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문'은 '강연' 듣듯 학습하는 게 아니다 
2.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우주 
3. 온갖 '문제'는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증(疑症)을 내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5.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
6.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
7.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8.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다
 
     
   

세간사(世間事), 참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게 중생살이 아닙니까? 그러나 우리들은 이미 애벌로나마 '남이 없는 도리'(無生法忍)를 밝혀냈습니다. ― ‘우리의 '본래 마음'은 늘 여여할 뿐이어서, 그 가운데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고, 따라서 <온갖 법은 전혀 '한 생각'만으로 지어진 것>(萬法唯識)임을 밝혀낸 거죠.

사람들은 보통 어떤 어려운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문제를 해소하는 방편으로, 우선 그 원인을 찾아내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원인을 근본적으로 해소함으로써, 즉 발본색원(拔本塞源)함으로써 다시는 그런 어려움이 닥치지 않도록 하자는 거죠. 이것이 '인과법'(因果法)에 갇혀 사는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밟는, 거의 유일한 수순이 아닙니까? 그러나 항상 돌고 도는 게 세상사인데, 하나의 원인을 찾아내서, 그것을 하지 않게 됐다고 해서 다시는 문제가 생기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도 되겠지요. 그렇지만 어디 문제가 하나 둘이래야지요. 그래서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크고 작은 문제들에 시달리다 못해서 찾는 게 바로 '신'이나 '부처'지요.

그리고는 그와 같은 종교적 선택이 잘한 일인지, 못한 일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도 전적으로 그 바라는 바가 얼마만큼 이루어졌는가의 여부에 달려 있는 겁니다. 이런 사람들은 항상 보다 나은 결과를 추구하여 마지않기 때문에 늘 퇴전(退轉)할 가능성을 안고 있습니다. 그래서 늘 이쪽 저쪽을 기웃거리면서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가 없는 거죠.

그러나 이미 '남이 없는 도리'를 밝혀서, '온갖 법의 실상'을 간파한 사람이라면 결코 그런 어리석은 일은 하지 않을 겁니다. ― 아까 '모래벌의 법문'에서도 본 것처럼, 본래 생멸이 없는 가운데, 있는 바 모든 사물은 다만 '모래'의 다른 모습이요, '모래'의 다른 이름일 뿐, 실제로 '모래벌'에는 아무 일도 일어난 일이 없었듯이, ― 하나의 '참된 법계(法界)'엔 본래 아무 일도 일어난 일이 없는 게 실상(實相)인 겁니다. 그런 가운데서 망령되게도 온갖 현상들이 실제로 일어난 것으로 오인해서는, 허망한 집착을 일으키면서 까닭 없이 동서로 설치는 게 바로 범부의 근성인 거예요.

옛날 우리의 조상님들은 '불법'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으면서도, 이런 경우,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했더라도 함부로 설치면서 마음을 흐트러뜨리는 일은 없었어요. 40이면 함부로 혹란(惑亂)하는 일이 없고, 50이면 천명(天命)을 알고, 60이면 매사에 그저 순(順)히 따를 뿐이라고 했습니다. '조용하다'는 말은 '종용'(從容)에서 나온 말이에요. <모든 일의 실상을 잘 깨달아 살펴서, 널리 수용하고 따른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 어떻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모양새가 마치 팽이 돌듯 하는 탓도 있겠지만, 그저 조그만 일만 있어도 "빨리, 빨리 ··· " 하면서 조급하기 그지없는 작금의 인심을 살피노라면,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정(性情)이 얼마나 많이 일그러졌는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그 천진하고 소박했던 본래의 인성(人性)은 도도히 굽이치는 현대화의 탁류에 휩쓸려서, 이 척박한 각축의 마당에서 거의 망각되고 만 실정입니다. 이건 분명히 인간 스스로가 자초한 재난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만약 '마음'을 돌이킬 줄 모르고, 끝내 이대로만 간다면, 그 끝간 자리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 더 늦기 전에 우리는 이 인류의 맹목적인 맥진(驀進)을 멈추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는 차분히 나아갈 앞길을 살필 마음의 여유를 회복해야 합니다. 개인이건, 집단이건 문제의 해법을 찾기에만 너무 골몰한 나머지, 그 문제 자체의 본질을 차근차근 살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지가 너무나 오래 되었습니다. ― 우선 그 조급한 마음의 소용돌이를 그쳐야(止) 합니다. 그리고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조용히 살필(觀) 줄 알아야 합니다. ― 그렇게 함으로써 막다른 골목에 처한 인류의 전정(前程)을 우리들 자신의 손으로 구해 내야 하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여러분에게 꼭 다짐하고 넘어가야 할 선현의 말씀이 있어요. 즉, 「부처님은 그대들이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해서 해답을 주시는 분이 아니고, 다만 그 문제가 본래 문제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시는 분이니라.」 ··· 혹시 여러분에게는 이 말이 흡족하게 느껴지지 않을는지도 모르겠어요. 급한 마음에 당장 시원한 해답을 듣고 싶어하는 게 요즘 사람들의 성정이니까요. 그러나 여기에서 크게 한번 호흡을 가다듬고, 이 말의 뜻하는 바를 깊이 새겨볼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지금, 애쓰면 애쓸수록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이 세상사가 도대체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기에 이 지경인지, 이번에야말로 철저히 알아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지금까지도 많은 지혜로운 이들이 연구도 많이 했고, 훌륭한 제언도 많이 내놓았지만, 그것들이 모두 기껏해야 그때 그때의 임시변통에 그쳤고,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한번 끝장을 내자는 게 아니겠어요?

