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마음'이 그대로 '신'이요, '부처'요, '법'이다
2. 우상숭배를 막은 건 불조(佛祖)의 본래 뜻이다
3. '성품'을 보존하고 '무명'을 다스리는 게 예배다
4. '회심'하여 늘 각관(覺觀)을 밝게 함이 염불이다 new
5. '바른 지혜'로 몸과 마음을 돌보는 것을 '탑돌이'라 한다 new
6. '바른 생각'(正念)이란 <생각 없이 앎> 을 말한다 new
7.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모든 게 다 환(幻)과 같다
8. 불·보살(佛菩薩)을 공경하지 않아야 하는 까닭
 
     
   

'일승'(一乘)의 본분납자(本分衲子)는 이미 '시간 없는 법문'(無時之門)에 들었으므로 시대의 변천 따위는 보지 않습니다. 따라서 붓다가 '정법시대'(正法時代)나 '상법시대'(像法時代) '말법시대'(末法時代)를 말한 것은 어디까지나 무명중생을 건지기 위해 방편으로 시설한 말씀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은, '온갖 형상'(諸相)을 세우는 것이 곧 '정법'(正法)을 등지는 일이 된다는 것을 천명한 게 바로 붓다의 본 뜻이라는 걸 알아차리는 일입니다. 고로 「만약 온갖 상(相)이 '상'이 아닌 줄 보면 곧 '여래'를 보리라」고 한 게 아니겠어요?

이 '마음'이 그대로 '부처'요, 이 '마음'이 그대로 '법'인 겁니다」. 이 '마음'을 등지고는, '마음'을 가지고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고, '마음' 밖에서 따로 '법'을 구한다면, 이야말로 '부처의 참뜻'을 정면으로 위배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기에 붓다는 간곡히 이르기를, 「만약 '모양'으로 '나'를 보려고 하거나 '음성'으로 '나'를 구하려고 한다면 이 사람은 '삿된 도'(邪道)를 행하는 것이니, 마침내 '여래'를 보지 못하리라」고 한 겁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본분납자라면 모름지기 안으로 '청정한 자성불'(淸淨自性佛)을 조촐히 지킬지언정, 어찌 밖으로 '부처'를 구해 내닫겠으며, 황차 그것도 모자라서, 그 마음을 마냥 구정거리면서 세속의 허망한 명리(名利)를 추구하는 일에 골몰할 수 있겠습니까? 실로 참된 불자라면 부끄럽고 두려운 줄 알아야 할 겁니다.

따라서 '정법시대' '상법시대' '말법시대'를 언급한 앞서의 붓다의 말씀을 그대로 빌린다면, 지금 이 시대는 '상법시대'도 까마득히 지나가서, 바야흐로 '말법시대'의 또 그 맨 끝간 자리임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감히 '불상'(佛像)을 모셔놓은 불당(佛堂) 앞에서, 세속 잡배들도 하기 어려운 난장판을 서슴없이 감행할 수 있겠어요?



이 땅의 불제자(佛弟子)들은 스스로 '조계'(曹溪)의 법맥(法脈)을 이었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 기운이 턱없이 왕성하다 보니, 선종(禪宗)이 아닌 집안에서조차도 '조사'(祖師)에 대해서는 한 수 접어놓고 지내는 형편입니다. 그러므로 '부처님' 못지 않게, 어떤 면에서는 그 이상으로 '초조'(初祖) 달마대사(達磨大師)를 극진히 숭앙하는 게 한국 불교의 대세입니다. 그것은 그만큼 '달마대사'의 '법맥'이 준엄해서, 조그마한 절차나 방편도 빌리지 않고 <곧바로 '심성'을 드러냄으로써>(直顯心性), '지극한 도'(至道)의 진수를 결단하는 요체(要諦)를 다했기 때문입니다.

그 달마대사의 준엄한 가풍(家風)과, 단순 명쾌한 설파(說破)는 쾌도난마(快刀亂麻)의 극치를 보이면서, 향상일로(向上一路)의 험준한 길목에서 '세간'과 '출세간' 사이를 서성거리던 이 동방(東方)의 불제자들에게 선교(善巧; 교묘한)한 방편을 베풂으로써 단숨에 '참 성품'(眞性)의 부활을 가능케 했던 것입니다. 그 활인검(活人劍)의 놀라운 위풍은 이미 중지(衆知)의 사실입니다.



