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법문'은 '강연' 듣듯 학습하는 게 아니다 
2.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는 우주 
3. 온갖 '문제'는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것이다
4. 의증(疑症)을 내는 것은 '깨달음'의 첫걸음이다
5.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
6. '마음' 밖에는 알아야 할 만한 단 하나의 법도 없다
7. 믿는 자도 믿지 않는 자도 '깨달음'을 얻지 못한다
8. 이 '움직이는 마음'이 그대로 '고요한 마음'이다
 
     
   

옛적부터 지혜로운 사람들은 늘 생각하기를, 「나의 '지견'(知見)이 과연 충분히 신뢰할 만큼 합리적이고 또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늘 염두에 두고 살았다고 합니다. 특히 제대로 된 '과학자'나, '진리'를 탐구해 마지않는 올바른 '수행자'라면, 이와 같은 마음가짐은 필수적인 게 아닐까요?

흔히 소견이 옹색한 사람을 가리켜 <우물 안의 개구리>라고 하지 않습니까? 물론 이 경우, 자기 자신은 빼놓는 게 보통이죠.··· 그래서 오늘은 별로 내키진 않겠지만, 「혹시 '나' 자신은 과연 '우물 안의 개구리'가 아니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하고,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도록 합시다. 만약 그 동안 내가 <이것은 절대로 옳은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 "아얏!" 소리도 못할 만큼 완벽하게 뒤집혀 버린다면, 이건 내가 그 동안 우물 안의 개구리였다는 걸 증명하는 셈이 아니겠어요?



길게 변죽을 울릴 것 없이, 여기 탁자 위의 '컵'에 물이 가득 담겨져 있습니다. 이때, 이 '물의 표면상태'를 보통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모르겠어요? 「'수평면'(水平面)이냐, 아니냐?」 하고 묻고 있는 거예요. '수평면'이 맞지요? 그렇습니다. 이럴 때, 우리는 이것을 보통 '수평면'이라고 말합니다. 틀림없지요? 자! 그러면 이번엔 이 '컵'을 '대야'만큼 큰그릇으로 바꾸어 보도록 합시다. 그래도 역시 '수평면'이지요? 그러면 이번엔 큼직한 '연못'으로 확대해 봅시다. 그래도 여전히 '수평면'이 아닙니까? 그렇다면 이번엔 큰 '호수'로 가 봅시다. 그래도 역시 '수평면'이겠지요? 그러면 이번엔 한번 큰마음 먹고, '바다'로 나가보도록 합시다. 어떻습니까? 이래도 여전히 '수평면'입니까? ··· 그래도 물의 표면은 여전히 '수평면'이라고 우긴다면, 이 사람은 ― 「저 아득히 '바다'와 '하늘'이 맞닿는 경계선을 사람들은 모두 '수평선'(水平線)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따라서 '바닷물'의 표면은 어디까지나 '수평면'이라고 해야 맞는 거예요」라고 우기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이 사람은 실제로 눈에 보이는 현실이야 어떻든 간에, 애초부터 알고 있었던 상식을 고수하겠다는 게 아니겠어요? 참 묘한 게, 평소 그렇게도 영악한 인간들이 실제로 눈에는 분명히 '곡선'으로 보이는 것을 가리켜서 '수평선'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면서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으니, 이 '상식'이라는 게 얼마나 사람의 마음을 중독상태로 물들게 만드는 건지를 새삼 절감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새삼스레 코페르니쿠스와 대질할 것도 없이 ― 이쯤 되면 이미 결론은 난 것 아니겠어요? 그것은 분명히 '수평면'이 아니라 '곡면'(曲面)이었습니다. 맨 처음 그 '컵'에 담겼던 물의 표면은 분명히 '수평면'이 아니라, '곡면'이었던 거예요. '지구의 표면'이라는 거대한 '곡면'의 작은 한 부분이었던 게 틀림없지 않습니까? ―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 속에 찌들어 있는, 그 '상식'이라는 이름의 때(垢)를 벗겨내는 데 있어서 겨우 서막에 불과합니다.