여러분, 이 말 가운데서 특히 「그 '문제'가 본래 문제가 아니었다」고 한 대목에 주목하십시오. 나에게 있어서는 '문제'가 되고도 남는데, 그것이 본래 '문제'가 아니라니, ··· 이 문제와 관련해서 또 하나 상기해야 할 말이 있습니다. 즉 「'진리의 세계' 즉, '참된 법'이 행해지는 세계에는 일체의 대립도 갈등도 없다」는 선현의 말씀이 바로 그겁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이 지금껏 허구한 날 되풀이하고 있는, 이 대립과 반목으로 점철된 세상은 다름 아닌, 바로 '진리'를 등지고 살아왔기 때문이라는 뜻이 되지 않겠어요? 이건 대단한 통찰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적어도 '진리' 운운하는 말만으로 볼 때에는 이 말도 별로 새로운 말이 아닙니다. 유사 이래 일찍이 이 '진리'를 구하지 않은 적이 있었던가요? 또 어떤 종교나 종파를 막론하고, 이 '진리'를 표방하지 않는 종교를 본 적이 있습니까? 그러니 결국 사람들은 <'진리'를 따라야만 한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는 게 '진리'에 합하는 건지 그것을 알지 못했던 거예요. 사실 이 대목이 바로 모든 수행자들이 나름대로 애는 쓰면서도, 그 '깨달아 들어갈 문'을 찾지 못해서 평생을 도로(徒勞)에 그치고 마는, 실로 미끄럽고 가파른 고개입니다.

일찍이 고인(古人)이 이르기를, 「'법'이 방소(方所)가 없으면 그 법은 '참된 법'이니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방소'를 시쳇말로 새기면, '방'은 곧 사방사유(四方四維)의 뜻이니까, 또렷또렷하게 드러난 현상계를 가리키는 말이고, '소'는 <바 '소'>, 즉 「∼하는 '바'」의 뜻이니까, 풀어 말하면, '보는 바' '듣는 바' '아는 바' 등으로 새기면 되겠지요. 그러면 「법이 '방소'가 없으면 ··· 」 운운한 것은 바로 「‘이 또렷또렷하게 드러난 현상법 가운데서 지금처럼 보고 듣고 하되,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바가 없으면> 그것이 곧 '참된 법'이니라」라는 뜻이 됩니다. 어떻습니까? 「'진리'는 인간이 생각으로 헤아려 알 수 있는 법이 아니라」고 한 말과 다를 게 없지 않습니까?

