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연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2.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에서 
3. 항상 반쪽이면서 동시에 늘 꽉 차 있다
4.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5. 불이 섶을 태우는 게 아니고···
6. "이 뭇꼬?"···
7. 온갖 법은 스스로 성립되는 일이 없다
8.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였느니라
 
     
   

그러나 그런 혼미의 와중에서도 일단의 진정한 과학자들은 나름대로의 과학적 방식으로 「일체 존재의 궁극적 질료(質料)는 과연 무엇일까?」 하고 끈질긴 탐구를 계속한 끝에, 덤으로 큰 수확 하나를 얻었어요. 즉 한동안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그것'에 의지하고 있을 것으로 여겨졌던, 이른바 <에테르(Ether)는 실재(實在)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이릅니다. 그때까지는 이 망망한 우주 공간에 떠 있는 일체만유는 에테르의 바다에 떠다니는 부유물이라고 여겨졌던 때가 있었어요. 그러나 그게 순전히 자연현상을 그럴싸하게 설명하기 위해 인간들이 멋대로 꾸며낸 가상의 존재였다는 사실을, 매우 정교하고도 신중한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밝혀내기에 이르지요.

그런데도 명색이 불자(佛子)라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아직 저 '진여본체'(眞如本體)를 오인해서, ― 결코 정식(情識)으로 헤아리고 짐작하고 할 수 있는 게 아닌 이 '진여'에 대해서, ― 망령되게 에테르와 비슷한 개념으로 '의식의 영역'에 끌어내려서는, '본체'(本體)에 대한 집착을 일으킴으로써 성교(聖敎)의 참된 뜻을 흐리고 있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니, 참으로 경책할 일입니다. 여러분 중에도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는 사람은 없는지, 이 기회에 철저히 돌이켜볼 일입니다. 즉 ― 영원불멸한 '진여법성'(眞如法性)이 '엉긴 듯'(凝然) 존재하고, 이 무상한 현상계가 그것에 의지해 있다 ― 고 생각하는 건 아닌지요? 이것이 바로 고전적인 물질관의 잔재예요. 이건 참으로 떨쳐버리기 어려운 업식(業識)입니다. 이 때문에 많은 수행자들이 회심하지 못하고, 여전히 지금도 길거리를 헤매는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결'이 그대로 '물'인 거예요. 사람들이 미혹해서 <본래 '하나'인 물>을 가지고 억지로 '물결'이니, '물'이니 하며 갈라놓고는, 다시 그것을 「'물결'이 그대로 '물'이라」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체(體)와 용(用)이 둘이 아니라」고 하는 말도 역시 중생의 무명을 다스리기 위해서 세간법에 맞추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말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뜻을 철저히 사무쳐야 비로소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고>(性相常住), <본체와 작용이 걸림이 없는 도리>(體用無碍)를 명료하게 알아서, 지금 목전에서 순간순간 생주이멸(生住異滅)하는 이 세간의 모습이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생멸도 없고 가고 옴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삼평 의충(三平義忠) 선사의 게송 한 수를 소개하죠.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빛'과 '소리'를 드러내 보일 길이 없도다.
여기서 전혀 '아무 일 없음'을 깨달으면
체(體)와 용(用)을 나누건 나누지 않건 무슨 상관이 있으랴.



이 문제에 대해선 나중에 따로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고, ··· 아무튼 이와 같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마침내는 양자이론의 패러독스가 기존의 모든 이론체계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사태가 이어지더니, 급기야는 「일체 존재의 궁극적 질료는 찾을 수 없다」는, 실로 놀라운 결론을 내놓기에 이릅니다. 그것도 순수히 과학적 수단으로 이 사실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 겁니다. 즉 아직은 기술 수준이 그에 미치지 못했기 때문에 <찾을 수 없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의 본질' 자체가 더 이상 '인간의 천착'을 받아들이지 않게끔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는 거죠. 이것은 마치 불가사의한 '우주의 신성(神性)'이 더 이상의 인간의 접근을 완강히 거부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지 않습니까?

