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연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2.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에서 
3. 항상 반쪽이면서 동시에 늘 꽉 차 있다
4.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5. 불이 섶을 태우는 게 아니고···
6. "이 뭇꼬?"···
7. 온갖 법은 스스로 성립되는 일이 없다
8.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였느니라
 
     
   

지금 여기서 이렇게 말하고 있는 자도 없고, 이 앞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 여러분도 다 없고, 물론 설해진 법문도 없고, 이 모두가 다만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에서 인연 따라 일고 지는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이 분명히 밝혀지면, 이것이 바로 '무공용지'(無功用智)가 드러나는 순간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모든 일은 누군가 '작용하는 이'가 있어서 공력(功力)을 들여서 '말을 하고', '알아듣고' 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저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 중생의 '근기와 인연'(機緣)에 감응해서 지음 없이 나투는 <여래의 미묘한 작용>(如來妙用)인 겁니다. '짓는 자'가 없는데도, 아니, 오히려 '짓는 자'가 없기 때문에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 다함이 없으니, 이보다 더 미묘하고 신령스런 일이 또 어디 있겠습니까?



이것은 범부의 지견으로는 참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명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범부에게 있어선 이 '나'가 어디까지나 '삶의 주체'요, 그 밖에 다른 경우를 일찍이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데, 그런데 이렇게 난감해 하는 '자기 자신'을 그저 무심히 지켜보면서 아무 대응도 하지 않을 수 있겠어요? 또한 설사 대응을 하건, 전혀 대응을 하지 않건 간에, ― 그것은 마치 헝클어진 '거북 털'(龜毛)을 가지런히 빗어줘야 하는가, 아니면 그냥 내버려둬야 하는가? ― 하는 문제와 전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범부의 지견으로는 도저히 소화해 낼 수가 없는 거지요.

그러니 이 일이 완전히 소화될 때까지 참구(參究)에 참구를 거듭해야 하는 게 바로 '공부'의 전부예요. 즉 끝내는 '소화할 자'도 없고, '소화할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 마침으로써 깨끗이 다해 마치는 것이 바로 '참구'의 끝간 자리입니다. 이 점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끊임없이 어떤 '결론'을 도출하고, '지견'을 말아내서는 다시 집착을 일으키는 허망한 짓거리를 쉬지 못할 겁니다.

여기서 '참구'라는 말을 쓰는 것은, 이 '참'(參)은 <만법의 차별 현상>을 나타내고, '구'(究)는 <끝까지 구명(究明)해 마친다>는 뜻이므로, 이 세상의 온갖 차별법의 실상(實相)을 철저히 구명한다는 뜻으로 알면 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가장 중요한 대목은 ― 보통 연구는 '관찰자'와 '관찰대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탐구행위인데 반해서 ― 이 '참구'는 '관찰의 현장'에서 결코 '자기 자신'을 제외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 무슨 말이냐 하면 '관찰자'와 '관찰의 대상'이 본래 '한 바탕'이어서, 이 둘이 상대적인 자리에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이른바 '인식작용'이 더는 행해지지 않는다는 걸 의미합니다. 이 말을 듣고 나면, 당장에 '인식작용'을 그치려고 하겠지요? 아니에요. 지금처럼 이렇게 활발하게 '움직이는 마음'이 곧 그대로 움직임이 없는, '고요한 마음'이라는 사실을 간파함으로써, 더는 '산란한 마음'을 다스려서 '고요한 마음'으로 바꾸려는 허망한 조작을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전적으로 인식작용에만 의존하면서 조작과 대처에만 익숙한 범부의 분상(分上)에서는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손을 써 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래서 선현들은 탄식하면서 말하기를, 「온갖 법에 대해 '아는 사람'은 많은데, '회심(廻心)한 사람'을 만나기는 참으로 어렵다」고 했던 겁니다.



여기서 앞서 말한 「현량(現量)을 깨달으라」고 한 말과 견주어서, 찬찬히 다시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우리는 이미 '연기설'을 통해서 이 세상의 일체만유(一切萬有)는 자체의 성품이 없다는 것을, 즉 꿈 같고 허깨비 같은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내지 않았습니까? 결코 그에 예외가 있을 수 없지요. 그런데 우리가 평소에 열심히 공(功)을 들여서 무슨 일을 할 때, 무엇으로 공을 들입니까? '몸'과 '입'과 '뜻'으로 그렇게 하는 게 아닙니까? '불가'에선 이것을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세 가지 업>(身口意 三業)이라고 하죠. 그런데 이 '업'이라는 말이 좀 수상쩍지 않아요? 우리들은 그저 심상하게 몸과 입과 뜻을 굴리면서 일상을 살아갈 뿐인데 어째서 그것을 가리켜 '업을 짓는다'고 말하는 걸까요?

