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어쩌다 아침 출근 시간에 북적거리는 인파 속에 파묻혀서 떠밀리다시피 걸어가다 보면, "후끈!" 하고 다가오는 열기와 함께, 사람들은 왜 이토록 바삐 허둥대며 살아가야 하는 걸까 하고 새삼 '살아간다'는 말의 의미가 되새겨지는 때가 있습니다. 「산다는 게 과연 뭘까?」··· 그저 매일같이 이렇게 다람쥐 쳇바퀴 돌듯 하는 따분한, 참으로 무미건조하기 이를 데 없는 일과를 반복하면서도, 그래도 꾹 참고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게 인생이라면, 인생이라는 게 이렇게밖에 살 수 없는 거라면, ··· 속시원한 해답도 있어 보이지 않는 생각이 이렇게 마구 치닫다 보면, 참 숨막힐 듯한 답답함을 주체할 수 없을 때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이렇게 쫓기면서 살다보니, 자기 자신의 살아가는 모습을 제대로 돌아볼 겨를도 없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잠시 한숨 돌려서, '나'의 지금 이 순간의 몰골을 한번 돌아보는 게 어떨까요? 숙명과도 같은 시름을 잔뜩 짊어진 채, 허덕허덕 살아가는 모습이 안쓰럽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눈길을 들어서 주위도 한번 둘러보세요.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욱 각박해지기만 하고, 이른바 정글의 법칙만이 지배하는 무한경쟁시대에 내몰리고 있는 처지가 얼마나 초라하고 왜소해 보입니까?

일전에 어떤 친구가 우리 홈페이지에 이런 내용의 질문을 올린 걸 봤어요. 「하나 있는 자식은 장애아고, 아내는 가출하고, 자신은 실직하여 병까지 얻어서 당장 살아갈 길이 막막한, 이런 사람이 옆에 있는데, 이것도 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하고, 다분히 항의조의 질문을 해 온 거예요. 맞는 말입니다. 이런 경우 그 사람을 보고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통이 그게 다 꿈과 같은 거라오」 했다간 아마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일 거예요. 그러나 그래도 우린 '진실'을 직시해야 합니다. 그들이 겪고 있는 고통을 현실적으로 해결해 준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설사 그들의 고달픈 삶을 추스르는 데 힘을 보태 주고, 또 당장에 급한 대로 돈으로 그 기갈(飢渴)을 해소해 준다고 한들, 그건 임시 변통일 뿐이요, 그게 어디 진정한 구원이 될 수 있겠어요? 이것은 모든 구제활동이 무의미하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영원한 구원의 길'은 없을까? 다시는 영원히 이런 고난이 되풀이되는 일이 없는 진정한 '구원의 길'은 없을까 하고 염원하는 겁니다. ··· 이 빈곤과 병고의 질곡에서 사람들을 구제하는 일은 실상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닌, 인류 역사와 그 기원을 함께 하는 난제입니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가난 구제는 나라도 못한다」는 말이 있은 게 아니겠어요? 예나 이제나 이 일은 그만큼 어려운 일이었던 겁니다.
그러나 여기 그것보다 몇백 배, 몇천 배 더 어려운 일이 있습니다. ― 그들이 겪고 있는 모든 고통과, 또 그런 현실을 지켜보면서도 어떻게도 해 줄 수 없어서, 자신의 무력함에 그저 비분강개할 수밖에 없는 아픈 가슴, ― 이런 모든 현세적인 고통이 다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어서, 전혀 실다운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우쳐 주는 일이야말로 진정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것은 정말 불꽃 속에서 연꽃을 피워내는 일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죠. 그런데 오직 이 길만이 '참되고 영원한 구원의 길'이라는 사실이 마음을 더욱 무겁게 합니다. 저는 지금 현실적인 구원활동의 무용론을 펴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만 그런 임시변통만 갖고는 결코 인류의 이 숙명적인 멍에는 해소될 수 없다는 걸 강조하고 있는 겁니다. 그 어렵고도 가파른 길을 능히 가겠다고 나선 게 바로 이 자리에 모인 여러 도반들입니다. 이건 아무나 가는 길이 아닙니다. 이 세간의 상식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길이니까요.



무척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매일매일 열심히 살아가기는 하는데, 그런데 여기에 '삶의 주체', 즉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이런 말이 과연 믿깁니까? 이런 유(類)의 부사의(不思議)한 숱한 의증(疑症)들을 말끔히 해소하는 길만이 이 범부의 탈을 벗어 던질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겁니다.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간에, '작용의 주체'는 본래 없는 겁니다. '작용의 주체'가 없는데 '작용'이 어떻게 혼자서 일어나겠어요? 따라서 <'불'이 '섶'을 태우는 것이 아니고, ··· > 이 모두가 다만 '한 생각'의 인연으로 나투어지는 꿈속과 같은 것임을 분명히 간파해야 하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이 '불'도 '섶'도 '타는 일'도 모두가 '자체의 성품'이 없는, 마치 환(幻)과 같은 것인데, 다만 망령된 '의식'이 이것들을 서로 그럴싸하게 관계지어서 「'불'이 '섶'을 태운다」고 말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인연법'이 행해질 때, 그 가운데는 실(實)다운 법이라곤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서 '인연'으로 말미암지 않고 일어나는 일은 하나도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 세상의 모든 생멸상(生滅相)이나 변천상(變遷相)들은 다 어떻게 된 걸까요? ··· 두말할 것도 없이, 이 모두가 환(幻)과 같고 꿈과 같은 겁니다. '지혜'가 이에 이르러 단숨에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를 좌단(坐斷; 단숨에 끊어버림)해야만 바야흐로 대인(大人)의 금도(襟度)라 할 만하지 않겠어요? 이것이 바로 이 세상이 아무리 시끄러워도 「나의 국토는 안연(晏然)합니다」라고 한 경지입니다.



