 다 아는 일이고,···

아무튼 모든 '존재'는 다른 것들과는 확연하게 구별되는, 오직 그것만의 '고유의 특성'을 갖고 있는 <존재>인 동시에, 그것은 그 존재 자체와는 전혀 다른 '그 어떤 것', 즉 원소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라면, ― 그렇다면 과연 그 '존재'는 어떻게 정의해야 할까요?

대체로 이와 같은 생각은 사실 무척 막연한 건데도, 그 뿌리는 매우 깊거든요. 다시 말해서 현재 사람들이 구사하고 있는 모든 '이론'(理論)은 의식, 무의식간에 이 우주에는 맨 처음부터 '그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거의 원초적인 가정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어요. 그리고 이 미지의 '그 어떤 것'으로부터 이 우주의 온갖 존재는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것이 곧 '인과법'(因果法)의 원형이기도 하구요.···

이것을 불교식으로 표현하면, 「인연화합(因緣和合)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은 이루어졌다」는, 이른바 '연기설'(緣起說)에 해당하는 거지요. 적어도 이 차원에선 '연기설'도 세간의 '인과법'과 별반 다를 게 없어요.
즉 원인이 있어서 결과를 낳고, 그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어서 새로운 결과를 낳고, ― 아마도 이 사실에 대해서 의심을 품는 사람은 거의 없을 거예요. ― 이렇게 해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면서 끝없이 계속해도 해답이 없는, 마치 서로 마주 보게 세워 놓은 두 개의 거울을 들여다보듯이, 한 거울의 그림자 속에 그 거울을 비추고 있는 또 하나의 거울의 그림자가 들어 있고, 그 그림자 속에 또 그 거울의 그림자를 포함한 또 하나의 그림자가 비추고, ··· 이와 같이 끝도 한도 없이 계속되는 우스개 같은 퍼즐 놀이가 아직도 선잠 속의 꿈자리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어지럽게 하는 게 바로 범부들의 미(迷)한 마음입니다. 이와 같은 마음씨가 바로 사람들로 하여금 마치 우주의 미아처럼 늘 밖을 향해 기웃거리고 두리번거리게 만든 겁니다.

이것이 곧 '윤회(輪廻)의 고리'예요. 대개의 사람들은 이 '인과법'이 우리의 '마음'에 마치 수갑이나 족쇄와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세상사는 엄연히 '인과법'의 지배를 받고 있는 게 사실이니까요. 그러므로 별 생각 없이, 으레 그러려니 하고 살다 보니, 어느 사이엔가 그것에 익숙해져 버린 거예요. 그래서 무슨 문제가 생기기만 하면, 금방 대처방안을 모색하면서, 보다 나은 '결과'를 위해 허둥허둥 업(業)을 짓고, 과보(果報)를 기다리게 되는 겁니다. 지금의 이와 같은 언급 자체가 오히려 이상하게 들릴 정도로 이 '인과법'은 우리 범부들의 삶의 일부가 되어버렸어요. 때문에 지금의 이런 말도, 사실은 다만 '인과법'의 실상(實相)을 밝힘으로써, <끊임없이 '업'을 짓고는, 어쩔 수 없이 또 '보'를 받게 되는>, 이 윤회의 허구성을 밝히려고 한 것뿐인데, ― 그렇게 함으로써 <'인과법' 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는>(隨緣不變), 청정한 '본래 성품'(本性)을 회향(廻向; 돌이킴)하게 하려 한 것뿐인데, ― 사람들은 이런 말을 듣자마자 금방 <'인과'의 사슬에서 벗어나기 위한 유위(有爲)의 노력>을 시작하거든요. 이것이 바로 '인과법'이 우리에게 끼친 가장 대표적인 해독입니다.

사실 이 세상 대부분의 학인들이 행하고 있는 이른바 그 '수행'이라는 게 이 '인과법'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흔히 제법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하는 걸 종종 듣지요. 즉 「이치는 알겠는데 행(行)이 따르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세간에서도 흔히 「'아는 것'(解)과 '행동'(行)이 가지런하기가 쉽지 않다」고들 하지 않습니까? 제대로 눈밝은 선지식도 때때로 이런 방편으로 수행자의 나태함을 경책하기도 하지요.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풀섶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사람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풀섶에 드는 것일 뿐입니다. 선지식의 이런 깊은 뜻을 헤아리지 못하고, '방편으로 한 말씀'에만 매달리기 때문에, 「달은 보려고 하지 않고,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구나!」 하는 핀잔을 듣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참된 수행자라면 어찌 방편에 의지하면서 허망한 유위행(有爲行; 목표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위적으로 노력하는 행위)을 일삼겠습니까? 올바로 발심한 사람이라면 ― 지금에 '인행'(因行)을 닦아서 훗날 그에 상응하는 '과보'를 바라는 ― 그런 부질없는 짓은 하지 않는 겁니다.

'일승의 보살'(一乘菩薩)에게 있어서는 어디까지나 <해·행이 동시>(解行同時)입니다. 즉 '아는 것'이 그대로 '행'이고, '행'이 그대로 '아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즉 '심리현상'이나 '물리현상'이나 그 모두가 오직 '참된 하나'(眞一)에 의지하고 있어서, 해(解)와 행(行)은 다만 <같은 것의 다른 이름>일 뿐인 겁니다. <모름지기 '참된 법'은 결코 그 자신을 다른 것으로 바꾸는 일은 없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만약 '이것'을 버리고, '저것'을 추구한다면 그것이 바로 '유위행'(有爲行)이요, '무상법'(無常法)이요, '생사법'(生死法)인 겁니다.

