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문'은 '강연' 듣듯 학습하는 게 아니다 
2.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우주 
3. 온갖 '문제'는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증(疑症)을 내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5.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
6.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
7.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8.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다
 
     
   

안녕들 하세요? 처음 보는 얼굴들도 꽤 많군요. 이 자리엔 저와 더불어 10년, 20년을 함께 걸어온 도반(道伴)들도 많은데, 말하자면 ‘고참’들인 셈이지요. 그러면 오늘 처음 오신 ‘신참’들과 어떻게 한 자리에서 같이 공부할 수 있을까 하고 걱정하는 사람도 혹시 있을 것 같아서, 첫머리에 꼭 한 마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습니다. ― 한 마디로 그런 걱정은 전혀 하지 않아도 됩니다. ― 그런데 사실은 이 대목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더구나 이 번 법회를 끝으로, 지금까지와 같은 설법 위주의 대중법회 형식을 지양할 심산이니, 이 대목을 더욱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처음 발심(發心)한 사람과, 이 길에서 그래도 나름대로 오래 갈고 닦았다는 사람들과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항용 있을 수 있는 의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참 성품’(眞性)을 깨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 ‘참 성품’은 본래 스스로 생멸(生滅)이 없어서 늘 여여(如如; 변함 없이 늘 그대로인 것)하고, 이 ‘참 성품’의 응현(應現)으로 나타나는 현상계(現象界)는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허망해서 다만 그 외양이 변하는 듯이 보일 뿐, 실은 늘 그대로인데, ― 따라서 ‘깨달음’과 ‘미혹함’도 ‘참 성품’을 여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 본성(本性)에 있어서 결코 다를 수가 없는 것인데도, 범부들은 이 이치를 알지 못해서 항상 ‘미혹함’을 여의고 ‘깨달음’을 얻으려고 까닭 없이 노심초사하는 겁니다. 이미 ‘깨달음’과 ‘미혹함’이 본래 둘이 아니라면, 그렇다면 ‘초심자’와 ‘오래 된 사람’의 차이를 무엇으로 따질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현상계의 생성과 소멸을 실제인 양 보는 자는 법문(法門)을 듣기를, 여전히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 할 것이고>, ‘불법’의 참뜻을 알아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은 ‘법문’을 듣되, ‘설한 바’(所說)도 ‘들은 바’(所聞)도 다 꿈속 같아서 실답지 않다는 걸 분명히 알므로, 언제나 <‘법문’을 듣되 들음 없이 들어서> ‘법문’을 들은 전후에 전혀 자취가 없는 겁니다.

강의나 강연을 들을 때에는, 들은 바 강의 내용을 잘 분석하고 이해해서 채곡채곡 기억해 간직하는, 이른바 <학습하는 과정> 아니겠어요? 그러나 ‘법문’은 결코 그렇게 해선 안 됩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참을성도 없이 금방 「그러면 어떻게 들어야 하느냐?」고 묻고 싶겠죠? 이 대목에서 너무 서둘면 안 됩니다. ― 우선 ‘불법 공부’는 학습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 대체로 ‘가르침’이란, 모름지기 ‘해야 할 일’과 ‘해서는 안 될 일’을 분명히 가려서,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열심히 그 ‘가르침’을 받들어 행하도록 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러므로 당연히 ‘공부’라는 것은 그 ‘가르침’의 말씀을 잘 따르던가, 아니면 해서는 안 될 일을 철저히 억제하던가 하는 게 그 과정일 텐데, 생각해 보세요. 그와 같은 과정은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감시’와 ‘순종’과 아니면 ‘자기 억제’의 연속일 테니, ― 비록 그것이 미래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한 인행(因行; 원인이 되는 행)이라고는 하지만, ― 그것은 어느 모로 보나 ‘자유’니 ‘해탈’이니 하는 것과는 동떨어진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의 삶은 이른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철이 들면서부터 내내 이렇게 심신 양면으로 부과된 무거운 짐을 숙명처럼 짊어지고 살지 않으면 안 되도록 짜여져 있는 겁니다. 가정과 학교와 사회와, 심지어 ‘종교 집단’에서까지 이와 같은 ‘인간성에 대한 폭력’이 ‘사회 도덕의 함양’이라는 명분으로 끊임없이 강제되고 있는 겁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말입니다.

