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을 좇는 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2. 선지식(善知識)은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다
3. '깨달음'의 앞뒤가 한결같은 게 '바른 깨달음'이다
4. 일승의 불과(佛果)는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는다
5. '닦는 자'도 '게으른 자'도 모두 깨치지 못한다
6. 자기의 무명(無明)이 본래 '부처'이다
 
 
 
     
   

모든 수행자들이 이 '깨달음의 순간'이 오기를 얼마나 목마르게 기다리고 있습니까? 아무리 '깨달음'도 '미혹함'도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는 허망한 그림자 놀음일 뿐이라고 일러줘도 막무가내입니다. 먼저는 미혹했다가 나중에 가서야 깨닫는 거라면, 이건 분명히 '생사법'(生死法)이요, '무상법'(無常法)임이 틀림없는데도, 이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지 못하거든요.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그 결정적인 '한 순간'을 맞기 위한 노력을 쉬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 다른 한편에선 자칭 일부 앞서간다는 무리들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그만두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구요. ··· 「전방(前方)으로는 도달해야 할 '마을'에 아직 도달하지 못했고, 뒤로는 돌아가서 쉬어야 할 '고향'에 아직 돌아가지 못한, 바로 그 자리에서 몰록 활로(活路)를 얻어야 한다」고 한 고인(古人)의 말이 절실한 대목입니다.

결국 아무도 이 '깨달음의 길'에 도움을 줄 수 없고, 또 남의 도움을 받을 수도 없는 게 바로 이 '향상일로'(向上一路; 향상발전을 도모하는 길)입니다. 본래 거기에는 길이 없는 거예요. '경회루'(慶會樓)에 앉아서 늘 '서울'로 가는 길을 묻고, 또한 빠르게 곧바로 가는 지름길을 찾는다면 그에게 무엇이라고 일러주어야 하겠어요? 그러므로 그가 깨달아야 할 일은, 오직 제 자신이 영겁 전에서부터 일찍이 '그 자리'를 여읜 적이 없고, 앞으로도 결코 '그 자리'를 여의는 일이 없을 것임을 깨닫는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각'을 이루는 '때'>인 겁니다. 아득한 '과거'에서부터 영원한 '미래'에 이르기까지, '온갖 때'가 바로 이 <'정각'을 이룬 '때'>를 여의지 않는 겁니다. 그리고 <법이 바로 본래 그렇다>고 하는 게 이 법문의 요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과거 현재 미래의 온갖 <시간의 본체>요, '깨달은 때'와 '깨닫지 못한 때', '성불한 때'와 '성불하지 못한 때'가 모두 이 '한 때'를 어기지 않습니다. '하나'가 통하면 곧 일체가 다 통해서, '시작'과 '끝'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원인'에서부터 '결과'에 이르기까지 결코 '시간'이 벌어지는 일이 없는 겁니다.

그러므로 이에 '정각'을 이루고 보면, 다만 '성품'에 맡겨서 '흐름'을 따를 뿐이요, 무슨 일이건 공력(功力)을 들여서 이루기를 애쓰는 일이 없는 겁니다. 여기서도 또 잘못 알아들을 소지가 많으니, 공연히 노파심이 발동해서 부연하지 않을 수 없군요. ― 지금처럼 매사에 열심히 공(功)을 들이고 땀을 흘리면서 노력하는, 이것이 바로 이대로인 채로 '하는 자'도 없고, '공력을 들이는 주체'도 없는 것이며, 이 모든 일이 다만 인연을 따르면서 감응하는 '진여법성'(眞如法性)의 응현(應現)일 뿐이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이렇게 말하는 겁니다. ― 요약컨대, '처음'과 '끝'이 다 '부처' 아님이 없는 거예요. 그러므로 제8지(第八地)에 이르러서 '무생법인'(無生法忍)을 증득하고 나서야 비로소 '무공용지'(無功用智)를 갖추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불과'(佛果)에 드는 것이 '한 찰나'를 넘기지 않으나, 다만 근성의 <미혹함과 깨달음>(迷悟)이 막힘으로써 '무량한 겁'(無量劫)을 설하게 된 것이니, <통틀어 '한 때'를 옮기지 않는 까닭에>, 곧 '범부의 자리'에서부터 처음 '견도하는 지위'(見道位)에 이르기까지 인·과(因果)가 '한 때'(一時)라, 도무지 전후(前後)가 없느니라.