저는 작금의 이 법난적(法難的; 진리가 수난을 겪는)인 시대상황에 처해서 2500년이라는 세월의 무게만큼이나 켜켜로 쌓여버린 온갖 적폐(積弊)를 일거에 제거하기 위해, 모든 불제자들의 마음 속에 '조사'의 극적인 재림을 기함으로써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을 극명하게 오늘에 현현(顯現)하려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앞으로는 '달마대사'의 어록(語錄)을 가능한 한 부연하는 것조차 삼가면서, 원음(原音) 그대로를 전하도록 힘쓰겠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이 법회의 도미(掉尾)를 장식하려 합니다. 따라서 모든 도반들은 지금 이 순간부터, 기왕에 '불법'에 관해서 들어 알고 있던 일체의 지견을 몽땅 지워버리고, 또한 내 뜻과 ― 내 말을 알아들으면 병이 생긴다는 ― 상관없이, 이 법회의 전반부에서 들었던 설법의 기억이 만약 남아 있거든 그것도 말끔히 지워버리고, 그야말로 허공이 허공을 대하듯이, 그렇게 '조사'의 산 숨결을 접하여 성지(聖旨)를 몰록 깨침으로써, 마치 혜가(慧可)가 '조사'의 골수(骨髓)를 얻었듯이, 그렇게 피차 환골탈태(換骨奪胎)의 계기로 삼도록 다짐해야 하겠습니다.



「달마 관심론」(達磨觀心論)에 이르기를,···

혜가(慧可)가 '조사'에게 물었습니다.

『경에 말씀하시기를, 「성전(聖殿)을 짓거나, 성상(聖像)을 조성하거나, 향(香)을 사르거나, 꽃을 흩거나, 장명등(長明燈)을 밝히거나, 밤낮 여섯 차례 예불(禮佛)하거나, 재계(齋戒)를 지키는 등 갖가지 공덕을 닦으면 모두 불도(佛道)를 이루리라」 하셨거늘, 이제 말씀하시기를, 「다만 '마음을 관하는'(觀心) 한 가지 법만으로 모든 수행을 꾸린다」고 하시니, 이것이 어찌 허망한 말씀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이에 '달마'가 대답하기를,···

중생의 근기가 둔하고 지혜가 부족하여 깊고 깊은 '묘한 이치'(妙理)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여러 가지 '방편'을 써서 중생들을 인도하시되, '유위의 일'(有爲事)을 빌려서 '무위의 이치'(無爲理)를 드러낸 것이니, 그대는 알겠는가?

그러므로 안으로 그 '마음'을 밝히지 않고, 오직 밖으로 구하기만 하면서 '복의 과보'(福報)를 희망하는 것은 옳지 못하니라.



'가람'(伽藍, Gharama)이란 범어(梵語)요, 이쪽 말로는 '청정한 곳'(淸淨處)이라는 뜻이니, ― 만약 삼독(三毒; 貪瞋癡)을 영원히 제하여 육근(六根)이 항상 깨끗하고, 몸과 마음이 담연(湛然)하여 안팎이 늘 청정하면 이것이 바로 '가람'을 짓는 것이니라.



또한 '불상'을 조성하고, '부처의 모습'을 그리고(寫) 하는 것은 모든 중생이 불도(佛道)를 구하는 행위인데, ― 이른바 <온갖 각행(覺行)을 닦아서 여래의 '참 모습'(眞容)과 '묘한 상'(妙相)을 구현하고자 하는 건데>, 어찌 금동(金銅) 따위로 주조하여 만드는 것을 말할까 보냐?

그러므로 '해탈'(解脫)을 구하는 자는 모름지기 그 '몸'으로써 용광로를 삼고, '법'으로써 '불'(火)을 삼고, '지혜'로써 '공교한 장인'(工匠)을 삼고, 삼취정계(三聚淨戒)와 육바라밀(六波羅密)로써 그 '모양'을 삼으며, 몸 안에 있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을 녹여서, 온갖 '계율'의 주형(鑄型) 속에 넣어서 가르침대로 받들어 행하되, 하나도 빠뜨림이 없이 하면 자연히 '참 모습의 등상'(眞容等相)이 이루어지리라. 이것은 이른바 '구경에 상주'(究竟常住)하는 '미묘한 법신'(微妙法身)인지라, 유위(有爲)의 허물어지는 '무상한 법'(無常法)이 아닌 것이니, 만약 사람이 있어 도(道)를 구하면서 '참 모습'(眞容)을 조성하고, 그리고, 할 줄 모른다면 무엇으로써 공덕을 이룬다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조계(曹溪)의 법맥을 이은 금도(襟度) 높은 본분납자가 한갓 무정물(無情物)에 홀려서 허구한 날 '가람'이나 짓고, 동양 최대의 불상이나 조성하는 일에 골몰한다면 이 어찌 부끄럽고 망신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 절을 지어야 하는가, 아닌가? '불상'을 조성해야 하는가, 아닌가? 우상을 숭배해야 하는가, 아닌가 하는 따위의 전혀 쓸모 없는 논쟁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왼쪽 쥐뿔이 긴가, 오른쪽 쥐뿔이 긴가 하고 노상 시비를 일삼는다면 이야말로 개뿔 같은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밖으로 허망한 무정물이나 쪼고(刻), 붓고(鑄) 할 게 아니라, 당장 회심(廻心)해서 '마음'의 진여법성(眞如法性)을 드러내는 일에 오로지 하지 않는다면, 이야말로 천추에 한을 남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앙하고 기복하는 마음으로야 어찌 진정한 해탈을 이룰 수 있겠어요?

