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여러분 학창시절에 '질량불변(質量不變)의 법칙'이라는 걸 배운 적이 있지 않습니까? 이 '법칙'의 내막을 잘 살펴보면 화학변화가 일어날 때, 그 외양은 분명히 변하는데, 또 화학변화가 일어나기 이전과 이후로는 그 질량(무게)도 분명히 달라지는데, 그러나 화학변화 과정에서 날아가 버린 것들까지 모두 합친다면, 총체적으로는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즉 외양으로 볼 때에는 분명히 변했는데, 실제로는 전혀 변한 것이 없다는 게 바로 '질량불변의 법칙'인 겁니다. 그래서 이 법칙을 증명하는 실험을 할 때에는 레토르트(retort)라는 밀폐된 용기를 사용하는 겁니다. 만약 우리들이 '우주'라는 이름의 거대한 레토르트를 사용했다면 과연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나 사실 이 법문은 좋은 법문이 아니니, 조심하세요. 왜냐하면 '법계 허공계'를 레토르트 같은 봉강(封疆; 일정한 경계에 의해 갇힌 공간)으로 여길까 걱정되기 때문입니다. ··· 이것이 바로 「변하긴 변했는데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는 '불천론'의 진짜 뜻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인식작용'의 국소적인 특성>을 철저히 이해한다면 우리들의 안목은 항상 '법계 허공계'를 여의지 않아서, 곧 '일체지'(一切智)를 이루게 될 겁니다.



경에 이르기를,···

『대저 사람들의 생각이 미숙한 지 오래로다. 눈으로 늘 '진실'을 마주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이미 옛날 물건이 지금에 오지 않았음을 알면서도 지금의 물건이 갈 수 있음을 말하니 말이다. 옛날 물건이 이미 오지 않았는데 지금의 물건이 어찌 갈 수 있겠는가.

따라서 중니(仲尼, 孔子)는 말하기를,···

「'회'(顔回)야! '새로운 것'으로 보라. 잠깐 동안도 '옛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다. 그렇다면 물건이 서로 왕래하지 않은 것이 분명하다. 이미 가고 오고 한 조짐이 도무지 없거늘, 다시 무슨 물건이 움직일 수 있겠는가. 따라서 물건과 물건은 <항상 저절로 새롭고>, 생각생각마다 <서로 이르지(到)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그러므로 '앞의 생각'이 이미 벌써 옛 것이요, '뒤의 생각'은 항상 새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서로 만나도 항상 이것은 '새 사람'이므로 「새로운 것으로 보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새 사람'으로 보는 것도 깍지를 끼는 동안뿐이며, 벌써 이것은 뒤의 생각인 '새 사람'이요, '앞생각'일 때가 아닌 것이다. 고로 「옛 것이 아니니라」라고 했다.

만약 앞생각이 벌써 옛 것이라면, 뒷생각은 벌써 새로운 것이다. 이렇게 '새 것'이 '옛 것'에 이르지 않고, 또 '옛 것'이 '새 것'을 기다리지 않는다면, 앞뒤의 것이 <서로 이르지 않으므로>(不相到) 따라서 한 물건도 옮아감이 없다. 찰나 동안도 <서로 모르며>(不相知), 생각생각마다 <서로 기다리지 않거늘>(不相待), 어찌 젊고 씩씩했던 몸이 백세(百歲)와 같은 몸이겠으며, 한 바탕일 수 있겠는가.

또한 '세월'이 가면 '형상'도 간다. 이것이 바로 '옮아간다'는 이치인데, 곧 '옮아감' 속에는 '옮아가지 않음'이 포함되어 있다. 즉 '지나간 때'는 지나간 때에 있었고, '옛날의 형상'은 옛날에 있었으니, 이것이 바로 '불천'(不遷)의 이치이다. 그런데 사람들은「옛날 사람이 오늘날까지 옮아 왔다」고 말하니, 이야말로 미혹된 것이다. 생각생각마다 항상 '새 것'이요, 물건물건이 저마다 머무른다. 저마다 머물며 <서로서로 의지하면서도 서로 이르지 않음>이 바로 '옮아가지 않음'(不遷)인 것이다.