그러나 저 일단의 진정한 과학자들처럼, '참된 수행자의 길'을 가는 이라면 그와 같은 신비주의적 색채를 철저히 배제해야 합니다. 그건 <신비로운 장막 저 너머의 비밀>이 아니라, 바로 단순한 일상사 가운데 늘 환히 드러나 있었던 겁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일체 존재의 궁극적 질료를 찾기 위한 노력의 끝간 자리에서, 그 오랜 노력의 결실이 막 손에 잡힐 듯했던 그 순간, 과학자들이 맞닥뜨린 것은 놀랍게도 '자기 자신'이었던 겁니다.

즉 '관찰자'가 바로 '관찰 대상'과 둘이 아니었다는 사실이 실증적으로 드러난 거죠. 「어리석은 중생들이 '제 마음'을 '물건'이라고 하네」라고 꾸짖었던 고인(古人)의 말이 현실로 드러난 겁니다. 그렇다면 어째서 사람들은 그와 같은 엄연한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걸까요? ― 본래 하나인 '참 성품' 가운데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이라는 가상의 존재를 허망하게 세워 놓고는 이것을 실유(實有)로 오인하고 집착하면서 줄곧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결국 '보는 자'가 곧 '보이는 것'이었던 거지요. 그래서 항상 코를 맞대고 있으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그러고 보니 과학자들로 하여금 '궁극의 질료'를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것도 바로 「'제'가 '저'를 알아볼 수 없다」는, 이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그 원인이었던 셈입니다. 그게 전부예요. 마치 이 '눈'으로 다른 건 다 볼 수 있어도 '눈 자체'는 볼 수 없듯이, 또 이 손가락으로 다른 건 다 만질 수 있어도 손가락 자체는 만질 수 없듯이, ― 이것이 그 이유의 전부였던 겁니다.



석공 혜장(石鞏慧藏) 선사가 출가하기 전 사냥꾼으로 있을 때, 어느 날 사슴을 좇다가 마조(馬祖)의 암자 앞에까지 이르게 됐어요. 때마침 툇마루에 앉아 있던 마조를 보고 석공이 물었어요.···



『저의 사슴이 지나가는 것을 못 보셨습니까?』 하니, 마조가 묻기를,
『그대는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
『저는 사냥꾼이올시다.』
『그대는 활을 쏠 줄 아는가?』
『예, 압니다.』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는가?』
『화살 하나로 한 마리씩 잡습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활을 쏠 줄 모르는구나.』
『화상께서는 화살 하나로 몇 마리나 잡습니까?』
『나는 한 화살로 한 무리를 쏠 수 있다.』
『피차 생명을 가졌거늘, 어찌 잔인하게도 한 무리씩이나 잡습니까?』
『그대가 이미 그렇다면 어찌하여 '자기 자신'을 쏘지 않는가?』
『저에게 스스로 '자기 자신'을 쏘라고 하시지만, 저는 도무지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했어요. 이에 마조가 말하기를, ···
『이 사람의 여러 겁(劫)의 무명번뇌(無明煩惱)가 오늘에야 비로소 몰록 쉬는구나.』 하니, 선사가 이 한 마디에 크게 깨닫고는, 당장에 칼로 단발(斷髮)을 하고, 암자에 머물면서 평생을 시봉(侍奉)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여러분도 지금 당장에 문득 쉬세요. '마음' 밖에는 추구해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음'이 그대로 '법'이고, '마음'이 그대로 '부처'이기 때문입니다. 일이 여기에 이르렀는데도 계속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구하려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그러니 「'성품'을 보아야 '성불'할 수 있다」는, 이 말 한 마디에 속아서, '성품'을 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까닭 없이 '마음'을 들볶으면서 애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성품'은 공력(功力)을 들여서 찾는 게 아니고, 바로 '성품'을 찾으려고 하는 그것이 곧 '성품'의 응현(應現)인 겁니다. 여러분, 이 세상의 현행하는 일체의 '이름'들, '마음'이니 '성품'이니 '부처'니 하는 따위의 그 많은 말들은, 세간과 출세간을 막론하고, 그 모두가 <본래 정한 '성품'도 '모습'도 '이름'도 없는, 그러면서도 늘 인연에 감응해서 능히 만법을 나투는>, 저 '참된 하나'(眞一)의 다른 이름들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우주의 궁극적인 구성요소를 찾아내는 일이 곧 자신들의 유일한 존재 이유였던 과학자들이 <'그것'을 찾아내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건 무얼 의미합니까? 저 석공 선사의 경우처럼 결국 <할 일 없는 사람>(無事人)이 된 게 아닐까요? 여러분, 뭔가 마음에 와 닿는 게 없어요?

