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마음'이 그대로 '신'이요, '부처'요, '법'이다
2. 우상숭배를 막은 건 불조(佛祖)의 본래 뜻이다
3. '성품'을 보존하고 '무명'을 다스리는 게 예배다
4. '회심'하여 늘 각관(覺觀)을 밝게 함이 염불이다 new
5. '바른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new
6. '바른 생각'(正念)이란 <생각 없이 앎> 을 말한다 new
7.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다 환(幻)과 같다
8. 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우리들은 이미 오랜 탐구를 통해서, 우리들의 '한 찰나' '한 생각'이 능히 일체 만법을 내(生)고, 또한 '한 찰나' '한 생각'이 능히 일체 만법을 멸(滅)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우리들은 지금부터는 오직 '진실'에 입각해서만 생각하고, '진실'에 의해서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진리'(眞理)만이 이 세상의 온갖 대립과 갈등을 능히 해소하고, 우리 모두에게 <영원한 평화와 행복한 삶>을 약속해 줄 수 있는 겁니다. 이 '진리'는 언어나 문자로 딱히 <이런 것>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굳이 말한다면, 「'진리'는 '보편'(普遍)으로써 근본을 삼는다」는 말이 그중 비슷한 말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나'도 '너'도, '친구'도 '원수'도, '옳은 것'도 '그른 것'도, '선'도 '악'도, 이 모든 것을 능히 그 마음 가운데에 가지런히 껴잡아 굴리면서도 전혀 거리낌없는 '마음', 만약 이런 마음이 있다면 이야말로 가장 거룩하고 위대한 마음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요? ― 그 어디에도 치우치는 일이 없고, 어느 한쪽에 편드는 일도 없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이 그 마음 가운데서 자유롭게 활개치도록 놓아 둘 수 있는, 그런 마음이야말로 곧 '신의 마음'이요, '부처의 마음'일 겁니다. ― 그런데 만약 누군가가 이 말을 듣고, 전적으로 동의하고 수긍한다면 그는 결코 이 '신성'(神性)을 알지 못하고 말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가 수긍한 것 이외의 상황에 대해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 결국 이 '마음'은 궁극적으로는 '보편한 것'과 '보편하지 않은 것' 까지도 그 마음에 가지런히 포용하는, 문자 그대로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無依住) '허공 같은 마음'입니다.



어떤 스승이 제자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그대의 살림살이는 어떠한가?』
『티끌만한 한 법도 마음에 붙여둘 것이 없습니다.』
그러자 스승이 호되게 한 방망이 때렸다는 겁니다. 나중에 누군가가 그 스승에게 그때, 그렇게 말한 제자를 때린 까닭을 물었더니, 그 스승은 말하기를, ···
『만약 그때 내가 때리지 않았으면, 나의 '견해'가 그와 같다고 알 것이 아니겠는가?』라고 했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우선 「'모든 법'은 그 어느 것도 본래 '진리' 아닌 게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나' 자신이 그 어디에도 속해 있지 않지만, 동시에 그 모든 것에 속해 있다」는 말을 궁극적인 지표로 설정하면서, ― 그것이 비록 지금 당장엔 어렵겠지만, ― 지금 현재 여러분 각자가 전적으로 그에 속해 있다고 믿고 있는 일체의 것, 즉 '국가'와 '민족'과 '신앙', '철학' 등, 심지어 나아가서는 '나'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에서조차도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겠느냐 하는 겁니다. 이건 결코 그것들과 결별하고 반대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만약 반대하고 멀리하는 게 있다면 그것은 '진리'일 수 없지 않겠어요? 가령 그 전에는 좋고 싫은 게 너무 분명해서, 내가 싫은 것은 도저히 용납할 여지가 없었던 그 마음에, ― 완전히 용납하는 건 차치하고, ― 우선 조금이라도 그것을 이해할 수 있는 여지라도 마련해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조심스러운 접근에서 시작해서, 마침내는 그 모든 것을 거리낌 없이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 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나의 불찰로 해서 잃어버렸던 내 마음의 나머지 반쪽을 회복함으로써 원래의 '완전한 마음'을 되찾자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이 비록 마음에 합당한 것이건 아니건, 또한 좋은 것이건 싫은 것이건, ― 아직은 온전히 바닥을 사무치지 못해서, 여습(餘習)이 남아 있더라도, ― 그 모두를 평등하게 포용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회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우리들의 '본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장 착실한 길이라는 걸 밝히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여기서도 분명히 명심할 일은, 이 모두가 유위(有爲)의 억지놀음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모든 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와 '성품 없는 도리'를 철저히 사무침으로써, 일체의 분석적 지견이 다했을 때, 그 '본래 마음'은 저절로 찾아온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마음'이 바로 '선악과'(善惡果)를 따먹음으로써, 즉 우리들의 마음에 '선과 악'의 완강한 대립개념이 자리잡게 됨으로써 스스로 에덴의 동산을 등지게 되었던, 그런 고약한 일이 있기 이전의 '본래 마음'인 겁니다. 이것이 곧 '신의 마음'이요, '부처 마음'인 겁니다. 그런 마음이 곧 <'내 마음' 속에 '신'이 계시고, '신의 마음' 속에 '내'가 있는> 그런 마음인 겁니다. 그렇다면 내 '마음'과 '신의 마음'은 어떤 관계이겠습니까?···