미혹된 사람이면 '무상(無常)함'은 머물지 않는지라, <물건들이 새록새록 나고 사라진다>고 여기면서, 이것을 '옮아감'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혜로운 이라면 '성품'은 공하여 앎이 없고, 생각생각이 남이 없는 줄 깨달아 알아서, 이것을 '옮아가지 않음'(不遷)이라 말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이제 맨 처음에 보았던 그 '나팔꽃'은 숨바꼭질을 한 것도 아니고, 새롭게 봉오리에서 활짝 피어난 것도 아니라는 걸 알았습니다. 다만 찰나찰나 인연을 따르면서 나타난 '참 성품'(眞性)의 응현(應現)이었던 겁니다. 즉 '나팔꽃'이라는 독립적인 '실체'가 있어서 그것이 일정한 공간을 차지하면서 시간의 흐름을 따라 생장하고 꽃이 피고 한 게 아니라,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찰나적으로 생겼다 사라졌다 하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가 그 앞뒤 모습이 서로 매우 비슷비슷하게 나타나기 때문에, 그것이 이어지면서 마치 일정한 '실체'를 가진 '나팔꽃'이라는 이름의 식물이 자라고 있는 것 같은 환각을 일으킨 겁니다. 따라서 이른 아침 창가에서 보았던 '나팔꽃'의 봉오리는, 청소를 마치고 난 다음에 본, 활짝 피어난 '나팔꽃'이 아니었던 거예요. 또 활짝 피어난 '나팔꽃'을 본 '나'도 역시 맨 처음 '나팔꽃' 봉오리를 보던 '나'가 아니었던 겁니다. '꽃'도 '사람'도, 그 밖의 모든 것이 순간순간 '새로운 것'이었던 거예요. 지금 이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만나고 있는 우리들도 아까 법회를 시작할 때의 우리들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이 무엇 하나도 지속되는 것이라곤 없는 가운데서 주욱 이어지는 것과 같은 느낌을 자아내게 하는 건 오직 '의식'이 지어내는 '기억'뿐입니다. 찰나찰나 스치는 그림자에 대한 희미한 인상(印象)들이 망령된 '의식'의 덩어리를 키워가면서 이어지는 게 바로 이 세계인 거예요. 그러고 보면 이 '인상'이란 말은 제대로 쓰이고 있는 것 같군요. 즉 이 '마음'에 찍히는 순간순간의 상(像)을 좇다 보면 어느 사이엔가 이 '인상'이 '실상'(實相)으로 둔갑하면서, 바로 이 세계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순전히 '망상'(妄想)으로 말이에요.

따라서 우리 범부들이 굴리는 '생각'은 어느 것 하나 '망상' 아닌 게 없는 셈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아무것도 <보고 듣고 한 것>(所見所聞)이 없는 게 진실인데도 늘 무엇인가를 '보았다'고, 또 '들었다'고 여기니, 이게 어찌 '망상'이 아니겠어요? 그래서 선현은 말하기를,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것'(見聞覺知)이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난 줄 아는 자는 제도(濟度)하지 못한다」고 했던 겁니다. 도시 '무엇'을 보았다 하고, '무엇'을 알았다고 할 수 있겠어요? '아는 것'이 없다는 게 아닙니다.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알고 모름'이 마치 거울 속의 그림자처럼 그렇게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통상 알고 있었던 것처럼 '아는 자'가 있어서, 그가 '알음알이'를 굴리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대목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들의 마음 속에 '주체'와 '객체'라는 허망한 존재가 마치 실체를 가진 존재인 것처럼 자리잡게 된 발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아는 자'가 없는데 어떻게 그 '앎'이 혼자서 이루어지겠어요? 그렇지 않습니까? '아는 자'가 없다면, 그 '앎'이 어디에 붙어서 '알음알이'를 이룰 수 있겠느냐 말입니다. 그러므로 '아는 자'도 '아는 바'도 모두가 실체가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그것들은 스스로는 작용이 없는, 순전히 의식에 의해서 허망하게 지어진 가상의 존재인 겁니다. 이 사실을 명료하게 안다는 것은 바로 학인들로 하여금 회심(廻心)을 불가피하게 함으로써 '마음 공부'의 요체를 터득하게 하는 매우 중요한 고비가 됩니다.

그러니까 그 '앎'은 본래 스스로 '앎'이 없는 겁니다. 먼저는 알았다가 나중에 가서, 그것이 '빈 것'인 줄을 깨달아서 '앎'이 없는 것이 아니라, 원래 스스로 '앎'이 없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이 일을 두고, '봄(見)이 있다'커니 '봄이 없다'커니, 또 '앎이 있다'커니 '앎이 없다'커니 하면서 이러쿵저러쿵 시비를 벌인다면, 이것은 마치 '토끼 뿔'의 '있고 없음'을 놓고 다투는 꼴이니, 이야말로 웃음거리를 면치 못할 일입니다.



