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문'은 '강연' 듣듯 학습하는 게 아니다 
2.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우주 
3. 온갖 '문제'는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증(疑症)을 내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5.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
6.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
7.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8.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다
 
     
   

그러면 어떤 것이 <온갖 법의 실상>일까요? ― 선현은 말하기를, 「‘상이 없음’(無相)이 곧 ‘온갖 법의 실상’이라」고 했습니다. 곧 <‘인연’ 따라 난 모든 법은 남이 없다>(緣生而無生)는 ‘연기설’(緣起說)에서 비롯해서, 만법의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에 이르러서 가장 가파른 준령을 넘고, 이어 ‘성품 없는 도리’(無性之理)와 아울러 ‘작용 없는 작용’(無作之作)을 원만하게 통하면서(圓通), 활짝 열린 ‘지혜’가 비로소 걸림 없는 빛을 놓기 시작하는 경지입니다.

단숨에 이렇게 네모 번듯번듯한 말들만 잔뜩 늘어놓으면, 처음 듣는 사람들은 기가 질릴 만도 하지 않겠어요? 그래서 지레 짐작하기를, 그런 경지는 오랜 고행이라도 한 사람이라야 도달할 수 있는 경지이려니 하고 짐짓 꽁무니를 빼는 사람도 있을 만합니다. 또 ‘부처 집안’의 분위기가 쓸데없이 그런 냄새를 은근히 풍기고 있기도 하구요.

그러나 ‘진리’란 결코 그런 게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 있는 이대로가> ‘진리’인 것이지, 지금에 갈고 닦고 해서, 그 공덕으로 먼 훗날에 가서야 얻어지는, 그런 경지가 아니라는 걸 우선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다만 우리들이 늘 그 ‘진리’ 가운데 살면서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마치 사람들이 ‘허공’에 의지하면서, ‘허공’ 가운데서 살고 있으면서도 그 ‘허공’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또 저 물고기들이 ‘물’이 없이는 한시도 살 수 없는 처지이면서도 그 ‘물’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요컨대 사람들이 머리로 짜낸 그 ‘이치’니, ‘도리’니 하는 것들이 까다롭고 어려운 거지, ‘진리’는 본래 어려운 것도 쉬운 것도 아닌 겁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 대신 ‘불법’(佛法)이라는 말을 바꾸어 놓아도 꼭 같습니다. ‘진리’란 말 그대로 ‘참된 이치’요, 바로 그 ‘참된 이치’가 ‘불법’이니까요.



어떤 중이 스승에게 묻습니다.

『어떤 사람이 ‘불법’을 아는 사람입니까?』
『‘불법’을 배운 사람이 ‘불법’을 알지.』
『스님은 ‘불법’을 아십니까?』
『나는 ‘불법’을 모른다.』
『어째서 모르십니까?』
『나는 ‘불법’ 같은 건 배운 적이 없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들이 항상 그 속에 있으면서도 늘 그것을 등지고는 돌볼 줄 몰랐던, 그 청정한 ‘본래 마음’을 훤칠하게 드러낼 수 있는 묘안을 한번 궁리해 보도록 합시다. 늘 여여(如如)할 뿐이어서, 일찍이 생멸했던 일도 없고, 왕래한 적도 없는, 그러면서도 끊임없이 온갖 미묘하고 아기자기한 일상사에서부터, 저 장엄한 대우주의 운행에 이르기까지, 실로 부사의(不思議;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한 온갖 작용을 간단(間斷) 없이 꾸려가고 있는, 그 ‘참 성품’(眞性)을 한번 일깨워 보자는 겁니다. 마치 초혼(招魂)이라도 하듯이 말입니다.



