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문'은 '강연' 듣듯 학습하는 게 아니다 
2.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우주 
3. 온갖 '문제'는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증(疑症)을 내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5.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
6.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
7.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8.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다
 
     
   

봄 날씨가 참 좋지요? 아침에 일어나서 창문을 활짝 열면, 싱그러운 공기와 함께 싱싱한 푸르름이 가슴 가득히 쏟아져 들어옵니다. 이때, 사람들은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면서 탄성 섞인 소리를 토해내죠. ― 『 아아! 참 좋은 날씨구나. 이 푸르름처럼 오늘 하루도 활기차게 살아야지. ··· 』 하고 말이에요.

그러나 이때, 여러분은 얼른 회심(廻心)할 줄 알아서, 보지 말고, 말하지 말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해요. 어리둥절해 하는 모습이 역력하군요. 그러나 이 '회심'이라는 말을 들으면 <'뜻'(意)을 지어서 마음을 돌이키는>, 즉 때에 따라서 굴리는 요령 좋은 방편쯤으로 알면 큰일입니다. 여러분, 보는 게 곧 보지 않는 거예요. 말하는 게 말하지 않는 거고, 생각하는 게 생각하지 않는 겁니다. 이 모두가 오직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이 인연에 감응해서 나투는,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인 거예요. 따라서 본래 아무 일도 일어난 일이 없음을 분명히 알아서, 지금처럼 이렇게 보고 듣고 하는 이대로인 채로 고요한 거지, 공연히 '회심'함네 하고 마음을 찍어눌러서 고요하게 하는 게 아닌 겁니다. 그런 걸 일러서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하죠. ― 초장부터 행보가 너무 가팔랐나요? ― 머리를 가로젓는 걸 잠깐 뒤로 미루고, 그냥 들어보세요. 여러분, 「생각이 있으면 '범부'요, 생각이 없으면 '부처'라」는 경전의 말씀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이런 말을 들으면, 사람들의 마음은 대개 두 부류로 나뉩니다. 곧 첫째는 당장에 일어나는 생각을 찍어눌러서 우직하게 일어나지 않게 하려고 하고, 또 한 부류의 사람들은 마치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는 듯이 그냥 지나쳐 버리지요. 자신은 결코 생각이 없을 수 없으니, 따라서 이 말은 자기에겐 해당되지 않는다는 투죠.

'생각이 없다'는 말을 '불가'에서는 흔히 무념(無念), 무심(無心)이라고들 하지요. 그냥 '생각이 없다'고 말하는 것보다는 '무심' '무념'이라고 하면 실감이 나기도 하구요. 그것이 무슨 '실감'인지는 차치하고, 그저 이 '무심' '무념'이야말로 깨달음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쯤으로 알고들 있지요. 백 번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오늘도 아마 이 '무심의 경지'를 얻기 위해서 많은 수행자들이 좌선을 하고, 명상을 하고, 염불을 하면서 애쓰고들 있을 거예요. '무심'(無心)이라는 말 그대로 <생각이 없기 위해서> 애쓰고 있는 거죠. 여러분, '애를 쓴다'는 건 <마음을 수고롭게 한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글쎄요, 그러고서도 '무심'이 되어질 거라고 생각한다니, 빈 골짜기를 향해서 소리소리 지르면서 메아리를 꾸짖어 그치게 하려고 하면 되겠어요?



그렇다면 범부들이 추구하는 '무념'과 부처님이 얻은 '무념'은 어떤 차이가 있을까요? 이것을 이해하는 게 매우 중요합니다.



대승기신론(大乘起信論)의 주석서인 석마하연론(釋摩訶衍論)에 다음과 같은 말이 있어요.

『「한 생각이 처음 일어나되, 그 '처음의 모양'이 없다」고 하는 것은 곧, '마음이 일어났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 (일어난 마음의) '처음의 모양'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처음의 모양을 안다'고 하는 것은 곧 '생각이 없음'(無念)을 말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범부들이 '무심' '무념'에 대해서 갖고 있는 터무니없는 오해를 씻어 주고, 훌륭한 이해를 가능케 하는 아주 좋은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요컨대, ― 지금 이렇게 '생각을 하는 게' 바로 '생각을 하지 않는 거'라는 말입니다.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움직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거지요. ― 바로 이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의 깊은 뜻을 알지 못하고, 그저 그 말이 갖는 사전적인 의미에만 코를 꿰어서, 날이면 날마다 애꿎게 몸과 마음을 못살게 구는 것을 수행인 줄로 여기고 있으니, 참으로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 바다는 오늘도 종일토록 출렁이고 있지만, 바다 자체는 일찍이 움직이거나 변했던 적이 없어요.

그러므로 이르기를, 「'무념법'(無念法)을 깨달으면 만법이 다 통하고, 모든 '부처의 경계'를 본다」고 했던 거예요. 따라서 만약 이 '무념의 법문'을 깨달아서 문득 '무념'에 든다면, ··· 즉 그 마음이 항상 고요하되 늘 환히 알고, 항상 환히 알되 늘 고요해서, 이 '고요히 비추는'(寂照) 성품이 항상 그 '마음'에 깃들어 있다면, 성불하는 데 무슨 시간이 걸리겠습니까? 만약 그렇지 않고 마음을 일으켜서 온갖 방편에 의지하고, 공들여 갈고 닦으면서 '무심의 도'(無心道)를 구한다면, 이야말로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를 게 없으니,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에요?

오히려 잠깐 동안 헤아리고 짐작하는 것조차 소용없는 일인데, 더군다나 허구한 날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면서 공(功)을 들이는 일이야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그래서 「하면 틀린다. 안 하면 더 틀린다」고 말했던 거예요. 그런데도 「그러면 어떻게 하면 됩니까?」 하고 묻고 싶지요?···

그러니까 한 생각이 일어날 때, 그냥 잠잠히 그 생각의 흐름을 따르면서 지켜보기만 하세요. 그 생각에 꼴딱 빠져서 더욱 부추기지도 말고, 또 억지로 찍어눌러서 '무기'(無記; 목석처럼 앎이 없음)에 떨어지는 일이 있어서도 안 됩니다. 그저 다만 '일어난 생각'이 곧 일어나지 않은 줄 안다면, '일어난 생각'은 저절로 잠잠해질 거예요. '일어난 생각'이 본래 일어난 일이 없는데 다시 또 뭣하러 '회심'(廻心)해서 마음을 거두고, '빛을 돌이켜서 되돌아 비추기'(廻光返照)를 기다려서야 '생각 없음'(無念)을 얻겠습니까? 여여한 '참 성품'이 활짝 밝아지면, 거기엔 본래 '향함'도 '등짐'도 없고, '유심'도 '무심'도 없으며, '여읨'도 '합함'도 없습니다. 그와 같은 경지를 드러내기 위해서 억지로 명합(冥合)이라고 말하게 된 거예요.



동안(同安) 선사의 십현담(十玄談) 중에 다음과 같은 게송이 있습니다.



'얇은 그물'을 벗어난 잉어는
여전히 물 속에 머물고,
길 머리를 돌린 '돌 말'(石馬)이라야
비로소 얇은 비단 그물을 벗어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