따라서 <성불하지 못하는 때>를 보지 못하고, <'정각'을 이루는 때>도 보지 못하며, <'번뇌'를 끊은 때>도 보지 못하고, <'보리'(菩提)를 증득하는 때>도 보지 못하나니, 필경 조그마한 생각도 옮기지 않으면서 50위(位)를 원만히 수습하여 '일체종지'(一切種智)를 모두 성취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 전체와 부분, 같음과 다름, 이루어짐과 허물어짐)가 일시(一時)에 모두 자재하여> 이 모두가 '세간의 범정'(世情)으로 볼 바가 아니기 때문에, 따라서 믿기가 어려운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현재의 우리들의 '마음'은 과연 그 속내가 어떨까요? 감찰(監察)을 하자는 게 아닙니다. 범부와 성인이 한 자리요, 깨달음과 미혹함이 그 본성에서 결코 다르지 않다는 걸 알아낸 마당이니, 이제부턴 '제 마음'을 살피는 일에도 뭔가 보다 성숙되고 침착한 면이 있어야 마땅하지 않겠느냐 하는 말입니다. ― 마음에 마땅한 건 취하고, 마땅치 않은 것을 제하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 그런 마음이 아니라, 그저 담담히 <있는 그대로의 것>을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살펴보자는 겁니다.

여기서도 또 하나 꼭 주의해야 할 점은, 이 자리에는 '살피는 자'로서의 <'나'의 목적의식> 같은 게 전혀 끼여들어선 안 된다는 겁니다. 다시 말해서 그 자리에는 '관찰의 주체'인 '나'가 있어서, 저만큼 떨어져 있는 '관찰대상'인 '마음'을 살펴보는, 그런 메커니즘이 아니라, 다만 '마음'이 스스로를 '자각'하는 겁니다. 이 '자각'이라는 말도 세간에서의 사전적 의미의 '자각'이 아닙니다. 마치 불이 켜져 있는 촛불을 밝히기 위해 또 다른 촛불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경우와 같습니다. 이 촛불은 다른 것도 다 비추지만, 동시에 자기 자신도 비추어 내는 게 아니겠어요? 이것이 바로 회광반조(廻光返照)의 요체입니다. 요령만 알면 이것처럼 쉬운 일이 없는데, 워낙 그 마음이 밖으로만 내닫던 버릇이기 때문에 "빛을 돌이키라"는 말을 들으면, 고개를 뒤로 돌리라는 것으로 알아듣고는, 공연히 뒤쪽을 힐끔거리는 거예요. 이제 일도양단(一刀兩斷)할 때가 왔습니다. ― 그 '본래 마음'은 일찍이 밖으로 내달았던 일도 없고, 따라서 지금에 새삼스럽게 돌이킬 '마음'도 없는 겁니다. 텅 트인 허공에 무슨 '향하고' '돌이키고' 할 일이 있겠습니까?



동안 선사(同安禪師)의 게송을 한번 더 인용해야 되겠군요.

'얇은 그물'을 벗어난 잉어는
여전히 물 속에 머물고,
길 머리를 돌린 '돌 말'(石馬)이라야
비로소 얇은 비단 그물을 벗어나리라.



우리들의 마음은 항상 온갖 잡동사니로 가득 차 있습니다. 지금은 또 그 모든 잡된 생각들을 어떻게 하면 말끔히 쓸어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까지 가세해서 더욱 어지러운 상태구요. 온갖 것의 '있고 없음'을 비롯해서 '물들고 깨끗함', '옳고 그름', '좋고 싫음' 등이 서로 얼키설키 뒤엉켜서 잠시도 조용할 때가 없는 게 범부의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으로는 결코 '참된 견해'를 기대할 수가 없지요. 이런 마음가짐으로는 아무리 훌륭한 법문을 들어도 그것을 모두 자기의 속(俗)된 바람을 이룰 수 있는 알맞은 방편쯤으로 알아듣고 멋대로 지견을 굴리기가 십상입니다. 그리고는 그 마음이 '깨달음의 경지'니, '성인의 지혜'니, '서방정토'(西方淨土)니 하는 것들에 단단히 체(滯)해 버려서, 끝내 자기의 청정한 자성불(自性佛)을 등지고는 돌이킬 줄 모르는 겁니다. 그 마음이 늘 이렇게 밖으로만 내달으니, 어느 세월에 '마음'을 밝힐 수 있겠어요?

