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추측하고 따져 아는 것은 '마음'이 아니다
2. 치열한 삶의 현장에 '살아가는 사람'이 없다니, ···
3. '존재하는 것'과 '일어나는 일'은 둘이 아니다
4. 이 세상에 주욱 지속(持續)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
5. '나고 죽고' 하긴 하는데 실은 나고 죽는 일이 없다
6. '사물'이 없으면 '공간'도 없다
7. 30만㎞/sec의 '절대속도'는 '정지상태'와 다르지 않다
 
 
     
   

이른 아침, 창가에 피어난 나팔꽃의 새 봉오리가 금방 벌어질 듯한 자태로 아침인사를 건넵니다. 그 가녀린 분홍빛에 콧노래로 화답하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아침 청소를 마치고 막 허리를 펴고 돌아보니, 아! 글쎄 그 새에 그 여린 봉오리가 활짝 피어난 거예요. 마치 꼭꼭 숨었던 아이가 술래 앞에 화들짝 튀어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말입니다. ··· 요즘 같으면 촬영 기법도 놀랍게 발달해서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는 순간들을 놓치지 않고 지켜볼 수 있는 세상이 됐지만, 저희들의 어린 시절에는 이 나팔꽃의 숨바꼭질이 호기심 많은 동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여러분, 과연 이 나팔꽃이 숨바꼭질한 걸까요? 여러분은 해답을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군요. 그러나 오늘은 그 덤덤한 표정에, 마치 비 오는 날의 와이퍼와도 같은 새로운 화두를 펼쳐볼까 합니다.

여러분도 애니메이션(animation)이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을 겁니다. 예전 같으면 여느 사람들은 들어보기조차 힘든 전문용어인데, 세상 참 많이 변한 거죠. 그런데 이 애니메이션이라는 말은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뜻이래요. 참 그럴싸한 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대체 무엇에 생명을 불어넣는 걸까요? ··· 옛날 애니메이션 작업을 전적으로 수작업(手作業)에만 의존하던 시절의 작업실을 들여다보면, 이 '생명을 불어넣는다'는 말이 정말 실감이 날 겁니다. 요즘엔 컴퓨터 그래픽이니 디지털이니 하는 것에 밀려나서, 그 시절의 그 장인(匠人) 기질들이 많이 퇴색한 아쉬움이 있지만, 어쨌거나 그들의 섬세한 손끝으로 그려진 그림들이, 작업이 진척됨에 따라 차츰 생명을 얻어 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참 신기하다는 생각이 들곤 했어요.

여러분, 혹시 영사기에서 필름 돌아가는 그 경쾌한 기계소리를 들어본 적 있어요? 예전엔 요지경(瑤池鏡)이라는 장난감이 있어서 길가에서 코흘리개들의 발걸음을 붙잡곤 했었는데, 이 영사기는 거기다 대면 영락없는 요술상자 아니겠어요? 이런 것을 만들어내는 걸 보면, 인간은 은연중에 자기 자신들의 시각기능이 형편없이 엉성하고 흐리멍덩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는 말이 되는데, 왜냐하면 영화산업이라는 게 알고 보면, 인간의 시각적인 허점을 기술적으로 비집고 들어서, 그 약점에 편승해서 성장한 산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이 영화의 메커니즘을 잘 이해하면 우리 인간들의 사물을 보는 기능이 어떻게 짜여졌고, 어떻게 굴려지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 영화 필름이라는 걸 자세히 들여다보면, 움직이는 사람들의 동작 하나하나를 미세하게 분할해서 찍은, 비슷비슷한 정사진(靜寫眞)들이 지루하게 이어지고 있는 걸 볼 수 있습니다. 그것들만 보아 가지고는 천하에 따분하고 재미없는 게 바로 영화 필름일 겁니다. 그런데 그게 영사기를 통과하는 순간 기막힌 요술을 부리거든요. 영화 필름의 그 지루하게 이어진 한 토막 한 토막의 그림을 한 프레임이라 하는데, 촬영을 할 때나 영사를 할 때나 똑같이 이 필름이 1초 동안에 24프레임의 속도로 돌아가는 겁니다. ― 왜 이렇게 시시콜콜한 부분까지 이야기하느냐 하면, 이렇게라도 해야 우리들의 시각기능이 얼마나 애매모호하고 허점 투성이인가를 알아차릴 가능성이라도 생기겠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까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그 연속적이고 생동감 넘치는 장면들은, 사실은 이 토막토막 나뉘어서 찍힌 낱낱의 그림들이 1초 동안에 24프레임이라는 대단히 빠른 속도로 돌아가면서 비춰내는 장면들인 겁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들이 영화를 감상할 때, 실은 1초 동안에 스물넉 장의 정사진(靜寫眞)을 대단히 빠른 속도로 넘기면서 보고 있는 것이 바로 동사진(動寫眞), 즉 영화인 셈이에요. 어때요? 정신 없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그림과 그림 사이의 틈새를 잔영(殘影)이라는 묘한 장치가 있어서 교묘하게 땜질해 주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 '잔영'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 토막토막의 그림들이 너무 빠른 속도로 지나가 버리기 때문에 그 그림의 내용을 해독하는 인간의 감각기능이 미처 따라가지 못해서 생기는 현상인 겁니다.