마음을 가다듬고 차분히 한번 장을 벌여보도록 하죠. ― 한 여름의 태양이 눈부시게 작렬하는 해변가 모래사장을 떠올려 보세요. 파랗게 넘실거리는 바다와 눈이 모자라게 펼쳐진 하얀 백사장, ― 해변은 온통 울긋불긋한 원색의 열기로 넘쳐 있습니다. 이 가운데 한 무리의 젊은이들이 여느 해수욕객들과는 달리, 백사장 한 가운데 널찍하게 터를 마련해 놓고는 뭔가 특별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주위엔 벌써 호기심 찬 구경꾼들이 삼삼오오 모여들었구요. 알고 보니 그들은 젊은 미술학도들의 동호인 모임이었습니다. 여름 휴가철을 이용해서 이 백사장에서 모래 조각작품을 빚는 솜씨자랑을 한바탕 펼쳐보려는 거였어요. 이윽고 젊은 미술학도들의 진지한 작업이 시작됩니다. 그들의 섬세한 손놀림이 점점 바빠지고, 이마에 땀방울이 송송 맺혀감에 따라 작품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어느새 주위에는 구경꾼들이 운집했구요. ― 금방 갈퀴를 휘날리면서 벌떡 일어나 내달릴 것만 같은 준마의 늠름한 모습에서부터, 당당한 위풍을 뽐내면서 포효하는 수사자의 위용, 엄숙하고 온화한 자태의 반가사유상도 보이구요. 그 바로 옆엔 늘씬한 팔등신 미인이 대담한 자세로 선탠하는 모습이 한 여름의 햇빛을 받으면서 마치 살아 숨쉬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선 연신 탄성이 새어나오구요. 이때 사람들의 눈에 비친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 탄성과 함께 사실감이 넘치는 작품들이 졸지에 모래사장의 분위기를 싹 바꾸어 놓은 겁니다. 그때까진 그저 밋밋하기만 했던 모래사장에 홀연히 웅기중기한 군상들이 생겨난 것입니다. 여러 짐승들과, 사람의 형상과 ‘부처’에 이르기까지 말입니다.

세상 인심이 으레 그렇듯이, 이윽고 사람들은 흩어지고, 진홍빛 저녁노을이 백사장을 온통 빨갛게 물들일 무렵이면, 그렇게도 싱싱한 자태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던 뭇 군상들도 속절없이 허물어져 내리고, 백사장은 다시 언제 그랬더냐는 듯이 조용히 땅거미 속으로 모습을 감춥니다.



장(場)은 한 바탕 거창하게 벌였는데, ― 진정한 깨달음의 순간들이 으레 그렇듯이, ― 그 마무리는 의외로 간단합니다. 사람들은 이때, 이 한 마당의 ‘모래 조각전’을 통해서 무엇을 보았을까요? 그들은 이때, 거기서 아기자기한 숱한 형상들이 홀연히 생겨난 것을 봅니다. 지금까지는 없었던 것들이 새로이 생겨난 거지요. 인간의 ‘의식 구조’라는 게 이렇게 또렷또렷한 측면이 있는가 하면, 또 다른 한편으로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외곬이기도 한 겁니다. 백사장은 태고의 정적 그대론데, ― 북적대는 한낮의 열기가 절정을 이루고 있을 때에도 모래벌은 늘 그대로였는데, ―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그 외양(外樣)이 갖가지로 변하는 모습을 드러냈을 뿐, 그 ‘모래벌 자체’야 달라질래야 달라질 수도 없는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들은 거기서 온갖 사물들이 <생겨나서 잠시 머물렀다가는 변하면서 마침내 사라져 가는> (生住異滅) 광경을, 마치 사실인 양 또렷또렷하게 보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그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의 실제(實際)입니다. 사람들은 <남이 없다>고 들으면 그저 <남이 없는 줄>로만 알아듣기 십상 아닙니까? 그러나 애초부터 나는(生) 일이라곤 도무지 싹도 없었다면, 쓸데없이 <남이 없다>는 말이 왜 생겨나겠어요? 그러므로「겉보기에는 분명히 생멸하기는 하는데, 그러나 실제로는 전혀 생멸하는 일이 없다」는 뜻을 밝힌 게 바로 ‘남이 없는 도리’의 진짜 뜻인 겁니다.