이쯤 되면 우리가 어디서 길을 잃었는지 점점 분명해집니다. 즉 '진리'를 말로만 알았지, 막상 그 '진리'에 합당한 삶을 살 줄 몰랐던 겁니다. ― 그럼 지금까지는 어디서 살았을까? ― 여러분, 그것이 어떤 삶이건 간에 '진리'를 여읜 삶이라는 게 과연 있을 수 있을까요? 결코 '진리'를 여읜 삶이라는 게 있을 수 없다면, 그렇다면 결론은 간단합니다. 즉 우리들이 항상 <그 속>에 살면서도 제가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했던 겁니다. 여러분, <'진리'라는 것은 모름지기 '보편성'으로써 근본을 삼습니다>. 그렇다면 어디가, 무엇이 '진리'가 아니기에 다시 새삼스럽게 '진리'라는 걸 찾아야 하겠습니까? ― 요컨대 '참'(眞)과 '허망'(虛妄)을 서로 다른 '두 법'으로 보고, 그리고는 '허망'을 버리고 '참된 것'을, 즉 '참된 이치'(眞理)를 추구하려 했던 데서부터 이미 '진리'를 등지고 말았던 겁니다. 여러분, '진리'를 탐구하는 행위 자체가 이미 '진리'를 등지는 게 된다는 걸 어찌 알았겠습니까? ― 이보다 더한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겠어요?


어느 날, 매일 같이 열심히 공부하던 제자가 스승에게 물었습니다.
『스님, 저는 어찌하여 '열반'(涅槃)을 얻지 못합니까?』
『'생사심'(生死心)으로 구하기 때문이니라.』
『어떤 게 '생사심'입니까?』
『'열반'을 구하는 마음이 그것이니라.』


모든 것은 본래 '참된 하나'(眞一)요, 어느 것 하나도 '진리' 아닌 게 없는 것이 바로 '진실'입니다. 지금 <있는 이대로의 것>이 어느 것 하나도 '진리' 아닌 게 없는 거예요. 그러면 무엇이 잘못됐는지 이제 분명하지 않습니까? 전혀 다를 것이라곤 없는 가운데서 망령되이 분별하고 선택하는 게 문제였던 겁니다. 여기서 '진리'라는 말 대신 '불법'이라는 말을 집어넣어도 똑같은 뜻이 됩니다. 모든 것이 지금 있는 이대로인 채로 '불법'이 아닌 게 없으니, '불법'을 공부하는 일이 무엇이 어렵겠어요? '어렵다'커니, '쉽다'커니 하는 말은, 취하고 버리고 할 때에만 해당하는 말입니다.

삼조(三祖) 승찬 대사(僧瓚大師)의 장편 게송(偈頌)인 신심명(信心銘) 가운데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습니다.


'지극한 도'(至道)는 어렵지 않건만
오직 '취하고 버리고 하는 것'(揀擇)이 탈이다.
다만 좋아하고 싫어하는 마음만 없으면
훤하게 트이고 밝아지리라.

눈앞에서 당장 이루어지기를 바라거든
'마땅하고 마땅찮은'(逆順) 마음을 두지만 말라.
역·순이 서로 다투는 것이
곧 이 '마음의 병'이니라.


여기서 늘 조심해야 할 일은, 우리의 사고가 철저히 이분법적으로 틀 지워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보편성'에 대해서 들었을 때에도 선뜻 이것에 동의하게 되거든요. 그런데 이 '보편성'을 수긍하는 마음 가운데는 혹시 은연중에 '비보편성'(非普遍性)을 배제하는 마음이 깔려 있는 건 아닌지 한번 잘 살펴보세요. 우리가 뭔가에 동의하고 찬성한다는 건 곧,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배제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처음부터 반대할 때에야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러므로 참된 수행자라면, 결코 무슨 말이건,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중간에 엉거주춤하고 있어도 안 됩니다. 지금의 이 말을 분명히 알아들었다고 해도 여전히 졸장부 소리를 면치 못합니다. 살풋 한 생각 일어나기만 해도 벌써 '진리'를 등지는 게 된다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뜻을 짓지 않으면서 보고 듣고 한다면, 그 '보고 들음'은 늘 자취 없이 깨끗할 겁니다. 마치 맑은 거울이 무심히 만상(萬像)을 비추듯이 말입니다. 거울이야 그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출 뿐이지 않습니까?

따라서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이 경우, '보편성'도 '비보편성'도 다 놓아버립니다. 이것이 바로 '보살'의 마음이지요. 이것이 진정한 '보편'이고, 이것이 바로 '진리'가 드러나는 순간인 겁니다. 이렇게 해서 <그 어디에도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 바로 천진한 우리의 '본래 마음'(本分)입니다. 거기엔 이미 어떤 대립도 갈등도 없어요. 이게 바로 상락아정(常樂我淨; 항상하고 즐겁고 '나'이고 청정하다는 열반의 네 가지 덕)의 열반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