그러기에 선현들은 이르기를, 「'조작(造作)의 무리'들은 제도하지 못한다」고 극언하기에 이른 겁니다. 요컨대 만약 '인과법'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파괴'나 '도피'를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인과법'의 반복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당연히 이 '인과법'까지를 포함한, '진리의 세계'에는 결코 '대립'이나 '투쟁'이나 '도피' 같은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 인과법의 굴레에서 벗어나야 하는 건 필연인데 ― 그런데 동시에 그 어떤 문제도 '진리'를 떠나선 존재할 수 없다는 것도 또한 엄연한 진실 아닙니까? 그렇다면 어디가 잘못된 걸까요? 어디서 길을 잃은 걸까요? 바로 이것을 알아내자는 겁니다. 그렇게 해서 <온갖 차별법이 그 '고유의 특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진리' 본연의 '보편성'과도 어긋나지 않는, 그런 경지를 열자는 겁니다>. 이것은 진정 우리 인간들의 이른바 '합리적 사유의 영역'에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차별되면서도 다르지 않는 경지>란 정녕 범정(凡情)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다만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 '진리의 세계'에서는 '역·순'(逆順)이 서로 어긋나지 않는다 ― 는 이 한 마디 말에 기대보는 거죠. 사실은 이것이 열쇠입니다. 만약 이렇게만 된다면 우리들은 나날이 '인과법'을 굴리고 살면서도 조금도 핍박받는 일이 없을 테니 말입니다.



이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우리들이 어떻게 하다가 '진리의 세계'를 등지게 됐는지, 그 까닭을 차근차근히 함께 알아보도록 합시다.

「과연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이 물음은 인류의 역사와 기원을 같이 할 만큼 뿌리깊은 것이면서도, 우리들의 이른바 '합리적인 사유'의 추리 추론으로는 도저히 그 해답을 이끌어낼 수 없는 난제입니다. 마치 두 개의 거울을 서로 마주 보게 놓았을 때처럼, 끝도 한도 없이 이어지는 그 그림자 속에 무슨 해답이 있을 수 있겠어요? ― 양자이론(量子理論)은 통쾌하게도 순전히 과학적인 수단으로 이 원시적 난제에 대해 「우주의 궁극적인 질료(質料)는 찾을 수 없다」고 선언하기에 이르지만 ― 이와 같은 위대한 과학적 업적도 그 오랜 미망(迷妄)을 깨우치기엔 무력하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일부 종교인들은 이 시작도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인과법'의 고리를 단절하기 위한 손쉬운 해결책(?)으로, 그 아득한 미지의 장막 저 너머에 '신'(神)이라는 이름의 도그마를 설정함으로써 더 이상의 '이성적인 천착'(理性的 穿鑿)을 차단하고, 그로부터 이른바 '신'에 의한 '창세론'이 제창되기에 이르렀구요. 또 다른 한편에서는 천체 물리학자들이 이른바 빅 뱅(Big Bang), 즉 대폭발에 의한 '우주 개벽론'을 내놓는가 하면, 또한 다윈(Charles Darwin)은 이 '인과법'의 현장을 구석구석 뒤진 끝에 이른바 '진화론'이라는 걸 내놓기에 이르죠. 사실 이건 가장 대표적인 인과법의 추상화(抽象畵)입니다. 이렇게 해서 시종 생주이멸(生住異滅; 나고 머물고 변하고 사라짐)하는 그 허망한 그림자를 좇으면서, 내내 불생불멸(不生不滅; 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하고, 불래불거(不來不去; 오지도 않고 가지도 않는)하는 그 순일(純一)한 화폭 위에 망령된 허공꽃(虛空華)을 그려대기에 정신이 팔려서 혼미를 거듭하던 끝에, 그 몽롱한 정신으로 급기야는 '우주 종말론'이니, '휴거'(携擧)니 하는 황당하기 그지없는 요설(妖說)까지 퍼뜨리면서 온통 세상을 시끄럽게 하기에 이른 거지요.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세간법의 '이루어지는 모습'(成相)을 살펴보건대, ― 이 세계가 '처음 이루어짐'(初成)과 춘하추동 사계절의 변천하는 모습과, 또한 '인간 세계'(人)와 '하늘 세계'(天)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등 모든 법의 '이루어지는 모습'(成相)과 '허물어지는 모습'(壞相)은 이것들이 모두 다만 '업'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지고, '업'으로 말미암아 허물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이것들이 모두 한결같이 상응(相應)하는 것이 일정하지 않으며, <통틀어 옮기는 일도 없고, 변화하는 일도 없어서, 시간의 흐름이 없는 가운데 망령되이 길고 짧은 수명을 보고, 빠르고 더딤의 차별을 내나니>, <온갖 모든 것이 움직임이 없는>(萬類不動) 가운데, '스스로 이루어짐'(自成)과 '타에 의한 허물어짐'(他壞)과 '동시'(同時; 이루어짐과 허물어짐이 동시라는 견해) 등이 모두 '업'을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이며, 이것들이 다 '참된 존재'가 아닌 까닭이다.』라고 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