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과연 맨 처음에 무엇이 있었는가?
2. '시작'도 '끝'도 없는 공간에서 
3. 항상 반쪽이면서 동시에 늘 꽉 차 있다
4. '짓는 자'도 없고 '받는 자'도 없다
5. 불이 섶을 태우는 게 아니고···
6. "이 뭇꼬?"···
7. 온갖 법은 스스로 성립되는 일이 없다
8. 범부와 성인이 함께 살고, 용과 뱀이 섞였느니라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하나의 참된 성품 바다>(一眞性海)를 살고 있는 겁니다. '성품 바다'에 떠다니며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이 '일진성해'가 바로 여러분의 '참 나'(眞我)인 거예요. 그러므로 이 세상의 하늘 땅 삼라만상은 유정(有情) 무정(無情)을 가릴 것 없이 몽땅 이 광대한 '일진성해'에서 다만 인연 따라 출렁이는 물거품과 같은 거랍니다. 다시 말해서 여러분의 '성품'은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하여 있고, 삼라만상은 이 '성품 바다'에 비친 그림자와 같은 거구요. 결국 일체만유는 다름 아닌, 바로 '참 나'의 천백억 분신(千百億分身)인 겁니다. '천지'가 바로 여러분 '자신'인 거예요. 이것이 '진실'입니다. 온통 '나'뿐인 거예요. 그래서 '붓다'는 태어나자마자 천지사방을 두루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이라고 하지 않았겠어요? ··· 무시(無始) 이래로 이 물거품처럼 '움직이는 몸'과 '움직이는 마음'을 '나'로 삼고 허덕허덕 살아온 '무명 중생'이 이 말을 그저 넋 놓고 듣고 있는 꼴이 보입니까?



포대(布袋) 화상이 다음과 같이 송했어요.



미륵(彌勒), 참 미륵이여!
천백억으로 분신(分身)하도다.
때때로 세상 사람들에게 보이지만
사람들이 제가 알지 못할 뿐이네.



따라서 모든 존재는 전혀 '자체의 성품'이 없어서, '이것'이라고 가리킬 만한 '실체'가 없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야깃거리를 삼을 만한 '해당(該當)하는 것'이 없는 거예요. 즉 '관찰자'도 '관찰대상'도 모두 그렇고 보니, 도무지 '무엇'이 '무엇'을 보고, '무엇'이 '무엇'을 들으며, 또한 '무엇'이 '무엇'을 상대하겠어요? 오직 순일(純一)한 '허공성'뿐이에요. 이것을 불가(佛家)에서는 '본분'(本分)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본분 자리'에는 본래 잡다한 '모습'이 없고, 따라서 온갖 '이름'이 붙을 데가 없으며, 모든 현행(現行)하는 '말'이나 '글'들은 사실 뿌리가 없는 뜬구름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도무지 '이치'니 '도리'니 하는 군것들이 애당초 끼여들 여지가 없어요.



종경록(宗鏡錄)에 보면 다음과 같은 문답이 보입니다.

【문】『무엇을 일러서 '앞에 나타난 모양'(現前相)이라고 합니까?』

【답】『대저 '부처 지혜'는 깊은 것도 아니고 얕은 것도 아니며, 멀고 가까움이 아니로되, 다만 범정(凡情)이 헷갈리면 곧 '멀다' '가깝다'고 말하는 것이니, <정(情)이 다하고 지혜(智慧)가 나타나면> 원래가 '하나의 체성'인지라 따라서 '멀고 가까움'이 아니다.

이미 '모든 법'이 곧 '마음의 제 성품'이라는 걸 알았다면, 이 '마음'이 바로 '온갖 법의 성품'임을 알 것이다. '본체'(本體)가 '제 마음'에 나타나니, '심성'(心性)에는 벌써 그지없는 덕(德)이 갖추어져 있다. 이에 <'지혜의 몸'(慧身)을 성취한다> 함은 곧, 관법(觀法)의 극진(極盡; 극치를 다함)이다.

'바른 법'(正法)이 나타나면 지금의 모든 소견은 없어진다. '부처 지혜'가 일어나고 '마음'을 깨달아서 '본체'가 나타나면 '지혜'가 원만하여짐이 마치 거울이 깨끗해지면 광명이 생기는 것과 같나니, 그러므로 '앞과 뒤'가 아니며, '새 것'과 '옛 것'이 아니어서, 고요히 비추면서 맑디맑다.