경전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어요.

세존께서 어느 날 어떤 두 사람이 돼지를 메고 지나가는 것을 보시고는 물으시기를, ···
『그것이 무엇인가?』 하셨답니다. 이에 두 사람이 대답하기를, ···
『부처님은 일체지(一切智)를 갖추셨거늘 어찌 돼지도 모르십니까?』 하니,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
『그러기에(모르기에) 물어보는 게 아니겠는가?』 하셨습니다.



대각련(大覺璉)이 이 이야기를 두고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당당하게 멘 것이 장대 위에 있는데
알지 못한다니, 무엇이라 말할까?
뉘라서 지혜를 갖춘 이는 두루 알지 못한다 하던가?
황면노자(黃面老子; 석가모니)는 원래 창피한 짓 잘했다네.



모든 법이 인연소생(因緣所生)이라 <자체의 성품이 없는> 허깨비 같은 존재인데, 다시 무엇이 있어서 생멸하고, 또 왕래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고인(古人)들이 이르기를, 「태어남이란 마치 돌계집(石女)이 아기를 배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마치 '허공꽃'(空華)이 모습을 감추는 것과 같다」고 했던 겁니다. 흔히 도(道)를 닦는다는 사람들이 이 '남(生)이 없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 말끝마다 「생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치면서 유별나게 힘을 들이고, 애를 쓰면서 이른바 고행(苦行)을 하는데, 이야말로 무명(無明)의 표본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래 태어난 일도 없는데, 다시 무슨 '생사 없는 자리'를 구하겠어요? ··· 법회 때마다 보면, 가는 데마다 어디서나 거의 빼지 않고 독송하는 경전이 있지 않습니까? 왜 그 '반야심경'(般若心經) 말이에요. 웬만한 불자라면 대개 집의 정갈한 곳에 소중하게 모셔놓은 걸 볼 수 있을 정도로, 이 경전은 널리 보급된 아주 귀중한 경전입니다. 경전의 이름에 '마음 심'(心)자가 들어 있는 유일한 경우인 이 경전은 비교적 짤막하고, 또 너무 자주 대하다 보니 희소가치가 없어진 것 같아서 늘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경전이에요. 원래 '마음 법'에는 그리 많은 말이 필요치 않은 법입니다. 여러분, 꼭 명심해야 할 게 있어요. 절 동네에서 너무 자주 들어서 입에 붙어버린 말들이 있지 않아요? 예컨대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같은 구절 말입니다. 그것은 그 말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자주 외우게 하는 겁니다. 이 말의 뜻만 옳게 알아도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은 '따 논 당상'이나 다름없을 테니까요. 이 말의 뜻을 아세요? 나는 이미 다 알고 있다고 말하지 마세요. 「모든 존재가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그대로 모든 존재이다」라는 게 바로 이 말의 참뜻입니다. 만약 누군가가 이 말의 뜻을 철저히 사무쳤다면, 그는 당장에 생사문제는 말할 것도 없고, 일체의 핍박에서 벗어나고, 벗어났다는 것도 없을 겁니다.