<'불법'(佛法)은 결코 '범정의 헤아림'(情解)으로는 미치지 못합니다>. 설사 범정(凡情)으로 정교하게 헤아려 아는 자가 있다 하더라도, 그 '의식'의 유한성과 분별성 때문에 끝내 '의심의 그물'(疑網)이 완전히 없어지진 않습니다. 이런 현상은 영리한 사람일수록 더욱 심합니다. 그들은 뭐든지 듣기 무섭게 척척 다 알아버립니다. ― 사람이 '뭔가'를 이해할 때, 사실은 '그것'을 직접 이해하는 게 아니라, 과거의 기억 가운데서 '그것'과 비슷한 걸 찾아내서는 그것을 머리에 떠올려서, 그것을 보는 겁니다. 그러니까 목전의 그것을 직접 보는 게 아니고, 묵은 기억 속의 한 토막을 되살리는 걸 가지고, 「'그것'을 이해했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 때, 기억 속에 '그것'과 비슷한 걸 찾다가 찾지 못하면, 「'그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고 말하는 거구요. 마치 소경이 코끼리의 배를 만져 보고는 「코끼리는 마치 평평한 바람벽과 같다」고 말하는 것과 같지요. 그러다가 눈을 떠서, 코끼리 전체를 보고 나서야 자기가 알았던 게 얼마나 허망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되는 거죠. 그러므로 사람이 분별지(分別智)로써 뭔가를 이해한다는 게 ― 그것을 알건 모르건 간에 ― 얼마나 허망한 짓인가를 분명히 이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한편 이와 같은 인식작용의 허점을 알아차린 사람은, 이번엔 헤아리고 짐작하고 하는 대신, 반대로 그 알음알이를 억눌러서 끊어버리려고 하던가, 회피하려고 하던가 하면서, 더욱더 <마음을 일으키고 생각을 움직이면서> 조작하는 일에만 골몰하는 거예요. 그러면서도 자신이 '올바른 수행'을 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거죠. 그리고 그들은 기껏해야 '성인의 말씀'만을 철석같이 믿기 때문에, ― 믿는 게 많으면 많을수록 그 마음은 더욱 경직되고, 가소성을 잃고 만다는 사실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이 <'일승'의 도리>는, 이 '몸'과 '마음'을 갈고 닦는 것으로는 결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다만 오직 오래도록 '무심 무념'(無心 無念)에 있어서, 마침내 '괴로움'도 싫어하지 않게 되고, 또 '고요함'을 좋아하거나 '고요함'에 체(滯)하는 일도 없는 사람과, 또한 인위적인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것이 아닌, '참된 열반'을 얻은 사람만이 갈 수 있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저절로 조작이 몰록 쉰 게 바로 이 '일승의 도리'예요. '즐거움'과 '괴로움'이 가지런하고,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평등하니, 다시 더 무엇을 조작할 일이 있겠어요?

다시 말해서, 이 세간법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모두 '번뇌'이고, 출세간법(出世間法)은 '번뇌를 몽땅 끊어버린 자리'인데, 그런데 이 '세간'과 '출세간'을 몽땅 벗어나기를 기하는 저 삼승(三乘)들, 즉 '번뇌 있음'과 '번뇌 없음'의 양변을 몰록 넘어서기로 작정한 '삼승의 보살'들은 그 기세가 지나쳐서, <함이 없고 번뇌 없는>(無爲無漏) 자리에 치우쳐 버리는 걸 볼 수 있습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속박'이나 '번뇌'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그것의 '원인'이라고 여겨지는 것을 찾아내서는 그것을 뿌리째 끊어버림으로써, 즉 발본색원(拔本塞源)해서, 다시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게 됨으로써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여깁니다. ― 곧 그들은 인연법의 '남(生)이 없는 도리'를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처'의 <지음 없는 근본지혜>(無作根本智)에 의지하는 이 '일승의 길'은 <'함이 있음'(有爲)과 '함이 없음'(無爲)이 둘이 아닌 경지에서의 '번뇌 없음'(無漏)>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또한 범부의 살림살이는 모두 <세간법을 따르는 행위뿐>이고, 삼승의 그것은 오직 <세간법을 여의는 행위뿐>인데 비해서, 이 '일승의 길'은 <'세간'도 아니고 '출세간'도 아닌 것입니다>. 즉 능히 이 '세간'을 따르면서 두루 행하나, 전혀 끄달리거나 물드는 일이 없는, 이른바 '보현행'(普賢行)을 갖추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삼계'(三界), 즉 '탐욕이 치성한 세계'(欲界)와 '미묘한 형색(形色)의 세계'(色界)와 '순수히 정신만의 세계'(無色界) 등은 이것이 모두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思議法)이며, 또한 '삼승', 즉 성문(聲聞)이나 연각(緣覺)이나 보살법(菩薩法) 등도 역시 <생각으로 헤아릴 수 있는 법>입니다. 왜냐하면 이것들이 다 <얻을 바가 있는 법>(有所得法)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일승의 지혜 경계'는 이것이 <생각으로 헤아릴 수 없는 법>(不思議法)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얻을 바 없는 법>(無所得法)이기 때문입니다.