지금까지 말한 영화 필름은 실물을 실제로 촬영해서 얻은 것인데 반해서, 애니메이션은 이 한 토막 한 토막의 그림을 손으로 직접 그려 넣는 거예요. 이게 보통 골 빠지는 작업이 아니거든요. 생각해 보세요. 필름의 길이는 보통 필름의 길이와 조금도 달라서는 안 될 테니까, 그 지루하게 이어지는 그림을 하나도 빠뜨림 없이 다 그려 넣어야 하는 거예요. 그것도 앞뒤의 그림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하게 겹쳐지도록 그려야 하고, 그러는 가운데서 전체적으로 혹은 부분적으로, 그야말로 현미경적인 차이로 조금씩, 아주 조금씩 앞뒤 그림은 차이가 나게 그려야 하는 거예요. 그래야 이것을 빠른 속도로 돌렸을 때, 그 그림 속의 사물들이 마치 실제상황처럼 움직이는 모습으로 비칠 테니까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그야말로 골 빠지게 스물넉 장을 그려야 겨우 1초 동안 돌아갈 분량밖에 안 되거든요. 가령 한 병사가 부동 자세에서 거수경례하는 장면을 생각해 봅시다. 그 쫙 뻗은 손이 바지 옆 솔기에서 떠나서 모자챙에 가 닿기까지의 동작을 스물네 토막으로 나누어서 그려 넣어야 겨우 거수경례의 한 장면이 완성되는 거예요. 이제야 애니메이션 기법의 대강이 짐작이 갈 거예요.

그런데 여기서도 마찬가지로, 왜 이토록 세부적인 부분까지 까발려야 하느냐 하면, 이것이 바로 우리들이 사물을 보는 실제 과정을 아주 슬로 모션으로 펼쳐 보이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무슨 소리냐 하면, 우리들이 일상에서 사물을 볼 때, 사실은 하나의 연속적이고 지속적인 현상을 그냥 지켜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저 애니메이션의 경우처럼 하나하나 미세하게 분할된 그림들을 굉장히 빠른 속도로 그려내서는 이것을 차례대로 넘기면서 보고 있는 겁니다. 마치 그 책의 내용이 어떤지, 대충 알아볼 양으로 주욱 한 쪽 손으로 잡아 훑어서 넘길 때처럼 말입니다. 무엇이 있어서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리느냐고 묻고 싶겠죠? 바로 우리들의 '의식'이 '마음의 거울'에 그렇게 빠른 속도로 그림을 그리는 겁니다. 보통의 그림 같으면 먼저 그리고 나중에 보는 거지만, 우리들의 시각작용은 그리는 게 동시에 보는 거예요. 이렇게 해서 자기 자신이 그렇게 잘게잘게 분별해서 그려놓고는 그것이 너무나 빠른 속도로 지나가기 때문에 그 생성과정은 잊어버리고, 다음 순간 「'무엇인가'가 목전에서 지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고 보는 겁니다. 사실은 면전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다만 제가 길들여진 습관대로, 즉 제 그림솜씨대로 그려놓고는 그걸 가지고 마치 실물을 보고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다니, 참 알고 보면 인간이라는 게 어설프기 그지없는 물건 아닙니까? 이 과정을 끝까지 파고들어 가면 사정은 더 황당해집니다만, 오늘은 이쯤에서 접도록 하죠.

