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을 좇는 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2. 선지식(善知識)은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다
3. '깨달음'의 앞뒤가 한결같은 게 '바른 깨달음'이다
4. 일승의 불과(佛果)는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는다
5. '닦는 자'도 '게으른 자'도 모두 깨치지 못한다
6. 자기의 무명(無明)이 본래 '부처'이다
 
 
 
     
   

진정한 '발심'이란 곧, '온갖 법의 실상'을 요달(了達)해서, <한 법도 구할 것이 없고, 한 법도 이룰 것이 없는 경지>를 지향하는 걸 말합니다. 한 법도 얻을 것이 없는데 지향할 건 또 무엇이겠어요? 이와 같은 마음이 되어지면 이것을 일러서 '보리심을 발했다'(發菩提心)고 하는 거예요.

따라서 불가에서의 '선지식'(善知識)은 세속에서의 '선생'과는 전혀 다른 겁니다. 세속의 '선생'들은 '제자'들을 앞에 하고,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무엇인가에 복종하게 만들던가, 아니면 반대하게 만드는 게 전부가 아니겠어요? 그러나 '선지식'은 전혀 그렇지가 않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선지식'이란 인간 본연의 '천진(天眞)한 본래 마음'을 얻은 사람입니다. 즉 '성품'을 본, '청정한 제 마음'을 밝힌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 속에는 선·악을 비롯한 일체의 차별법의 자취가 없으며, 없다는 것조차 없는, 그런 '마음'의 소유자가 바로 '선지식'인 겁니다. 따라서 그는 결코 '학인'(學人)들에게 "이렇게 하라. 이렇게 하지 말라" 하고 일러줄 말이 없는 사람인 겁니다. 그러므로 제대로 발심한 사람이 아니면, 즉 그에게서 무엇인가를 얻어내려는 생각으로 꽉 차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선지식'을 앞에 하고서도 아무 공덕도 입지 못합니다.

올바른 납자(衲子)라면 '선지식'을 대했을 때, 마치 세상 사람들이 거울 앞에 서서 옷매무새를 바로잡듯이, 학인은 그 앞에서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치우쳐 있는지, 또 얼마나 많은 지견들로 꽉 차서, 마치 넝마 창고처럼 되어버렸는지를 비추어 보는 겁니다. 그것으로 족합니다. 이런 경우 선지식은 「편견이 없어야 한다」「집착하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지도 않습니다. ··· 많은 선지석이 때때로 그렇게 말하는 걸 봤다고 하겠지요? 선지식이 그렇게 결정적으로 말할 때엔 제자의 지혜가 아직 충분히 열리지 못해서, 능히 '큰 지혜'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임시 방편으로 그렇게 말하는 겁니다. 결코 선지식의 견해가 그렇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다만 그런 온갖 지견들이 전혀 허망한 것이어서,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간파함으로써, 전혀 조작을 빌리거나 대처하는 일도 없이 문득 회심(廻心)하여야만 비로소 잠잠히 <그 자리>를 밟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 '보리심'을 얻는 데는 별다른 '길'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보리심'은 물든 것도 아니고 깨끗한 것도 아닌, 그런 마음입니다. 즉 '보리'(菩提)는 <도시 '보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 '보리'인 것>입니다. 따라서 마음을 밝히고 맑혀서 새로이 이루고 얻고 하는 게 아니기 때문에, 별달리 방편에 의지해서 일을 도모할 것이 없는 거예요. 여러분, <"한 법도 구할 것이 없다"고 아는 마음>과 <참으로 구함이 없어서 무심(無心)한 마음>과의 차이를 알 수 있겠어요? 만약 이 이치를 분명히 깨칠 수만 있다면, '보리심'은 아무 공력(功力)도 들이지 않고 나날이 자라겠지만, 만약 그렇지 않고 '염불'이니 '예불'이니 또는 '참선'이니 '육바라밀'(六波羅密)이니 하면서, 뜻을 세우고 마음을 내면서, 이 '몸'과 '마음'을 수고롭게 하는 것으로써 '수행'인 줄 안다면, 이것은 마치 모래를 쪄서 밥을 짓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아무리 애쓴들 무슨 공덕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인과법'의 굴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의 공통된 비극입니다.



용담(龍潭) 숭신(崇信) 선사가 어느 날 천황(天皇)에게 묻기를,···

『제가 여기 온 이래로 아직껏 화상께서 심요(心要; 마음법의 요체)를 일러주심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나는 그대가 온 이래로 그대에게 '심요'를 일러주지 않은 적이 없었느니라.』 하였습니다. 이에 용담이 묻기를, ···
『어디가 일러주신 경지입니까?』 하니, 천황이 대답하기를, ···
『그대가 차를 가져오면 내가 받아 마셨고, 그대가 밥을 가져오면 내가 받아 먹었고, 그대가 인사를 하면 내가 손을 들었었다. 어디가 '심요'를 보여 주지 않은 곳인가?』 하니, 숭신이 우두커니 생각에 잠기는 것이었습니다.