'업'이란, <'의지'의 힘으로 '생각'을 일으키거나, 또는 그렇게 하게 하는 '세력'>을 말하는 건데, 그러면 「이 '몸'과 '입'과 '뜻'으로 짓는 모든 행위는 다 '업'을 짓는 것이라」고 한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일상의 '삶', 즉 이 '몸'과 '입'과 '뜻'을 굴려가면서 살아가는 이 '삶' 자체가 이미 잘못 설정된 바탕 위에서 굴려지고 있다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뿐만 아니라 지금도 계속해서 '업'을 지어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구요. 그런데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업'이라는 말을 들으면, 바로 '업장'(業障; 업으로 말미암아 겪게 되는 장애)이라는 말을 떠올리면서 「어떻게 하면 '업장'을 소멸할 수 있을까?」하고 심각한 표정을 짓습니다. 바로 이렇게 뜻을 짓고 마음을 일으켜서, <업장을 소멸해야 하겠다>고 나서는, 이런 행위 자체가 벌써 새로이 업을 짓는 것임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하는 겁니다. 왜냐하면 실상(實相)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가운데서, 망령되게 온갖 일들이 실제로 일어난다고 보아서, 끊임없이 조작하고 대처하는 게 바로 무명중생의 일상인 겁니다. 결국 미혹한 중생에게 있어서는 이 '몸'과 '입'과 '뜻'을 굴리면서 살아간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업'을 짓는 행위이며, 이런 '미혹한 삶'이 바로 '참 성품'을 드러내는 데 장애를 이루기 때문에 이것을 업장이라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저 기껏해야 '좋은 업'과 '나쁜 업'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선업(善業)을 지어서 복을 받고, 악업(惡業)을 폐해서 죄를 면할까 하고 생각하는 게 고작이지 않습니까? 그렇지만 여러분, 만법이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그 모두가 '한 성품'(一性)으로 돌아갔을 때엔 어떻게 될까요? 즉 '법의 평등'을 얻은 사람도 분별을 일으키면서 취하고 버리는 일을 계속하겠어요? 그러므로 초발심(初發心)에 이미 불과(佛果)를 얻은 '일승의 보살'(一乘菩薩)은 결코 '번뇌'를 버리고 '보리'를 얻기 위해 공력을 기울여 가면서 애쓰는 일은 없습니다. '성품'을 밝히고 보면, 모든 것은 <지금 있는 이대로> 어느 것 하나도 '불사'(佛事) 아닌 게 없는 거예요. 처음으로 마음을 낸 사람도 제대로 발심만 하면 바로 그 첫머리에 '불과'를 얻습니다. 아니, 이 '불과'는 오랜 고행 끝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이미 모든 사람에게 구족하게 갖추어져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합니다. 따라서 결코 스스로를 폄하해서 물러서선 안 됩니다.

이 경지에 이르면 '도'(道)를 닦는다거나 '해탈', '열반'을 얻기 위해 '수행'을 한다거나 하는 일들이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되고 마는 겁니다. '무생법인' 즉 <남(生)이 없는 도리>를 알아낸 '본분의 수행자'와 그렇지 못하고 아직 '세간의 지혜'(世間智)에 의지하면서 '인과법'에 갇혀 있는 사람과는 여기서 천양지간으로 차이가 납니다. 즉 '일승 보살'은 애쓰지 않아도 이미 자기의 지혜가 저절로 '진리'에 계합(契合)하기 때문에 이 '부동지'(不動地)를 '무공용지'(無功用地)라 하고, 이 지혜를 '무공용지'(無功用智)라 하는 겁니다. 이 부분에서 갈피를 잃지 않아야 합니다.



가섭(迦葉)이 어느 날 문수(文殊)의 설법을 듣고는 그 위대한 공덕을 찬탄하여 마지않자, 문수가 가섭에게 물었어요.