그러나 잘 살펴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사실이 아닙니까? 영겁에서 영겁에 이르도록 내내 변하거나 달라진 일이라곤 없는 이 엄연한 ‘진실’을, 사람들의 뒤바뀐 ‘정식’(情識; 사량분별하는 의식)이 그 겉모습만 좇으면서 턱없이 설치다가 그만 놓쳐버렸던 겁니다. 그런데 이제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시(無始) 이래로 도무지 아무 일도 일어났던 적이 없었던 겁니다.

여러분, 이것이 바로 제 정신이 돌아오는 순간입니다. 그 동안 실로 오랫동안 이 ‘참 성품’을 잃어버리고 살아왔기 때문에 미(迷)했다고 했던 겁니다. 이제 이렇게 문득 ‘참 성품을 보아서’(見性), ‘참 나’(眞我)를 알고 보니, 새로 얻은 것은 무엇이며, 여읜 것은 또 무엇이겠습니까? 깨닫기 전이나 깨달은 다음이나 늘 그저 여여했던 겁니다. 이것이 곧 한 학인(學人)이 정각(正覺)을 이루는 순간입니다. 이로부터 항상 생멸하는 이 세속 가운데서 살면서도 전혀 끄달리거나 물드는 일이 없이 자재하게 살아가는, 이 사람을 일러서 달인(達人)이라고 하는 겁니다.



‘실제’(實際)는 분명히 이러한데, 진정 불생불멸(不生不滅)하고, 불래불거(不來不去)하여, 항상 본래 스스로 열반(涅槃)인 이 법계(法界)를 살면서도, 한 순간 정식(情識)이 목전의 경계에 현혹되어서, 그 허망한 모습을 ― 아까 그 백사장에서 미술학도들에 의해 제작된 작품들을 실제로 생겨난 것으로 보았듯이 ― 실체(實體)로 오인해서 집착을 일으킨다면 꼼짝없이 ‘범부의 세계’에 갇혀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겁니다. 그러나 이미 ‘성품’을 보아서, 지금 이대로인 채로 여여해서 조금도 조작하거나 바꿔치기 할 일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 그는 종일토록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지각작용을 굴리면서도, 다만 생각만으로 내내 ‘없는 것’을 굴리므로 자취가 있을 턱이 없습니다.

따라서 ‘빛깔’이 빛깔이 아니고, ‘소리’가 소리가 아니므로, ‘말하는 것’이 말하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것’이 듣는 것이 아닌, 이것이 바로 참되게 법문을 듣는 도리인 겁니다. 이제 <‘법문’을 강연 듣듯 해선 안 된다> 는 걸 알 만합니까?



본인 선사(本仁禪師)가 상당하여 말하기를,

『노승은 언제나 <소리의 앞이나 이야기의 뒤>(聲前句後)에서 남의 집 남녀들을 들뜨게 하고 싶지 않느니라. 왜냐하면 ‘소리’는 이 소리가 아니요, ‘빛’은 이 빛이 아니기 때문이니라.』 하였습니다.

그는 이어 말하기를,

『말해 보아라. 그대에게 말을 한 것인가? 그대에게 대답을 한 것인가? 만약 누군가가 가려낼 수 있으면 그에게는 <들어갈 곳> (入處)이 있다고 허락하리라.』 했습니다.



나중에 원오근(圓悟勤)이 이 화두(話頭)를 들고(拈)는 다음과 같이 송(頌)했습니다.

소리는 빈 데서 나오고, 빛은 없는 데서 생기니
소리의 앞과 이야기의 뒤라는 말이 되려 아리숭하네.
머리카락만큼의 틈도 용납지 않거늘
어찌 이름이나 모양을 지을 수 있으랴?

당당히 두루 응하니(圓應) 조그마한 일도 없고
공교(工巧; 교묘하게)히 풀무를 차렸으나 헛 분별이로다.
어찌 방망이 아래(棒下)서의 무생법인(無生法忍)이
길에 가득한 형향(馨香; 진여의 향기)을 견문(見聞)함과 같으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