유클리드의 공리에 의하면, 두 점(點) 사이의 최단거리는 직선 아닙니까? 그래서 세계지도를 펼쳐놓고, 서울과 뉴욕 사이에 자를 대고 직선을 긋습니다. 그리고는 태평양을 가로질러 나르는 점보여객기가 이 직선항로(?)를 따라서 비행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그 답은 여러분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 치고, ··· 역시 유클리드의 공리에 의하면, 삼각형의 내각(內角)의 합은 2직각, 즉 아닙니까? 그렇다면 지금부터 책상 위의 백지 위에서가 아니라, 순전히 생각만으로, '사고실험'(思考實驗) 아닌, '사고작도'(思考作圖)를 해보도록 해요. 자! 그럼 어디 한번 시작해 볼까요. 적도 위에 적당한 거리를 두고 임의의 두 점, A와 B를 정합니다. 그리고 북극점을 P로 했을 때, △PAB의 내각의 합은 얼마일까요? ··· 이것이 문제입니다. 군말 빼고, 적도와 경도는 모든 위치에서 직각으로 만날 테니까, 따라서 ∠PAB와 ∠PBA는 당연히 둘 다 직각일 테고, 그렇다면 △PAB의 두 밑각의 합이 이미 가 되었는데, 여기에 다시 ∠APB를 더하면, 그러면 △PAB의 내각의 합은 분명히 보다 크지 않겠어요? ··· 단단했던 '상식'의 기초가 흔들리기 시작하는군요. 더 정신 없이 흔들려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정신적인 스톰(storm) 현상이라고 한다던가요? 딱딱한 고정관념을 완화, 내지는 불식시킴으로써, 보다 조화롭고 균형 잡힌 사고를 가능케 하자는 거죠. 지금 우리는 오랜 세월을 두고 찌들어버린 '마음의 때(垢)'를 씻어내기 위해, 우선 따뜻한 물에 푹 불쿠는 작업을 하고 있는 겁니다.

한 예만 더 들지요. 이번에는 지구 위에 △PAB 맞잡이의 큰 원을 하나 그려봐요. 그러면 이 원의 원주율 Π는 분명히 통상의 평면 위에 그린 원의 원주율 π보다 그 값이 작게 나타날 겁니다. 위의 삼각형의 경우와 견주어서 생각해 보면 금방 알 수 있을 거예요. 여러분의 즐거움을 위해 이 부분의 설명은 유보해 두도록 하죠. ··· Π < π 즉 π는 분명히 상수(常數)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진 겁니다.

이번엔 '사고작도'가 아니라 텅 트인 허공 가운데로 '사고비행'(思考飛行)을 한번 해 볼까요? ― 아까 앞에서 태평양을 횡단비행하던 점보여객기가 고도 8,000m에 이르러서, 비행에 따른 여러 상황이 안정됨에 따라, 조종을 자동조종장치로 전환하고 순항을 계속합니다. 물론 수평비행(水平飛行)을 하는 거죠. 따라서 이때 고도(高度)는 두말할 필요도 없이, 항상 정확하게 8,000m를 유지하겠지요? 지금 '수평비행'을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마세요. 그런데 고도라는 건 당연히 지표에서 비행기까지의 거리를 말하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지구는 분명히 둥글거든요. 그렇다면 이건 무슨 뜻입니까? ― 분명히 구면(球面)인 지표와 정확히 8,000m의 고도를 유지하면서 '수평비행'을 한다? ― 이 전혀 가당치도 않는 상황이 아무런 문제 제기도 없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통용되고 있는 게 바로 우리의 현실세계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알고 보면, 현재 우리들은 일상 생활을 통해서, 이른바 불가(佛家)에서의 그 난삽(難澁)한 선문답(禪問答) 뺨치는 일들을 거뜬히 소화해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겁니다. ― 수평면과 곡면의 자연스러운 공존과 호환 ― 즉 <'곧은 것'은 절대로 '곧은 것'이고, '휜 것'은 절대로 '휜 것'이라>고 고집하는 우리들의 '의식'은 그 밑바탕에 그와는 전혀 상극하는 명제를 내포하고 있었던 겁니다. 즉 <'곧은 것'이 그대로 '휜 것'이고, '휜 것'이 그대로 '곧은 것'이라>는, 이 영락없는 '선문답' 같은 명제가 사실은 우리들의 마음 밑바닥에 은근히 깔려 있었던 거예요.