그런데 ‘불법 공부’는 그와는 반대로, 지금까지 그렇게 나에게 부과되었던 과제들, 즉 장차 나에게 보다 나은, 보다 안정된 삶을 보장해 줄 수 있으리라고 여겨졌던 온갖 행업(行業)과, 또 개인적으로는 보다 ‘훌륭한 사람’, 보다 ‘대단한 사람’이 되기 위해 그 동안 탐욕스럽게 끌어 모았던 그 모든 ‘사회적 덕목’들을 일거에 미련 없이 털어 버리는 겁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본래 스스로 ‘해탈’이고, 본래 스스로 ‘열반’인 ‘나의 청정한 성품’(淸淨自性)을 되찾아 가져서 자재하게 쓰는 것이 바로 ‘불법 공부’인 겁니다. 본래 스스로 ‘해탈’이고, 본래 스스로 ‘열반’이므로, 구태여 조작하면서 애써 갈고 닦고 할 것도 없이, 찰나찰나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참된 삶>을 걸림 없이 살아가는 게 바로 ‘불법 공부’인 겁니다.

「그게 얼마나 많은 공을 들여서 쌓은 ‘지식’인데, 그걸 털어 버리느냐?」고 하겠죠? 대개의 경우 「그래도 미련 없이 던져버려야 한다」고 스승은 말할 겁니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의 근기가 영특하다면, 물론 그러지 않아도 됩니다. 만약 그 ‘지식’이 순수히 ‘지식’ 자체뿐이라면 무슨 허물이 있겠어요? 그러나 그 ‘지식’이 갖는 편향성(偏向性) 때문에, 그것이 온갖 시비와 갈등의 단초(端初)가 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겁니다. 만약 여러분의 ‘지혜’가 열려서, 그 ‘지식’의 근본 성품이 본래 청정한 것이어서, 그 ‘편향성’이나 ‘차별성’이 모두 빈 말일 뿐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면, 그토록 어지럽게 얽히던 ‘지견’들은 홀연히 ‘지혜’로 바뀌면서, 그로 말미암아 야기되었던 온갖 장애는 저절로 말끔히 다하고 말 것입니다.

이제 <법문을 듣는다>는 게 무슨 뜻인지 조금은 알 만합니까? 그러나 우리의 ‘의식’이 너무나 오랫동안 분별적인 갈등구조로 틀 지워졌기 때문에 그게 말처럼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자세히 펼쳐 보여도, 여전히 그 <따지고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는 습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거든요. 만약 여러분이 이 말을 듣고, 전적으로 공감하고, 깊이 수긍하는 바가 있다면 그것은 역시 <법문을 들은 게 아니고>, 그저 예전처럼 또 하나의 새로운 지견을 늘린 데 불과하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쯤에서 대개의 사람들은 길을 잃고 말지요. 그러면서도 길을 잃은 줄 알지도 깨닫지도 못한답니다. 이 매끄러운 길목엔 이렇게 수없이 많은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그게 함정인 줄 안다면 누가 거기에 빠지겠어요? 그러나 공부하는 사람이 선지식의 말을 깊이 수긍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에, 그게 함정인 줄은 생각지도 못하고 눈을 번히 뜬 채 그 함정에 빠져드는 겁니다. 이 말을 들으면 또 금방 「이제부턴 어떤 말도, 누구의 말도 결코 긍정하고 받아들이고 하지 않으리라!」고 하거든요. 이렇게 되면 이것은 함정이 아니라, 도저히 빠져나오기 힘든 깊은 구덩이에 빠지고 마는 겁니다. 그래서 옛 선현(先賢)은 말하기를, 「‘이해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다만 오직 ‘아는 것’을 허락할 뿐이다(不許會兮祗許知)」라고 했던 겁니다. 그러나 이 말인들 <온갖 법의 실상>(諸法實相)을 온전히 간파하기 전에야 그리 쉽게 삼켜지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