어디 그뿐입니까? 그들이 오랜 각고 끝에, 우주의 비밀을 풀 수 있는 '열쇠'를 막 손에 넣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들이 거기서 맞닥뜨린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실로 놀랍게도 그들은 거기서 자기 자신의 '마음의 그림자'를 보게 된 겁니다. 무슨 뜻이냐 하면, 그들이 '물질'의 궁극적인 질료라고 여겼던 그 '양자'(量子)에 막 손이 닿으려는 순간, 이것이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괴이한 성질을 드러냄으로써, 위대한 발견을 눈앞에 두고 마냥 가슴 설레던 과학자들을 극도로 곤혹스럽게 만든 거예요.

글쎄, 이 '양자'란 놈이 '물질'인가 하고 보면 '물질'이 아니고, 또 '물질'이 아닌가 하고 보면 다시 '물질'이고,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괴상한 성질을 드러냈으니 그럴 수밖에요. <'물질'인 동시에 '물질'이 아닌>, 이런 것은 분명 '과학'이 다룰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과학자들은 이 '양자'가 '물질' 이외의 다른 '그 어떤 것'이라고 판단하고 증명할 만한 기력을 이미 상실한 거예요.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고 있는 과학적인 탐구의 주역(主役)이 바로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의 마음'이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 수단을 갖고 있지 못합니다. 사실 그건 증명하고 말고 할 일도 아니잖습니까? 모름지기 '증명 행위'란 '관찰의 주체'인 '마음'이 '관찰의 대상'을 살펴서, 그것이 이미 증명이 끝난 사실과 견주어 동일한가 아닌가 하는 것을 판단하는 행위인데, 그렇다면 당연히 그것은 '관찰의 대상'을 다룰 때에만 유효한 것이지, '마음' 자체를 살피는 데는 전혀 쓸데없는 군더더기 아니겠어요?

결국 그들은 「'양자'(量子), 이것이 무엇인지 결코 증명할 수 없다」는, 그들로서는 결코 내키지 않는 결론을 내놓고는, 아직도 타성적으로 저 밖을 향해 초점 잃은 시선을 던지고 있는 게 바로 과학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도 머지않아 스스로 <'마음'을 돌이키는 법>을 터득할 날이 오겠지요. 그리고 저 멀리 「각성(覺城)의 동쪽」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신선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겠죠. ―「이 세상은 본래 시작도 끝도 없는, 바로 '영원' 그 자체랍니다.」 ― 찰나찰나 생성과 소멸이 이어지는 가운데 살면서도 전혀 생멸하지 않는 '진리의 세계', 즉 ― 생멸이 그대로 생멸이 아닌, ― 이것이 바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금 있는 이대로의 세계요, 지금 있는 이대로가 바로 '불국토'인 거예요.

그러므로 성인들의 '깊은 뜻'(密旨)도 바로 무명 중생들로 하여금 만법의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에 깨달아 들게 함으로써 저들로 하여금 스스로 '제 성품'을 보아 '부처 자리'에 들게 하기 위한 것이었는데, 이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 <말로 할 수 없는 것>을 드러내 보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빌려 쓴 '방편의 말씀'에 매달려서 ― 허망한 '지견(知見) 놀음'만 일삼는다면 어느 세월에 '빛'을 보겠습니까?···

「아난(阿難)이여! 문 앞의 찰간(刹竿; 불법의 상징으로 세워두는 깃대)을 쓰러뜨리라」 한 가섭(迦葉)의 일갈(一喝)이 새삼 귓전을 울리는 대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