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마음'이 그대로 '신'이요, '부처'요, '법'이다
2. 우상숭배를 막은 건 불조(佛祖)의 본래 뜻이다
3. '성품'을 보존하고 '무명'을 다스리는 게 예배다
4. '회심'하여 늘 각관(覺觀)을 밝게 함이 염불이다 new
5. '바른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new
6. '바른 생각'(正念)이란 <생각 없이 앎> 을 말한다 new
7.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다 환(幻)과 같다
8. 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달마'(達磨)의 말씀이 계속됩니다.

『대저 '염불'(念佛)이란 마땅히 '바른 생각'(正念)을 닦는 것이니, ···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마친 것>(了意)을 '정'(正)이라 하고, <불법의 이치를 깨달아 마치지 못한 것>(不了意)을 사(邪)됨이라 하느니라. '바른 생각'(正念)으로는 반드시 '참된 낙'(眞樂)을 얻으려니와, '삿된 생각'(邪念)으로야 어찌 '저 언덕'에 도달하랴?

'부처'(佛)란 곧, '몸'과 '마음'을 잘 깨달아 살펴서(覺察), '나쁜 생각'이 일어나지 않게 하는 것이요, '생각함'(念)이란 곧 기억하는 것이니, '계행'(戒行)을 잘 기억해 가져서 잊지 않고 부지런히 행하는 것이니라. 이런 뜻을 분명히 깨달아 마쳐야 '바른 생각'(正念)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생각함'(念)은 '마음'에 있는 것이요,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니라. 통발(筌)을 인하여 고기를 잡되, 고기를 얻었으면 통발은 버려야 하고, 말을 인하여 뜻을 얻거니와, 뜻을 얻었으면 말은 잊어야 한다.

이미 염불(念佛)이라 이름했을진댄, 마땅히 '염불의 본체'를 행할지니라. 만약 그 생각에 '실다운 본체'가 없이, 입으로 헛된 명호(名號)만 외운다면, 이런 부질없는 헛짓에 무슨 이익이 있으리요? 외움(誦)과 생각(念)함은 이름과 뜻이 아득히 다르니, 입으로 하면 '외운다' 하고, 마음으로 하면 '염한다'고 하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생각하는 것'(念)은 마음에서 일어나는 것이므로 '깨달아 행하는 문'(覺行門)이라 하고, '외우는 것'(誦)은 입으로 하는 것이므로 음성상(音聲相)일 뿐이니, 형상에 집착하여 복을 구하는 것은 끝내 옳지 못하니라.

경에 이르기를, 「무릇 형상이 있는 것은 모두 허망하다」 하였고, 또한 이르기를,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를 행하는 것이니, 마침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 하시니,··· 이것으로 보건대, '현상계의 모습'(事相)들은 '참되고 바른 것'(眞正)이 아님을 알 수 있느니라.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과거의 여러 성인들이 닦은 바 공덕은 모두가 딴 말씀이 아니라, 오직 '마음'을 논하셨을 뿐이니라. '마음'은 온갖 성스러움의 근원이며, '마음'은 모든 악의 근본이기도 하나니, 무상(無上)의 참된 즐거움도 마음에서 생기고, 삼계(三界)에 윤회(輪廻)하는 것도 역시 마음에서 일어나느니라. '마음'은 세간을 벗어나는 문이요, '마음'은 해탈의 나루터이니, 문을 아는 이가 어찌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며, 나루터를 아는 이가 어찌 도달하지 못할까 근심하랴?



요즘의 무식한 사람들을 살펴보건대, 오직 형상을 세우는 것으로 공덕을 삼아, 많은 재물을 허비하고, 수륙(水陸)의 많은 중생을 상(傷)하여 망령되이 불상과 탑을 세우며, 헛되이 사람들의 공력을 수고롭게 하여, 나무나 진흙을 쌓아올려서 울긋불긋 단청하면서 마음과 힘을 다 기울이니, 자기도 손해 되고 남도 어리둥절하게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알지 못하는지라, 이러구서야 어떻게 깨달을 수 있겠는가? '유위법'(有爲法)을 보면 금방 애착하면서도 '무상법'(無相法)을 말해 주면 모두가 멍청하니 바보와도 같도다. 세상의 조그마한 낙을 탐하다가 닥쳐올 큰 고통을 알지 못하니, 이와 같은 공부는 공연히 스스로만 피로할 뿐, <'바름'을 등지고 '버림'으로 돌아가서>(背正歸捨), 거짓으로 복을 얻는다 하는도다.