즉 '고요함과 작용'(寂用)이 둘이 아닌, 크게 자재(自在)한 경지이니, 무엇을 특별히 얻을 바가 있겠어요?
이 세상의 모든 경우는, 그것이 삼계(三界)의 중생이건, 이승(二乘)이나 정토보살(淨土菩薩)이건, 이것이 다 <과보가 있는 모습>(有報相)인데 비해서, 오직 이 '일승의 불과(佛果)'만은 이미 '물들고 깨끗한 마음'(染淨心)이 소멸되었기 때문에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다만 중생들이 즐겨하고 원하는 바를 따르면서 사물의 모습을 나투어 보이기를, 마치 저 둥글고 맑은 거울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이것 저것 가리지 않고 비추는 것과 같습니다.

모름지기 '부처 지혜'는 모든 중생과 더불어 '한 마음'을 같이 하면서, 전적으로 그 '마음'이 보는 바에 맡기는 것이니, 곧 '깨달은 사람'은 '법'이 본래 이와 같아서 그 작용이 가고 옴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경에 이르기를,···

무릇 진실한 법은 '제 모양'을 버리고 '다른 모양'을 취하지 않는다. 만약 <'정각' 아닌 것>(不覺)을 버리고 <평등한 바른 깨달음>(等正覺)을 이룬다면 이것은 <진실한 깨달음>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이젠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모든 중생은 <지금 있는 이대로>가 모두 '깨달음의 자리'(覺位)에 있는 것입니다. 결코 '불각'(不覺)을 버리고 '정각'(正覺)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즉 '하나의 깨달음'이 '모든 깨달음'이어서, 항상 '정각'을 이루었고, '불각'일 때가 없는 겁니다.

마치 '허공'이 맑고 고요해서 이루어지거나 허물어지는 일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만약 '이루어짐'과 '이루어지지 않음'에 집착한다면 이것은 곧 망정(妄情)으로 일으키는 소견이니, 만약 '지혜'로써 비춘다면 어디를 간들 진실하지 않은 게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생각생각마다 항상 '법신'(法身)을 보고, 티끌티끌마다 늘 '불국토'를 이룰 것입니다.



조주(趙州)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학인(學人)이 처음으로 총림(叢林)에 들어왔으니, 스님께서 지시(指示)해 주십시오.』 하니, 선사가 말하기를, ···
『죽(粥)을 먹었는가?』
『먹었습니다.』
『발우(鉢盂)를 씻어라.』 하자, 중이 이에 활짝 깨달았다고 합니다.



혜림 선사(慧林禪師)가 이 화두를 들고(拈) 다음과 같이 송했습니다.

죽 먹은 뒤에 발우를 씻으라 하니
초심(初心)들은 가끔가끔 거칠어지네.
아무리 이 말의 뜻을 분명히 안다 하여도
한 평생 졸장부를 면치 못하리라.




불안원(佛眼遠)이 상당하여 이 이야기를 들고는 말하기를,···

『조주가 "발우를 씻어라"고 한 말에 그 중이 활연(豁然)히 '돌아갈 곳'을 알았고, 조과(鳥 )가 베올을 불어 날리자 시자(侍者)가 그 자리에서 단박 깨달았다고 하니, 이것은 '그것'("발우를 씻어라"고 한 말이나, 베올을 불어버린 일들)들에 의해서 밝혀낸 것인가? 아니면 '자기의 견해'를 토로한 것인가?

이것은 '그것'들에 의해서 밝혀낸 것도 아니고, '자기의 견해'를 드러낸 것도 아니니라. 알겠는가? '본래 있는 성품'을 어찌하여 알지 못하는가?』 했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