『가섭이여, 어찌 생각합니까? 이 산하대지는 누가 만들었으며, 이 세계 또한 어디서 나왔습니까?』 하니, 가섭이 대답하기를,···

『문수사리(文殊師利)여, 일체 세계는 마치 물거품처럼 이루어졌으며, 중생의 <부사의한 '업'의 인연>(不思議業緣)으로부터 나왔습니다.』 하니, 문수사리가 이 말을 받아 부연하여 설명하기를,···

『그렇습니다. 모든 '법'도 역시 <부사의한 '업'의 인연>으로 말미암아 있습니다. 따라서 '나'는 이 일에 전혀 공력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온갖 '법'은 모두가 '인연'에 속할 뿐이요, '짓는 이'(作者)가 없으며, 다만 '뜻'을 따라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이치를 알 수 있으면 모든 하는 일이 어렵지 않으리이다.』라고 했어요.



온갖 법이 다 '인연'에 속할 뿐, '자체의 성품'이 없고, 바로 '한 생각'으로 날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안다면 온갖 하는 일에 무슨 공력을 빌리겠습니까? 그러니 제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뽐낼 건 뭐고, 자기 업적을 자랑할 건 뭐며, 또한 자신이 아무런 힘도 지혜도 없는 무지렁이라고 기죽을 건 또 뭐겠습니까?



우리는 이미 '무생법인'을 깨친 터라, 이 '세상'도 '중생'도 다 그 '성품'이 빈 것이어서 마치 꿈이나 허깨비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삶'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들이 그 속에서 삶을 영위하고 있는 이 '세계'는 과연 어떻게 있게 된 걸까요?···

여러분, 이 '세계'도 '중생'도 이것이 몽땅 우리들의 '업'의 소산인 거예요. 그러니 이 몸과 입과 뜻으로 공을 들여가면서 무엇인가를 도모하고, 뜻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 애쓰는 일들이 어찌 '업'을 짓는 것이 아니겠어요? 비록 추구하는 바가 아무리 훌륭한 일이라 하더라도, 또 나아가서는 중생을 제도하고, '해탈'을 이루고, '열반'을 얻고, '성불'하는 일까지라도 결코 예외가 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여기에서 문득 나름대로 알아차린 바가 있어서, 「그래! 결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서 훌륭한 공덕을 구해 밖으로 내달아선 될 일이 아니다. 나는 이제 결코 <움직임 없는 '본래의 마음 자리'>를 등지지 않으리라」 하고는 결가부좌(結跏趺坐)하고 움직이지 않는다면, 이 사람은 가엽게도 저 고인 물처럼 곧 썩고 말 테니, 이런 걸 가리켜 치선(癡禪)이라 하던가요?

저 동해의 임해암자(臨海庵子)인 홍련암(紅蓮庵)의 앞 '바다'는 매일같이 독경소리, 염불소리, 설법소리를 통해서 '공한 도리'(空道理)를 들었으면서도, 오늘도 인연 따라 종일토록 물결치는 일을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은쟁반 위에 옥구슬 구르듯 한다>는 말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까 인연이 있으면 업도 짓고, 보도 받으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어야 비로소 좋은 솜씨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연을 따르되 변함이 없는'(隨緣不變), 이 '정혜쌍행'(定慧雙行)의 길이야말로 참된 '본분납자'(本分衲子; 성품을 밝히는 일승법의 수행자)의 행리(行履; 행실)인 겁니다. 그러기에 옛 어른이 이르기를, 「까딱 한 생각 일으키기만 해도 큰 죄업을 짓는 것이니라」고 했던 거예요.



어느 날 운문 대사(雲門大師)가 대중에게 말하기를,···

평지(淨土) 위에서 죽은 사람이 무수하니, 가시밭을 통과해야 좋은 솜씨니라.』 하니, 어떤 중이 말하기를,···

『그렇다면 방안의 제일좌(第一座)에게 장점이 있겠습니다.』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소로소로'(眞言)니라.』 했습니다.



죽암규(竹庵珪)가 소참(小參) 때,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대중들아, 이것은 운문 대사의 말씀이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어찌하여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이라 하며, 어찌하여 가시밭을 벗어나야 능숙한 솜씨라 하는가? 만약 그대들이 이 두 구절의 말을 벗어나면 평생의 참학(參學)한 안목을 저버리지 않게 되리라.