이에 천황이 말하기를,···

『보려면 당장 봐야 할 것이요, 이리저리 망설이면 어긋나느니라.』 하니, 선사가 이 말 끝에 당장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묻기를,···

『어떻게 보임(保任)하리까?』 하니, 천황이 말하기를, ···
'성품'에 맡겨 소요(逍遙)하며, 인연을 따르되 모름지기 방광(放曠)하여 그 언행(言行)에 걸림이 없어야 할지니라. 다만 범부의 망정(妄情)을 다할지언정 별달리 '성스러운 견해'가 있는 게 아니니라.』 했습니다.



거창한 이론을 빌릴 것도 없이, ― 나무가 있으면 '그림자'가 있고, 나무가 없으면 '그림자'가 없고, 또한 소리가 있으면 '메아리'가 있고, 소리가 없으면 '메아리'가 없는, 이것은 항상 우리들 목전에서 벌어지는 일상사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그림자'나 '메아리'를 허망하다고 하는 거구요. 만약 그것들이 그 자체로서 '실다운 체성'이 있는 거라면, 다른 것, 즉 나무나 음성과 같은 인연에 기댈 것 없이, 저들 스스로 존재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이것과 똑 같은 이치입니다. ―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원인'이 없으면 '결과'가 없는 것이므로, 따라서 이 '결과'라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건 간에 전적으로 타(他)에, 즉 '원인'에 의지해서만 세워지는 것이고, 따라서 그 '결과'라는 건 모두 '제 체성'이 없는, 허깨비와 같은 존재임이 분명합니다. '결과'가 허깨비와 같은 것이라면 '원인'인들 어떻게 혼자서 세워질 수 있겠어요? '결과'가 있어야 '원인'도 비로소 '원인'이 되는 것이고 보면, 이 '원인'도 또한 똑같이 허깨비와 같은 것임이 틀림없습니다. 결국 '원인'도 '결과'도 전혀 '정식'(情識)에 의해서 헛되이 세워진, '빈 이름'만 있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를 부를 수 있겠으며, 허깨비가 어떻게 허깨비에 응수할 수 있겠어요? 그러므로 이 모두가 <제주도 하루방이 애기를 배었다>는 말과 조금도 다를 게 없는, 전혀 잠꼬대와 같은 게 바로 '인과법'의 실상인 겁니다. '원인'도 '결과'도 다 '빈 것'임이 밝혀진 거죠.

이건 '인과법'을 무시하라는 게 아닙니다. 분명히 '원인'이 계기가 되어서 '결과'가 나기는 합니다. 그러나 다만 지금껏 우리들이 알고 있었던 것처럼, '원인'이 '결과'를 내는(生) 게 아니고, 즉 '원인'으로부터 '결과'로 무엇인가가 구체적으로 옮아간 것이 있는 게 아니고, 다만 그 '원인'은 '결과'를 낳을 계기가 되어준 것뿐인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옛날 것'이 지금에 온 것이 뭐가 있어요? 따라서 물론 '지금의 것'이 옛날로 간 일도 없구요. 아무것도 실지로 가고 오고 한 것이 없다는 사실은 우리들 모두가 일상의 경험을 통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실이 아닙니까? 그런데도 우리들은 뭔가가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끊임없이 가고 오고 한다는 생각에서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참 알고 보면 범부들의 마음이 너무나 혼미해 있어서, 전혀 본래 문제가 될 것도 없는 문제들이 항상 우리들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 셈입니다. '원인'이건 '결과'건, 이 모두가 다 '빈 이름'일 뿐이어서, 이 세상에 도무지 가고 오고 한 흔적조차 없다면, 그렇다면 당연히 이 세상의 모든 존재는, 그것이 유정(有情)이건 무정(無情)이건 막론하고, 그 모두가 순간순간 스스로 새로운 것일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앞뒤가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앞뒤에 이어 닿는 게 없는데, 거기에 무슨 '탈'이 붙을 수 있겠어요? 일체의 '범정'(凡情)과 '이름'이 붙을 여지가 없으며, 그것은 '그것'이라는 지칭대명사조차 붙을 수 없는, 그야말로 그 자체로서 스스로 청정한 존재인 겁니다. 아니, 여기에 이르러선 그 '청정'이라는 말조차도 전혀 군말이 되고 맙니다. 도대체 '그것'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는 마당에 '무엇'에 대해서 '청정하다'는 형용사를 붙일 수 있겠어요? 이 흔하게 쓰이는 '청정'이라는 말은 사실 그 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은연중에 <청정하고자 하는 바람>을 일으켜 왔던 게 사실입니다. 가장 마지막까지 우리들의 마음에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때'(垢) 중의 하나가 바로 이 '청정'이라는 걸 명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