「남(他)으로 인하여 깨닫지 않는다」 함은 곧 '지혜 몸'(慧身)을 이루는 것이니, 곧 스승 없이 저절로 나는 지혜이다. 이 '지혜 몸'을 이루는 데는 반드시 '본체'를 바탕 삼아서 일어난다.

'심성'을 보았으면 어찌 '다른 이'가 있겠으며, 만약 '다른 이'가 있다면 어찌 '깨달음'이라 하겠는가. 이미 '심성'이라면 '자기'도 또한 존재하지 않아서 <고요하면서도 능히 알므로> 이것을 '정각'(正覺)이라 한다.』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다만 저들이 망정(妄情; 망령된 생각)으로 지어낸 그 숱한 환영(幻影)들을 억지로 서로 '관계'지어서 그럴싸하게 엮어놓은 게 바로 사람들이 그토록 들먹이기 좋아하는 '이치'니 '도리'니 하는 군더더기랍니다. 이 세상에서 인간이 지어낸 그 어설픈 '개념의 그물'을 걷어내 버린다면 '관계'라는 것은 어느 구석에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주관'과 '객관'의 관계, '원인'과 '결과'의 관계를 비롯해서 모든 '상호관계'는 이것이 전혀 허구(虛構)입니다. 이 모든 것은 오직 사람들이 '참된 하나'를 헷갈려서 미혹한 '마음'으로 지어낸 허망한 '개념'일 뿐이죠.

그런데도 우리들은 사물을 관찰하고, 그 결과를 설명할 때, 습관적으로 늘 <주어+술어>의 형식으로 기술하게 됩니다. 따라서 고인(古人)은 말하기를, 「'불'이 '섶'을 태우는 게 아니고, 이 모든 것은 다만 '인연' 따라 '진여법성'(眞如法性)이 감응(感應)하여 비추어낸 그림자일 뿐이라, '불'도 없고, '섶'도 없고, 따라서 '타는 일'도 없다」고 했던 겁니다. 모든 게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이므로 '불'이 본래 일어나는 일이 없고, '섶' 또한 실체가 없어서 타고 말고 할 것도 없으므로, 따라서 '불'이 '불'이 아니고, '섶'이 '섶'이 아닌데, 그렇다면 '무엇'이 '무엇'을 태우겠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불이 섶을 태운다」고 말하는 거예요. 이 모두가 몽땅 꿈속 같은 겁니다. 따라서 「불이 섶을 태운다」고 하는 거나,「불이 섶을 태우는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거나 이 모두가 다 잠꼬대인 거예요. 그러므로 이 두 말마디 가운데 어느 게 맞고, 어느 게 틀린다는 식으로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이것들이 다 잠꼬대와 같은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서, 시절과 인연 따라 알맞게 쓰되, '집착하지 말라'는 게 바로 이 이야기의 요점입니다.

모든 법이 다 그렇지만, 사람의 '마음'을 떠나서 '관계'가 홀로 세워지는 법은 없어요. 허깨비에게 무슨 생각이 있고, 뜻이 있어서 서로 '관계'를 맺을 수 있겠어요? 그러니까 몽땅 쓸데없는 '빈 말'들만 무성한 거예요.



화엄경에 다음과 같은 대목이 있어요. 즉 붓다가 어느 날 제자들에게 이르기를,···

모름지기 이 세상의 모든 '쓸데없는 이론'(戱論, 世論)들을 배우지도 말고, 가까이하지도 말라.』고 간곡히 당부하고는 이어 말하기를,···

『그 옛날 한 바라문(婆羅門)이 있었는데, 어느 날 나에게 와서 묻기를, 「'구담'(瞿曇)이시여! 모든 것은 이것이 '지은 바'(所作)입니까? ('지은 자'가 있어서 '지은 것'인가? 하는 물음)」 하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모든 것이 '지은 바'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것이 <첫 번째 세론>(世論)이니라.」 하였느니라. 그랬더니 그가 다시 묻기를,···

「그렇다면 모든 것은 '지은 바'가 아닙니까? ('지은 자'가 없고 따라서 '지은 바'도 없는 건가? 곧 '인연'으로 나는 것일 뿐인가? 하는 물음)」

모든 것은 '지은 바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곧 이것이 <두 번째 세론>이니라.