산승이 오늘 자세히 설명해 주리라. ― 지금의 선객들이 '본분의 총림'(本分叢林)에 의지하여 '본분의 선지식'(本分 善知識)을 친견(親見)하니, 참으로 십이분 마음을 써서 반조(返照) 참학한다 하리니, ― 홀연 어느 날 경계와 인연을 만나 분연히 나아가 깨달은 바가 있으면 '자기'를 보게 되고, 한 생각에 식심(識心; 분별하는 마음)이 깨어져서 전후제(前後際; 먼저와 나중)가 끊어지고, 한 물건도 있음을 보지 않아서, '몸'과 '마음'의 모습을 볼 수 없으며, 마음이 담연(湛然; 고요히 맑음)하여서 실오라기 하나도 세우지 않게 되리라. 안에 이미 한 법도 없고, 밖으로 산하대지 삼라만상도 볼 수 없으며, 나아가 시방세계(十方世界)가 모두 공하여 전혀 '하나의 참된 경계'(一眞境界)뿐이다.

범성(凡聖)이 없고, 중생과 부처도 없으며, 생사(生死)를 벗어날 것도 없고, 기뻐할 '보리'(菩提)도 없어서, 위로는 우러를 게 없고, 아래로는 '자기 몸'도 없으리니, ···이런 선객들은 당장에 기뻐서 십이시(十二時; 하루종일) 가운데 영원히 이 속에 있으리라. 빛깔을 보고 소리를 들으매, 실낱만한 인연도 장애도 없어서, 한결같이 맑디맑은 공(毬子)과도 같으리니, 문득 이 속에 뿌리를 내리고는 살 계교(計巧)를 일으킨다. 한 번 이와 같은 견해를 내기만 하면 당장 <'해탈무위'(解脫無爲)의 깊은 구덩이>에 빠져 버리리라.
움직일 수도 없고, 꼼짝할 수도 없으며, 분명히 알고 있으나 입을 열지 못하고, 의심의 뿌리가 끊이지 않아서 마음이 편치 못하리라. 이런 무리들을 가리켜서 교문(敎門)에서는 말하기를, 「이승(二乘)들이 아(我)와 법(法)의 '이공관'(二空觀)을 닦아서 인무아(人無我), 법무아(法無我)의 이치를 증득하고, 대승(大乘)을 희망하여 그 속에 머물러 있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운문(雲門)이 말하기를, 「평지 위에서 죽은 사람이 무수하다」고 했으니, 바로 이 병통을 말한 것이다. 이런 상좌들은 또 전공(前功)을 버리지 못하고 애써 자기 공부만 쌓으면서, 날이 가고 달이 가서 다시 소견이 생기면 말하기를, 「나는 움직일 수 있다」 하기도 하고, 「나는 몸을 돌릴 수 있다」 하기도 하며, 또는 말하기를, 「나는 입을 열 수 있나니, 원래 옛 사람이 말하기를, "백 척 장대 끝에 앉은 사람은 비록 깨달아 들긴 했으나 참이 아니다. 백 척 장대 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시방 세계'(十方世界)에서 전신(全身)을 나툰다"고 했는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장대마저 여의었다」 하기도 하며, 또 나아가서는, 「삼계(三界)가 곧 유심(唯心)이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다. '하나'가 곧 '일체'요, '일체'가 곧 '하나'다. 일곱 번을 세로로 서고, 여덟 번을 가로로 누우며, 걸림도 없고 장애도 없으며, 가로로는 큰 바다를 삼키고, 거꾸로는 수미산(須彌山)을 세운다」 하느니라.

대중이여, 이런 상좌들을 눈밝은 사람이 아니면 어떻게 알아낼 수 있겠는가? 그들이 바로 가시밭 속에 앉은 것이니라. 설사 만호선(萬戶禪)이라고 하더라도 역시 만 가지의 병이 든 생원이라 하리니, 오직 총림(叢林)에서 본분(本分)에 의하여 착실히 공부하다가 도리를 안 사람은 곧 그런 줄을 알리라.』라고 했습니다.



이 대목은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말이 길어지는 것을 무릅썼습니다. 만약 참된 수행자라면 결코 말이 길다고 여기지도 않겠지만, 만약 지루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참고 다시 한번 더 되새겨 보도록 하세요.

여러분! 끝내 '마음뿐'(唯心)입니다. '마음' 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어요. 봐야 할 만한 것도, 알아야 할 만한 것도 도무지 없는 거예요. 오직 순일(純一)한 허공성(虛空性)뿐입니다. 저 바깥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은 모두가 '마음'이 변해서 나타난 '허공꽃'입니다. 이것들에 속아서 그 마음이 밖으로 내달으면 속절없는 '범부'요, 속지 않고, 바깥 경계에 마음을 뺏기지 않으면 곧 '성인'이에요. 여러분은 '성인'의 경지를 바라는 거 아니에요? 그렇거든 더는 속지 마세요.