··· 너무 급하게 내달았나요? 잠시 호흡을 조절하고, 차근차근히 다시 되새겨 보도록 합시다. 요는 <인연으로 말미암을 뿐, '작용의 주체'가 없다>는 겁니다. 따라서 물론 '작용'도 없는 거구요. 이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의 도리를 철저히 알지 못한다면 결코 '경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는 없습니다. 저 바다의 '물결'이 자기의 필요에 의해서 스스로의 힘으로 물결치는 건 아니잖습니까? 다만 바람이 불기 때문에 물결이 일어난 것뿐이지요. '바다' 자체도 물론 스스로는 작용이 없구요. 그러니까 다만 바람 때문에 그 겉모습이 움직이는 모습을 지었을 뿐이지, 사실은 아무 일도 일어난 일이 없는 겁니다. ··· 물결이 일어나긴 일어났지요. 그러나 물결이 사납게 출렁일 때나, 잠잠할 때나 '바다' 자체는 시종 늘고 줄고 하는 일이 없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출렁이는 '물결의 모양'은 '빈 것'인 줄로 보라는 겁니다. ― 즉 <일어나긴 일어났는데 일어난 일이 없는, 이 '작용 없는 작용'의 도리>를 알지 못하고 '의식'이 망발을 일으킨 게 바로 지금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경계'인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이에요. 따라서 '온갖 법의 실상'(實相)이란 곧, '상'(相)이 없는 게 '실상'입니다.

즉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서, 사물의 '생멸하는 모습'(生滅相)을 <인정하여 취해서는>(認取) 이것을 <실제로 존재하는 것>(實有)으로 삼고, 다시 이것을 계교(計巧)하여 「'사람'이 걸어간다」,「'불'이 섶을 태운다」는 식으로 헤아리고 또 말하게 되는 겁니다. 이것이 중생의 분별심(分別心)이 지어내는 허망한 '경계'인 겁니다. 그러면서도 이것이 전적으로 '의식'이 망령되이 지어낸 허상(虛像)이라는 걸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죠. 아니, 설사 그와 같은 사실을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한낱 '지견'(知見)으로만 남아 있는 한, 즉 「인연 따라 나는 온갖 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마치 꿈 같고 허깨비 같은 것이라」고 아는 것은, 그것이 여전히 분별지(分別智)에 의한 하나의 '소견'일 뿐이지, 결코 '참된 지혜'의 안목이 열린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 대목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 '토끼 뿔'의 있고 없음에 대해서 아무리 깊이 논의한들 무슨 소용이겠어요? 결국 거기 '관찰자'로서의 '나'가 있어서, 그가 저 바깥에 있는 '관찰의 대상'을 관찰하고 있는 한, 즉 능·소가 각기 독립된 개체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 한, 그가 아무리 정밀하게 실상을 구명(究明)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어쩔 수 없는 '분별'일 뿐입니다.

이런 표현이 모두 생경하게 들리는 까닭은 그 '말'의 내용이 까다로워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이 기왕에 알고 있었던 것과는 너무나 동떨어진 말이기 때문에 잠시 어리둥절할 뿐인 거예요. 가령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가운데 ··· >라고 들었을 때부터 벌써 어긋나기 시작합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기는커녕, 온갖 일들이 지금 목전에서 치성하게 일어나고 있는 게 그가 보는 현실이거든요. 그러니 <일어나는 게 일어나는 게 아닌 도리>(起卽無起)를 깨치기 전에야 이 매듭이 풀리겠어요?



화엄경에 이르기를,···

『'행한 바'(所行) 경계 중에서 '능'(能)과 '소'(所)가 다 '소행'(所行)이다. 즉 모든 보살이 깊이 '반야'(般若)를 행했더니, '능관'(能觀)과 '소관'(所觀)이 다 '소행'인 것과 같다. 이것은 '소행'(所行)의 경계 중에 이미 '능행'(能行)의 뜻이 포함되어 있음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르기를,···

만약 '아는 바'(所知)의 경계라면 오직 '소행'(所行)뿐이거니와, 헛되이 분제(分齊, 차별)를 봄으로써 '능행'(能行)이 있게 되었으니, 그러므로 비단 '소관'(所觀)만이 아니니라.」 한 것이다. 즉 '경계'(所觀, 관찰대상)가 이미 '능관'(能觀, 관찰자)을 함용(含容; 포함)한 연고이다.』라고 했습니다.