여러분 참 놀랍지 않습니까? 지금 이렇게 우리들의 목전에서 전개되는 자연계의 모든 현상들이 우리의 마음에 체계적인 정보의 형태로 전달되고 인식되는 과정이 저 영화의 메커니즘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 말입니다. 선뜻 잘 납득이 가지 않죠? 그런데 그것이 사실이에요. 다만 우리들의 시각기능이 너무 흐릿해서 그와 같은 사실을 미쳐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 세상에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은 '불법'은 말할 것도 없고, 양자역학에서도 이미 충분히 입증된 거니까 새삼 부연할 필요가 없겠지만, 그래도 이 대목이 '실상의 해탈'(實相解脫)을 이루기 위해선 필히 해결하고 넘어가야 할 명제이기에, 현실문제에 빗대어서 한번 더 집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인연으로 말미암아 찰나찰나 생멸할 뿐, 실체가 없다는 사실은 '연기설'을 통해서 충분히 밝힌 것 아니겠어요? 즉 한 찰나 '인연'이 닿으면 났다가(生), '인연'이 흩어지면 곧 사라지는(滅), ― 그래서 이것을 찰나멸(刹那滅)이라 하지만, ― 이것이 바로 일체존재의 실상(實相)인 겁니다. 정말 연속적으로 반짝이는 불꽃처럼, 찰나적으로 생멸하는 빛의 얼룩이 마치 실체를 가진 물건처럼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 '찰나'라는 말은 세간에서는 '극히 짧은 시간'이라는 개념으로 쓰이지만, 그러나 '불법'에선 특히 일승별교(一乘別敎)에선 이 '찰나' 가운데 '시간 개념'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 '찰나' 동안에 생멸을 보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 이 자리에서는 '드러난 현상'(法相)의 실상을 구명함으로써 그에 대한 집착을 여의고 '법성'(法性)을 보게 하자는 데 그 뜻이 있으므로, 행여 이 '법상'을 다루는 '법문' 가운데서 '지견 놀이'에 떨어져서는 안 되겠습니다. ― 아무튼 방편교(方便敎)인 삼승교(三乘敎)에서는 일념(一念), 즉 <'한 생각'이 80찰나요, 한 찰나가 다시 80생멸이라>고 했어요. 그러니 우리가 잠깐 '한 생각' 굴리는 동안에 6,400번의 생멸현상이 일어난다는 뜻입니다. 이건 대단한 소용돌이 아닙니까? 우리들이 매일 같이 쓰는 저 전깃불이 60사이클이니까, 이건 바로 1초 동안에 60번이라는 엄청 빠른 속도로 명멸(明滅)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불빛이 주욱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거죠. 그런데 이 자연계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마음'이건 '경계'이건 막론하고, 자그마치 '한 생각' 동안에 6,400번이나 생멸한다고 하니까, 그 밖의 일들은 가히 짐작할 만하지 않습니까? 하긴, 양자이론이 밝힌 바로는, 이것이 저것으로, 저것이 이것으로 숨가쁘게 바뀌면서 춤추듯 하는 '입자'의 세계에는, 불과 몇억 분의 1초 동안만 존재하는 아원자(亞原子)도 있다고 하니까, 아무리 믿기 어려워도 믿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이 자연계의 진실입니다. 거기 어디에서 '틈새'를 엿볼 겨를이 있겠어요? 그래서 모든 게 다 지속적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보이는 겁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그렇더라도 이 모두가 찰나찰나 '새로운 것'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됩니다. 그것들은 각기 제 자리에 있으면서 왔다 갔다 옮기고, 변하고 하는 일이 없는 건데, 다만 사람의 눈이 이 '찰나멸'(刹那滅)의 미세한 실상을 알아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흐르는 듯이 보이는 그림자의 뭉치들>을 오인해서 '실재'(實在)하는 '작용의 주체'로 인정하곤, 헛되이 '생멸'을 보고, 왕래하는 모습을 보게 되는 겁니다. '원인'이 있어서 '결과'가 나긴 하지요. 그렇지만 우리들의 눈에 비친 것처럼,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온 것은 하나도 없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는 계기가 된 것일 뿐입니다. '원인'은 항상 '원인' 자리에 머물고, '결과'는 항상 '결과' 자리에 머물면서, 즉 전혀 오고 가고 하는 일이 없는데도 사람들의 눈에는 무엇인가가 지속적으로 가고 오고 하는 것처럼 보이는 거예요. '인과법'은 이렇게 지금도 굴려지고 있는 겁니다. 이것이 '불천론'(不遷論)의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