이 가운데서 어떤 것이 진정한 우리들의 '참 마음'인가 하고 묻는 것은 우문(愚問)입니다. 이 법회가 끝날 무렵이면 저절로 분명해지겠지만, 우리의 '참 마음'은 이 둘 중 어느 것에도 속해 있지 않으면서, 동시에 이 둘 모두에 속해 있는 겁니다. 마치 거울의 '비추는 성품'은 '밝음'에도 '어둠'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인연을 따르면서 능히 '밝음'과 '어둠'을 비추어 내는 것처럼 말입니다.

이 '참 마음'은 본래 '정한 성품'도 없고 '이름'도 없는 거지만, 다만 세간법을 따르면서 ― 유사한 뜻에 빗대서 ― '마음'이니 '진리'니 '부처'니 하는 '이름'들을 빌려 쓰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어쩔 수 없어서 '설법'에 인용되는 이런 '이름'들을 세간의 사전적 의미로 파악해서, 이 '이름'에 떨어져서는 결코 안 된다는 걸 특히 명심해야 합니다. 사실 <거기>에는 일체의 '이름'도 '뜻'도 '모습'도 붙을 여지가 없습니다. 때문에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말'이나 '글'은 본래 있을 수 없는 거예요. 따라서 현행(現行)하는 일체의 '말'이나 '뜻'은, 이것이 순전히 세간법을 따르면서, 중생들이 지은 업(業)의 테두리 안에서,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고, 자의적으로 쓰이고 있는 '빈 말'들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화엄경(華嚴經)에 이르기를,···

『모든 '부처'는 '빛깔'과 '소리'의 공덕(功德)이 없고, 오직 '여여'(如如)와 '여여지'(如如智)가 있을 뿐이니, 따라서 모든 중생의 '보고' '들음'은 모두가 오직 중생의 제 마음 속의 영상일 뿐이다.
따라서 모든 '설법'(說)은 오직 <'마음'만의 설법>이요, 모든 '들음'(聽)도 역시 <'마음'만의 들음>이다. 이 '마음'을 여의고 그 밖에 어디에 다시 '법'이 있겠는가?』라고 했습니다.



사익경(思益經)에 이르기를, 범천(梵天)이 문수(文殊)에게 물었습니다.

『무엇 때문에 <'말을 하여도' 말을 한 것이 아니고, '법을 들어도' 법을 들은 것이 아니거늘>, 이에 경(經)을 듣게 됩니까?』 하니, 이에 문수가 대답하기를, ···
『눈귀코혀몸뜻(眼耳鼻舌身意)이 <흘러 새지 않으면>(無漏) 이것이 참으로 '법'을 듣는 것이다. 왜냐하면 안의 육근(六根)에서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흘러 새지 않으면 이에 비로소 경(經)을 듣게 되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알 수 없는 건 바로 이 <안다는 것>, 즉 '무엇인가를 이해한다'는 이 지각작용입니다. 분명히 '눈'으로 '빛깔'을 보고, '귀'로 '소리'를 듣는데, '눈'도 '귀'도 자체로는 작용이 없고, '빛깔'과 '소리'도 자체의 성품이 없는 그림자 같고 메아리 같은 거라면, 그렇다면 이 '본다' '듣는다' 하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요? ― 이쯤에서 '꿈'에 대해 생각해 보는 게 매우 효과적입니다. <만약 '보고자 하는 뜻'이 있고, '조명'이 있고, '눈'이 있으면 '사람'은 '사물'을 볼 수 있다>고 한다면, 그렇다면 한번 꿈의 세계를 생각해 보자는 거예요. ― 즉, 캄캄한 그믐밤에 불을 끄고,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잔다면, 이 날 밤엔 꼼짝없이 '그믐밤에 까마귀 날아가는 꿈'밖에 꿀 수 없을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사실은 어떻습니까? 이 날 밤에도 분명히 꿈속에서 무엇이든지 다 보고 듣고 하지 않았겠어요?

그렇다면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모든 지각작용은 ―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 이 안에 있는 '마음'이, 저 바깥에 있는 '상대 경계'를 보고 있는 게 아니라, 전혀 '제 마음'만으로, 제가 지어서 제가 보고 있을 뿐인 겁니다. 이것이 엄연한 진실인 겁니다. 이 밖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이요, '마음' 밖에는 티끌만한 한 법도 없는데, 다만 전적으로 오랜 세월 동안 길들여진 업(業) 때문에 허망하게도 그 '뒤바뀐 마음' 속에 나타나는 그림자를 실체인 줄 오인해서 집착하고 있는 겁니다.