'보는 것'(能觀)이 그대로 '보이는 것'(所觀)이라는 말입니다. 이로부터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마음'이 그대로 '법'이라>는 말이 있게 된 겁니다. '마음'이 '법'을 내는 게 아니고, '마음'이 그대로 '법'인 거예요. '법'이 그대로 '마음'인 거구요. 그러므로 불성(佛性)이니 법성(法性), 심성(心性), 진성(眞性) 등으로 여러 이름이 있지만, 이것이 다 세간법에 빗대어 서로 다르게 부른 것일 뿐이요, 실은 본래 정한 성품도 모습도 이름도 없는, '참된 하나'(一眞)의 다른 이름일 뿐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깨치면 모든 법을 다 안다」고 했던 거예요. '마음'을 떠나서는 달리 구해야 할 '법'도 없고, 알아야 할 '법'도 없는 겁니다. 이제부터는 털끝만한 한 법이라도 '서로 다르다'고 보는 것이 있으면 이것이 외도(外道)에 떨어진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나 참으로 '마음'을 깨치고 나면 내도·외도(內道外道)의 구별인들 어디에 붙겠습니까? 일체만법이 다 '한 마음' 가운데로 녹아 다하는 겁니다. 그러니 이 경지에 이르면 「만법의 구성 원소인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모두 '자체의 성품'(自性)이 없다」고 한 말도 구차스러운 말이 아니겠어요?

자! 그런데 말입니다. 말인즉, 이렇게 천리동풍(千里同風)에 동참하기는 쉬운데, 그러나 걸음걸음마다 발끝에 감겨드는 칡넝쿨이야 어찌 하겠습니까? 그 '마음'에 능·소의 자취가 남아 있는 한 결코 갈등을 해소한다는 건 불가능합니다. 즉 '괴로운 자'가 있어서 그가 '괴롭다'고 여기는 한, 그 '괴로움'과의 싸움은 결코 해소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허공 같은 '법계'(法界), 즉 <둘 없는 '마음'>이 '인연'에 감응해서 '괴로움'이라는 이름의 심리현상을 낸 겁니다. 그런데 여기서 새삼 주의해야 할 일은 '마음'이 '괴로움'을 내는 게 아니고, '마음'이 그대로 '괴로움'이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괴로움'에서 벗어나려는 중생의 마음이 너무나 절실하고 다급하기 때문에, 초심자에게는 「'괴로움'이란 그대 '마음의 거울'에 나타난 그림자일 뿐이요, 따라서 현재에 당장 괴로울 때에도 그대 '마음'은 결코 '괴로움'이 아니니라」라고 말해 주기도 합니다. 비록 방편의 말씀이긴 하나, 이 말엔 허물이 없습니다. '그림자'와 '거울'이 어찌 서로 다른 것이겠어요? 그러나 '성품'이 밝혀지는 마당에서야 그 어디에 두 법이 붙을 여지가 있겠습니까? 그것이 '마음'이건 '괴로움'이건 또 '마음의 거울', '나타남', '사라짐' 등, 이 모두가 오직 '빈 말'일 뿐이요, 단숨에 몽땅 '허공꽃'(空華)으로 돌아가고 마는 겁니다.
비록 바람으로 말미암아 '바다'에 '물결'이 일긴 했지만, '물결'이 어찌 '물'이 아니겠어요? 그러니 '물결'을 제하고 달리 '바다'를 얻으려고 한다면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죠. 그러므로 '마음뿐'(唯心)인 도리를 몰록 깨달아서 <배움이 다하고 함이 없는>(絶學無爲) 자리에 이른 본분납자라면 결코 '괴로움이 없는 자리'를 구하거나, '괴로움 없는 자리'를 증득하거나 하는 일은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고'(苦)도 '낙'(樂)도, '생사'도 '열반'도, 이 모두가 다 '빈 이름'뿐이요, 진여법성(眞如法性)을 여읜 게 아닌 겁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적은 방편으로 빨리 '보리'(菩提)를 얻는다」 했으니 곧 '권교'(權敎; 방편의 가르침)의 '보리'가 '유위'(有爲)와 같아서, 능증(能證)과 소증(所證)을 세우는 것과는 같지 않아서, 한 생각 사이에 능·소가 없나니, 이 능·소가 다한(盡) 자리가 바로 이름이 '정각'(正覺)이기 때문이다. 또한 소승(小乘)들이 한결같이 능·소를 멸(滅)하는 것과도 같지 않나니, '능'과 '소'가 본래 스스로 작용이 없다는 것을 요달(了達)한 연고이다.
이는 이에 '법성'(法性)에 주(住)하는 까닭에 움직임과 고요함이 모두 평등한 것이니, '본래의 지혜'(本智)가 원래 움직임도 고요함도 아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들이 망령되이 <움직인다>고 말하면서 실상을 요달하지 못하기 때문에, '움직임'을 버리고 '고요함'을 구하면서 대고(大苦)를 이루는 것이다.』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