성큼 '마음'의 빛을 돌려서 <지금 그렇게 성인의 경지를 추구하여 마지않는 그 '마음'의 흐름>을 스스로 '자각'하도록 하세요. 이것은 결코 분석적인 인식작용이 아닙니다. 다만 그 의식이 <업에 따라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것으로 족합니다. 이것을 '불가'에서는 회광반조(廻光返照)라고 하죠. 그러나 여기서 「어떻게 하면 회심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이 사람은 끝내 '회심'의 뜻을 알지 못하고 말겠지요. <만법은 오직 '마음'뿐입니다>(萬法唯識). '마음' 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누구'에게 묻고 있는 걸까요? 또한 그 물음에 대해서 대답해 주는 것은 '누구'일까요? 오직 밖을 향해 내닫기만 하는 우리의 업이 이렇게 뿌리깊은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때에도 다만 그렇게 묻고 있는 그 마음을 깊이 돌아봐서, 이 '한 생각'이 일어나는 당처(當處)를 깨쳐야 합니다. 이것이 다예요. 다시는 아무 짓도 할 것이 없습니다. 이것을 거듭 명심하세요. 행여라도 본래 스스로 청정한 '제 마음'을 등지고 밖을 향해 내달으면서, 옛날 버릇대로 "나는 깨달아야 한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알았다"고 하면서, 그 허망한 식심(識心)에 나부껴서 아만을 부리면서 자신의 천진하고 신령스런 '본래 성품'(本性)을 등지는 일이 있어선 안 되겠습니다. 진정 '하는 이'도 없고, '하는 일'도 없어요. 오직 '신령한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이 인연에 감응해서 그림자처럼 그렇게 온갖 것을 나투는 겁니다. 온갖 것을 나투되, 실로 티끌 하나 실제로 나툰 건 없습니다.



서산(西山)의 양좌주(亮座主)라는 이는 스물네 가지의 경론(經論)을 강설하는 것으로 당대에 이름을 날리고 있었는데, 어느 날 마조 대사(馬祖大師)를 뵈었더니, 마조가 그에게 물었어요.···

『듣건대, 대덕(大德)은 많은 경론을 강의한다는데 사실인가?』

『변변치 못합니다.』

『'무엇'을 가지고 강의를 하는가?』 하고 물으니, 좌주는 좀 뜻밖이라는 표정으로 대답하기를,···

『'마음'으로 강론하지요.』 했어요. 그랬더니 마조가 말하기를,···

『그 '마음'이라는 게 마치 재주 좋은 광대와도 같고, '뜻'이라는 건 춤 장단이나 맞추는 놈과 같은데, 그런 것들이 어찌 경론을 강의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었어요.

이에 좌주는 매우 못마땅하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하기를,···

『'마음'이 강의를 하지 못한다면, 그렇다면 '허공'이 강의를 한다는 말입니까?』 하고 들이댔는데, 그랬더니 뜻밖에도 마조가 말하기를,···

『그렇니라. '허공'이 능히 강의하느니라.』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자 좌주는 망령 난 늙은이의 말을 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자리를 박차고 나가는데, 이때 마조가 나가는 좌주를 향해서,···

『좌주여!』 하고 부르니, 좌주가 고개를 돌리면서,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러시오?" 하는 듯, 마조를 똑바로 바라봤어요. ― 아마 그랬을 거예요 ― 바로 그 코끝에 대고 마조가 문득 소리 지르기를,···

『이것은 무엇인고?』 하자, 순간 멈칫하던 좌주는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절을 하면서 감사를 드리는데, 마조는 그 등에다 대고 마치 내뱉기라도 하듯이 말하기를,···

『이 둔한 중아! 절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좌주는 온 몸에 흠뻑 땀을 흘리면서 어찌 할 바를 몰라 했으며, 그 길로 절에 돌아와서는 대중에게 말하기를,···

『나의 평생 공부가 아무도 따를 자가 없으리라 여겼더니, 오늘 마조의 한 물음을 받고는, 평생 공부가 날기와 부서지듯 하였도다.』 하고는, 이어 강(講)을 그만두고 곧장 서산(西山)으로 들어가서는 영원히 소식이 끊겼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