「그러면 모든 것은 이것이 '항상함'(常)입니까, '무상함'(無常)입니까?」

「그것은 <세 번째와 네 번째 세론>이니라.」

「그러면 이 모든 것은 이것이 과연 '남이 있음'(生)입니까, '남이 없음'(無生)입니까? (생멸이 있음인가, 아니면 불생불멸인가? 하는 물음)」

「그것은 <다섯 번째와 여섯 번째의 세론>이니라.」

「그러면 모든 것은 '하나'(一)입니까, '다름'(異)입니까? 혹은 '갖춤'(俱)입니까, '갖춤이 아닙니까?'(非俱), 혹은 온갖 인연으로 '생을 받음'(受生)은 이것이 '태어남'(生)입니까? '태어남이 아닙니까?'(無生)」하는 것이었느니라. 그가 계속해서 이렇게 여러 가지로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그것들은 모두가 다 '세론'이니라. 그것들은 나의 설(說)한 바가 아니요, 이 모두가 다만 그대들이 억지로 지어내서 쓰는 허망한 '세론'이니라」했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에 이르러서, 우리는 「어떻게 알아도 잘못 알았다」고 한 성인들의 말씀을 다시 한번 깊이 되새겨야 하겠습니다. 잠시 잠깐 알음알이를 굴리는 것조차 용납되지 않을 텐데, 하물며 숱한 '지견'을 짊어지고 다니면서 집착을 일으킨대서야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사람들이 날이면 날마다 그 숱한 '이름'과 '언어'의 홍수에 휩쓸린 채 헤어나지 못하면서도 그것들이 모두 허망한 '빈 말'(世論)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건, 저 '마음' 바깥에 널려 있는 온갖 사물들이 모두 '제 성품'이 없는, 전혀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또 설사 알았더라도 아직은 완전히 다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따라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저 바깥의 모든 존재가 다 '제 성품'이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임을 분명히 깨달아서, 이것들에 대해서 더는 망령된 짐작이나 헤아림을 내지 않게 된다면, <'있음'과 '없음'의 두 끝>(有無兩邊)에서 몰록 놓여날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눈앞에 나타나는 모든 법은 오직 '제 마음'이 뜻(意)에 따라 비추어 낸 것일 뿐, 마음 밖에 달리 <그런 것>들이 실재(實在)하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맑은 거울이 무심히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비추어 내는 것과 같아요. 이걸 불가에선 '현량'(現量)이라고 말합니다. 즉 사람들의 <본래 물드는 일이 없는 '마음'>이 미혹한 중생들의 사량분별(思量分別)에 감응해서 모든 차별법을 나툰다는 뜻입니다. ― 결코 '본 바', '들은 바'에 대해 비판하거나 분별하는 일이 없이, 저 바깥의 사물을 다만 <있는 그대로 지각(知覺)할 뿐인>, 이것을 가리켜 '현량'이라고 한다는 겁니다.

<오직 드러내기만 할 뿐>인 '마음'의 광명은 조금도 분별하거나 미루어 헤아리면서 추구하는 일이 없습니다. 이 '적조(寂照)의 힘', 즉 <항상 고요하면서도 늘 환히 비추는 힘>, 이 '힘'이 바로 여러분을 '진정한 선정'(上定)에 들게 하며, 이것이 곧 상락아정(常樂我淨)의 열반(涅槃)입니다.



붓다가 말하기를,···

『제 마음의 '현량'을 깨달으면 곧 망상이 나지 않고, 안온(安穩)과 쾌락으로 세상사가 영원히 쉴 뿐이다.』라고 했어요.



이야말로 더 비길 데 없는 '보배 광'(寶藏)을 만나서 단박에 모든 희망이 끊어지고, '진정한 열반'의 땅에 이르러서 다시는 더 이르를(至) 데가 없는 '구경의 자리'입니다. 이것은 범부와 성인의 끝간 자리여서, 마치 '고향'에 도달한 것과 같고, '미혹'과 '깨달음'의 공동의 의지처(依支處)가 되어서, 이미 근본(根本)을 다해 마친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