따라서 선현들은 말하기를, 「'한 생각' 일어나면 갖가지 법이 생겨나고, '한 생각' 사라지면 온갖 법이 사라진다(心生種種法生 心滅種種法滅)」고 했던 겁니다. 그러므로 절대시간이니, 절대공간이니 하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에 있어서 목전에 전개되고 있는 일체의 것, 이 삼천대천세계(三千大千世界)가 몽땅 망상(妄想) 때문에 무명 중생의 마음 속에 나타난 허망한 그림자라고 말하고 있는 겁니다.



능엄경(楞嚴經) 게송에 이르기를, ···

'보고 있음'을 '보는 때'에 見見之時
'봄'(見)은 이것이 '보는 것'이 아니다. 見非是見
'봄'은 오히려 '보는 것'조차 여의어서 見猶離見
'보는 것'으로는 미치지 못한다. 見不能及



해인신(海人信)이 이 게송을 들어(拈)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봄(見)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강산이 눈앞에 가득하고
털끝만치도 보지 못하거늘, 꽃은 붉고 버들은 푸르다.
그대 보지 못했는가? 흰 구름의 출몰이 본래 무심하거늘
강과 바다의 도도한 흐름이 어찌 넘치고 줆이 있으리요.



황룡심(黃龍心)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과연 몸을 뒤칠 곳이 있는가, 없는가? 만약 뒤칠 수 있다면, 눈앞엔 사리( 梨; 그대)가 없겠고, 이 법상(法床)엔 노승이 없겠지만, 만약 몸을 뒤치지 못한다면 부질없는 학식 따위를 가지고 조사(祖師)의 마음을 묻어 버리지 말라.』고 했습니다.



결국 인간이란 혼자만 똑똑한 체하면서 제멋대로 '만물의 영장'이라는 터무니없는 칭호를 참칭(僭稱)하면서도, 알고 보면 막상 '자기 자신'에 대해선 거의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거예요. 더욱 곤란한 것은 「인간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거의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당연히 '자기 자신'은 전혀 돌아볼 생각을 하지 않고, 오직 저 바깥에 널려 있는 사물들에 대해서만 마음을 빼앗기고 있으니, 참 딱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알고 보면 이 '나'와, 이 '마음'이야말로 모든 사단(事端)의 시작이요, 끝인데도 말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깨달아야 한다>는 이 난해한 문제의 실마리라도 될까 해서 여기, 역사상 실존 인물인 세 사람의 천재의 만남을 주선했습니다. 요즘 이른바 사이버 공간에서는 시·공(時空)을 넘어선, 그 전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일들이 얼마든지 벌어지고 있다면서요? 아무튼 속는 셈치고 어디 한 번 들어보세요.



푸르름이 싱그러운 어느 숲 속의 나무 그늘 아래에서 아리스토텔레스와 코페르니쿠스가 열심히 토론을 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 대지는 그야말로 보다시피 옴짝도 하지 않습니다. 말 그대로 요지부동이죠. 오직 저 하늘의 해와 달과 별들만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는 겁니다.』

코페르니쿠스, 『아니에요. 그렇지가 않아요. 그건 다만 우리 인간들의 한정된 시각으로 보는 겉보기가 그렇게 보일 뿐이지, 사실은 하늘이 움직이는 게 아니고, 바로 이 땅이 움직이고 있는 거랍니다.』

이때 마침 그 옆을 지나던 혜능(慧能)이라는 허름한 행색의 스님이 이 두 사람의 실랑이를 듣고 있다가, 아무래도 결말이 날 것 같지가 않았던지, 그 실랑이에 점잖게 끼여들었습니다.

혜능, 『그것은 '하늘'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땅'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다만 선생들의 그 '마음'이 허망하게 움직이고 있는 거랍니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코페르니쿠스, 『? ? ···』



이때, 그 옆에서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잔뜩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또 하나의 낯선 사람이 있었다는 걸 이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누구냐구요? ··· 너무 서두르지 말아요. 그게 누군지를 알아보는 일이야말로 어쩌면 이 법회를 통해서 앞으로 풀어나가야 할, 아주 까다롭고도 어려운, ― 사실은 너무 쉬워서 어려운 ― '명제'가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