다만 <'마음'을 거두어 안으로 비추어서>(廻光返照) 그 각관(覺觀)을 항상 밝게 하라. 삼독심(三毒心; 貪·瞋·癡)을 끊어서 영원히 소멸하고, 육적(六賊; 六識)의 문을 닫아서 침노하지 못하게 하면, 항하사(恒河沙)와 같은 공덕과, 갖가지 장엄과, 한량없는 법문(法門)을 낱낱이 성취하리라. '범부'를 뛰어넘어서 '성스러운 과보'(聖果)를 증득하는 것이 바로 눈앞에 멀지 않은지라, '깨달음'이 잠깐 사이에 있거늘 어찌 머리가 희어지기를 기다리리요?』 하였습니다.



여러분! '염불'(念佛)이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 무슨 생각이 떠오릅니까? 맑은 목탁 소리와, 「나무 아미타불!」,「나무 관세음보살!」 하는 스님네의 청아한 목소리가 고즈넉한 산사(山寺)의 새벽 공기를 가만히 흔들어 깨우는 ··· 그런 문학소녀 취향의 정서에 젖어보는 게, 그 방면에 통 맹물이었을 때의 저의 느낌의 전부였어요. 그저 옆에서 가만히 듣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그런 분위기가 무척 신비스러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때엔 수행이 무엇인지 통 알지 못했을 때니까, ― 아마도 이런 분위기에서 오래 지내다 보면 사람의 마음이 저절로 깨끗해지는가 보다 ― 하는 정도로 짐작하는 게 고작이었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사찰의 그런 분위기가 무척 비현실적인 것으로 비쳐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던 게 어느 때부터인가 스님네의 그와 같은 절제된 '염불 소리' 가운데 굉장한 '영적 내연'(靈的 內燃)이 있다는 걸 어슴푸레 느끼게 된 건 저로선 대단한 진경(進境)이었던 셈이에요. 오직 고요하고 평화로운 삶을 기원하는 간절한 염원의 표현 정도로만 알았던 '염불'이 <이 '마음'을 항상 청정하게 간직하는 '수행' 그 자체였다>는 걸 안 것은 다시 그보다 한참 나중의 일이구요.

이 '몸'과 '마음'이 본래 '제 성품'이 없는 것이어서, '나'라고 하는 게 전혀 환화(幻化)와 같은 존재임을 깨달아 알아서, 안팎으로 집착이 없으면 이것이 바로 '부처'가 출흥(出興)하는 순간이요, 이와 같은 사실을 늘 잊지 않아서 자기 중심적인 온갖 욕구가 숨을 죽이게 되면, 이것이 바로 <'부처'를 잊지 않고 늘 생각하는 것>(念佛)이니, '염불'이 어찌 꼭 소리내어 외우는 데에만 있겠습니까?

앞의 조사의 말씀 가운데 「'삼독심'(三毒心)을 끊어서 영원히 소멸하고, 육적(六賊; 六識)의 문을 닫아서 침노하지 않게 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에도 이미 '남(生)이 없는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를 깨친 '일승 보살'이라면, '탐진치' 삼독(三毒)이 그대로 도(道)요, 육식(六識)이 그 근본이 늘 스스로 청정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서, 결코 '번뇌가 다한 자리'를 탐하여 증득하는 일은 없을 겁니다. 어찌 시끄러움을 마다하고 고요함을 추구하겠습니까? 이건 마치 '물결'을 여의고 '물'을 찾으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으니, '물'과 '물결'은 둘 다 '빈 이름'뿐이요, 본래 거기엔 생멸의 흔적조차 없는데 무엇을 다시 그칠 게 있겠습니까?
이와 같이 '마음의 성품'은 조작을 기다릴 것 없이 스스로 본래 고요하고, 청정하다는 걸 깨달아서, 이 <스스로 항상 고요하고 맑은 '본래 마음'>을 등지지 않고, 인연을 따르면서 밖으로 온갖 법을 굴리면서도, 종일토록 '없는 것'을 굴리듯이 하여서 전혀 자취가 없으면, 이것이 곧 '바른 생각'(正念)이요,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염불'이라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