한 인간이 수천만 년 동안을 계속해서 모진 악몽에 시달리다가 훌쩍 깨어나서는, 영원히 '근심'도 '걱정'도, 심지어 '생사'까지도 없는 '진실한 세계'에 눈을 뜬다는 사실이 얼마나 축복 받을 일인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허망한 목전의 세속사에 매달려 있으면서도 태평할 수 있는 겁니다. 이 꿈에서 깨어나는 법문은 매우 좋은 법문입니다. 이 법문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지금 목전에서 전개되고 있는, 아니, 전개되고 있는 듯이 보이는 온갖 세상사는 몽땅 중생의 망상으로 엮어지는, 영락없이 꿈과 같고 허깨비 같은 겁니다. 이 '꿈'이라는 말도 '현실'이라는 말도 모두 꿈속의 말입니다. '꿈'의 이야기나 '경계'에 관한 이야기나 다 잠꼬대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지금 현재에 있어서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見聞覺知) 일체의 작용은 사실은 '작자'(作者)도 없고, 따라서 '작용'(作用)도 없으며, 전혀 '망령된 의식'(妄識)이 요술처럼 엮어내는 꿈과 같은 것임을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이 꿈속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을 하고, 또 그 영광이 하늘에까지 닿았다고 하더라도, 또한 혹독한 고통 속을 헤매면서 헤어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이며 애쓰다가, 어느 한 순간 훌쩍 꿈에서 깨기만 하면 전혀 본래 아무 일도 없었듯이,··· 여러분, 실로 어느 날 훌쩍 '진실'에 눈을 뜨고 보면, 이 꿈의 비유가 얼마나 적실(適實)했던가를 절감하고, 회심(會心)의 미소를 짓게 될 것입니다. 사실은 성인들이 중생들에게 일러주는 갖가지의 모든 말도 다 이 꿈속에서 본 바를 기억해 두었다가, 아직 꿈에서 깨어나지 못해서 헐떡이고 있는 중생들에게 빨리 꿈에서 깨라고 일러주는 말인 겁니다. 혹시 「꿈에서 깨어나면 어떻게 됩니까?」 하고 묻고 싶거든 참았다가 꿈에서 깨어난 다음에 다시 만나도록 하죠. 그때에도 다시 그렇게 묻는다면 그저 「꿈에서 깨라!」고 일러줄 수밖에요.



협산 선사(夾山禪師)가 어느 날 대중에게 보이기를,···

『눈앞에는 법이 없거늘 뜻(意)은 눈앞에 있도다. 이것은 '눈앞의 법'이 아니므로 귀와 눈으로는 미칠 바가 아니니라.』 했습니다.



운문고(雲門 )가 이 화두를 들고는 다음과 같이 송(頌)했습니다.

어리석은 사람 앞에선 꿈 이야기를 하지 말지니
무쇠 덩어리 위에서 자칫 꿰맨 자국을 찾으리라.
분명히 말해 주어도 짐짓 귀머거리 시늉을 하면서
그저 밖을 기웃거리며 부질없이 떠들썩한다.



진실로 이 길은 복을 많이 짓고, 선근(善根)을 많이 심은 이라야 그 인연을 만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이 법회에 동참하고, 이 길을 더불어 함께 거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미 불정족(佛頂族; 부처의 정수리를 밟고 가는 귀한 족속)의 그 고귀한 위풍이 반은 성취된 셈입니다. 그러기에 모든 납자(衲子)들이 그토록 간절히 이 '조사가 서쪽에서 오신 뜻'(祖師西來意)을 밝혀내려고 애썼던 겁니다. 일언지하에 몰록 만법 밖으로 뛰어나서 가만히 지미(至美) 지선(至善)한 땅을 밟을 수 있는, 바로 그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것도 시간도 노력도 들임이 없이 도달하는 길, 아니 그렇게 해야만 <도달함이 없이 도달하는 그 길>을 알아내기 위해서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을 더 망설일 일이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