이 '반야심경'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지요. 즉, 「무무명역무무명진 내지 무노사역무노사진」(無無明亦無無明盡 乃至 無老死亦無老死盡) 하는 구절 말입니다. 한자(漢子) 밑천이 짧아서도 그렇겠지만, 원래 경전을 외우는 품새가 대개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입에 붙은 대로 외일 뿐이지, 그 뜻이야 대개 뒷전인 경우가 많지요. 아마 이 구절의 경우도 그 대표적인 예 중의 하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짤막한 구절의 뜻만 제대로 알아도 '부처 집안'의 가풍이 지금보다는 한결 상큼하게 변모해 있지 않을까 하고 늘 생각해 본답니다. 자! 그렇다면 이 말의 뜻이 과연 무엇이기에 그럴까요? 「'무명'(無明)이라는 것이 본래 없는 것이니, 따라서 '무명이 다한(盡) 자리'라는 것도 역시 없는 것이니라. 뿐만 아니라 '늙고 죽고 하는 일'도 본래 없는 것이니, 따라서 '늙고 죽고 하는 일이 다한 자리'라는 것도 역시 없는 것이니라.」 ··· 어떻습니까? 그 많은 불자들이 만약 이 구절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기만 한다면, '무명'을 털어 버리기 위해 허구한 날 그토록 심신을 수고롭게 할 일은 뭐겠으며, 더구나 '늙고 죽고 하는 일'이 본래 꿈속과 같아서 전혀 실다운 게 아니라면, 백일 기도, 천일 기도는 뭐며, 천도제사는 또 뭐겠습니까? 이것은 '무명'을 타파하고 영원한 광명을 회복하자는 게 아니라, 절간을 온통 무당굿판처럼 만들어 놓고는 멀쩡한 사람도 오히려 더욱 혼미하게 만들어 놓으니, 참으로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깨치고 보면 '무명'이 그대로 '부처 지혜'요, '생사'가 그대로 '열반'인 겁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모든 게 다 '참'(眞)이 아닌 게 없으니, 무엇을 참견하고 조작하고 대처하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러니 '일승'(一乘)의 길을 가는 본분납자라면 '시끄러움'을 여의고 '고요함'에 처하는, 그런 어리석은 짓은 더 이상 되풀이하지 않을 겁니다.



조산(曺山)이 동산(洞山)에게 하직을 고하니, 동산이 묻기를,···

『어디로 가려는가?』
『<변이(變異)하지 않는 곳>으로 가려고 합니다.』
『<변하고 달라지지 않는 곳>이라면 어찌 '가는 일'이 있겠는가?』
『가더라도 변함은 없습니다.』 하고는 훌쩍 떠나버렸다고 합니다.



장산근(蔣山勤)이 나중에 이 말을 듣고는 말하기를,···

『무릇 납자(衲子)들이 겨드랑이 밑에 병부(兵符)를 차고, 정수리 위에 눈을 갖추어서, 일체의 '경계'와 '인연'을 당장 좌단(坐斷)한다면 이것이 어찌 '변함 없음'(不遷)이 아니겠는가?

무슨 까닭인가? '금강의 본체'(金剛正體)는 담담히 고요하고 응연(凝然)하기 때문이니라. 조산이 비록 뜻을 얻었으나, 동산이 아기를 귀여워하다가 추해졌음을 모르니 어찌하랴? 만약 산승(山僧)이라면 그때, 그가 「변함이 없는 곳으로 가렵니다」 할 때, 다만 그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아! 문 밖을 나서기도 전에 벌써 변해 버렸느니라」 하기만 하리라.』 하였습니다.



그는 나중에 다시 이 이야기를 들(拈)고는 말하기를,···

『'진실한 경지'(實地)를 밟은 이가 아니면 어찌 이토록 철저했으리요? 어찌 말이나 생각으로 능히 헤아릴 바이랴? 대개 '깊고 지극한 곳'(深極)을 밟아서 '흘러 샘'(渗漏)이 없는 곳에 이른 뒤에야 '비단 그물'(羅籠) 속에 머물지 않게 되리라.

모름지기 도(道)를 배우는 선비는 뜻을 세우되, 이 '모습 있는 몸'(形骸)을 돌보지 않고, 살고 죽음을 하나로 여겨서 '예와 이제'(古今)를 혼융(混融)하여 왕래를 끊어야 한다. 마땅히 높은 무리와 손을 잡고, 지극히 참되고 오묘한 영역에 나아가, '자기의 일'을 끝내고, '흰 이슬'(白露)처럼 맑아서, 털끝만한 망상이나 티끌 인연에 떨어지지 않고, 당장 마음이 마른나무나 썩은 나무등걸처럼 되어, 마치 죽은 사람처럼 기식(氣息)이 아주 없어서, 마음마다 '앎이 없고'(無知), 생각마다 '머무름이 없어서'(無住), 천 성인이 오더라도 '옮길 수 없어야'(不可遷) 비로소 마른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며, '큰 기틀'(大機)을 발하고, '큰 작용'(大用)을 일으켜서 '자비'를 운전하게 되리니, 이야말로 <공이 없는 공>(無功之功)이요,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이라, 어찌 득실(得失)과 시비(是非)에 떨어지겠는가?

털끝만큼이라도 남은 것이 있으면 곧 생사경계(生死境界)에 걸려서 자기 자신도 구제하지 못하겠거늘 어찌 남을 건질 수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