간곡히 바라건대, 여러분 모두는 지금 현재 자기 자신이 어떤 특정 종교(宗敎)나 특정 종파(宗派)에 속해 있다는 사실을 부끄럽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경우도 예외가 아닙니다. 「'신'이 있다」고 말하는 자는 바보요, 「'신'이 없다」고 말하는 자는 멍텅구리입니다. 실로 그 어디에도 의지함이 없고 머무름이 없는 '허공 같은 마음'이라야 비로소 조금은 비슷해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됨으로써, 실로 오랫동안 까마득히 잊고 살았던 그 '본래의 마음'을 회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우선 확보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런 '마음'을 가진 자만이 능히 '신의 아들'이요, '부처의 참 자식'인 겁니다. '있음'도 '없음'도 보지 않고, '행복'도 '불행'도 보지 않으며, '흥함'도 '망함'도 보지 않는, 이와 같은 '마음'이라야 이것이 '참된 마음'이요, 이런 '마음'을 갖춘 자만이 '진정한 자유',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 '마음'에는 이미 '신'이니, '부처'니 하는 '군 말'들도 깨끗이 다해서, 오직 찬란한 <'영성'(靈性)의 광명>만이 빛날 것입니다.



용산 화상(龍山和尙)에게 동산(洞山)과 밀사숙(密舍叔)이 왔는데, 용산 선사가 두 사람에게 묻기를,···

『<이 산에는 길이 없거늘>(此山無路) 스님네는 어디로 해서 왔소?』 하니, 동산이 되묻기를, ···
『화상은 어디로 들어오셨습니까?』
『나는 일찍이 운수(雲水; 行脚僧)가 아니었소.』
『화상께서 이 산에 계신 지는 얼마나 되십니까?』
『봄과 가을을 거치지 않았소.』
『화상께서 먼저 계셨습니까? 아니면 이 산이 먼저 있었습니까?』
『모르오.』
『어째서 모르십니까?』
『나는 <인간 세계나 하늘 세계>(人天)에서 오지 않았소.』
『화상께서는 어떤 도리를 보셨기에 이 산에 머무르십니까?』
『두 마리의 진흙 소가 싸우면서 바다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는데, 아직까지 소식이 없소.』 하였습니다.



나중에 천동각(天童覺)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
『좋구나! 선덕(禪德)들이여. 가을이 성그니 산이 여위고, 달이 비치니 못이 비었도다. '운수(雲水)의 뜻'이 사라지고, '공훈(功勳)의 길'이 끊겼도다. 말해 보라. 이럴 때 어떻게 알아차려야 할까? ···
'옥륜'(玉輪; 天地 運用의 實際)을 굴리면서 깔깔 웃으니, 당장 만났어도 알지 못하는구나.』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