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행복을 좇는 자는 행복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2. 선지식(善知識)은 가르칠 게 없는 사람이다
3. '깨달음'의 앞뒤가 한결같은 게 '바른 깨달음'이다
4. 일승의 불과(佛果)는 '과보'(果報)를 의지하지 않는다
5. '닦는 자'도 '게으른 자'도 모두 깨치지 못한다
6. 자기의 무명(無明)이 본래 '부처'이다
 
 
 
     
   

'법성'(法性)은 본래 생멸이 없고, '법상'(法相)도 이렇게 앞뒤가 말쑥하게 끊어져서 전혀 가고 오고 하는 자취가 없다면, 이것은 <성·상이 함께 항상 머무른다>(性相常住)는 도리가 아니겠어요? 문자 그대로 이 '몸'이건 '마음'이건 일체가 생하고 멸하고 하는 일이 없고, 가고 오고 하는 일도 없는, 이것이 바로 '참 부처'(眞佛)의 항상하고 여여(如如)한 모습입니다. 지금 이 자리의 여러분이 바로 그렇다는 말입니다. 일체의 변화하고 옮기고 하는 형상(形相)은 모두가 인연을 따르면서, 마치 거울에 나타난 '빛의 얼룩'과도 같은 것이어서, 실제로는 전혀 왕래하는 자취가 없는 것들이고, 또한 신령스러운 '진여법성'(眞如法性)은 스스로는 조금도 변하고 옮기고 한 적이 없으면서, 다만 인연에 감응해서 만법을 두루 나투는, 이것이 곧 '참 부처'인 겁니다. 그런데 이 세상의 일체만유가 모두 이 '진여법성'의 나툼이 아닌 게 없고, 그렇다면 이 자리에 이렇게 앉아 있는 여러분이 어찌 '부처'가 아니겠어요? 문자 그대로 뭇 생령(生靈)과, 그것들의 온갖 생명활동, 그것이 '존재'이건 '일어나는 일'이건 간에, 어느 것 하나 빠뜨림이 없이 고스란히 '부처 몸'의 천백억 분신이 아닌 것이 없는 겁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몰록 깨닫는 게 바로 '참된 깨달음'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 경지에서 누가 '깨달은 사람'이며, 무엇이 '깨달은 바'이겠어요? 이 온갖 게 모두, 털끝만한 한 법도 남김 없이 '불사'(佛事) 아닌 게 없고, '부처' 아닌 게 없는, 그야말로 통틀어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일 뿐인 겁니다. 따라서 일찍이 '부처' 아니었던 적이 없으니, 지금에 새삼스레 '부처' 되기를 바랄 게 뭐가 있겠어요? 본래 '부처'가 다시 무슨 '부처' 되기를 도모하겠느냐 말입니다.



어느 날 앙산(仰山)이 위산 선사에게 묻기를,···

『어떤 것이 '참 부처'가 사는 곳입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생각하는 것이 아닌', 이 묘한 이치로써 '신령스러운 불꽃'의 무궁한 자리를 돌이켜 생각하여, 마침내 생각이 다해서 '근원'으로 돌아가면, <'성품과 형상'이 항상 머물고>(性相常住), <이·사가 둘이 아니리니>(理事無二), 이것이 '참 부처'의 여여함이니라.』고 하니, 앙산이 이 말 끝에 문득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말을 듣고 나름대로의 지견을 말아내면서, 「'인과법'은 모두 빈 것이다」라거나 「'인과법'은 엄연히 행해지고 있다」느니 하면서 '있고 없음'과 '옳고 그름'을 놓고 계속 시비를 벌인다면, 이것은 마치 왼쪽 '토끼 뿔'과 오른쪽 '토끼 뿔'의 길고 짧음을 놓고 실랑이를 계속하고 있는 꼴이니, 어찌 우스운 일이 아니겠어요? 모든 시비가, 그 시비의 내용을 불문하고 다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모든 건 그저 지금 있는 이대로인 겁니다. 즉 '먼저'는 '먼저'이고, '지금'은 '지금'이고, '나중'은 '나중'이라고 하건, 또 한 생각 더 굴려서, 이 모두가 '동시'라고 하건, 이와 같은 말들이 다 '빈 말'일 뿐이라는 것이지, 이 중 어느 하나는 옳고, 다른 하나는 그르다는 말이 아닌 겁니다. 그러므로 종일토록 시비 가운데 있으면서도 결코 물드는 일이 없는, 이것이라야 진정으로 '시비를 벗어난' 좋은 솜씨라는 걸 알아야 합니다.



화엄경에 이르기를,···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始成正覺)고 하는 것은, 자기의 몸과 마음으로 <온갖 삼세고금(三世古今)의 법이 '한 생각' 가운데 있어서 '오래 된 것'이라거나 '얼마 되지 않은 것'이라거나 하는 '법'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지만, 그러나 '한 생각' 가운데 또한 일체중생의 <삼세(三世)와 멀고 가까운 겁(久近劫)을 분별하는 지혜와, 온갖 차별된 지견의 지혜를 허물지 않음>을 증득하는 것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지금까지 '구경의 깨달음'(究竟覺)을 얻기 위해 일구월심 노력하던 수행자가, 어느 날 문득 그 '유위행'의 허물을 깨닫고는, 당장에 '회심'(廻心) 해서, 모든 '배움'을 쉬고, 오직 본래 스스로 청정해서 전혀 털고 닦고 하기를 기다리지 않는 자기의 '본래 마음'을 깨치고 나면, '깨달음'을 이루기 위해 그동안 애썼던 모든 수고가 다 허망한 것이었음을 깨달으면서 당장에 영원히 쉬게 되는 겁니다. 고로 한 수행자가 <처음으로 '바른 깨달음'을 이루었다>(始成正覺)고 하는 <>(爾時)는, 그것이 바로,···

▷ <한 찰나, 한 생각 동안에> '법계' 전체를 몽땅 껴잡아서 남음이 없는, 이른바 '해인삼매문'(海印三昧門)에 들어서 일시(一時)에 몰록 도장을 찍고, '몸'과 '마음'과 '음성'으로써 '불법'의 이치를 널리 연설하는 일과,

▷ 모든 '티끌 경계'(塵境) 중의 무수히 많은 유정 무정의 온갖 세계에서 널리 이 '정법'을 연설해서 퍼뜨리는(流布) 일과,···

▷ '구경의 열반'(究竟涅槃)에 드는 일 등,···

이 모든 일들이 <처음으로 '정각'을 이룬 그 '때'>와 모두 '한 때'(一時)요, '한 즈음'(一際)이며, 또한 '한 성품'(一性)을 어기지 않는 겁니다. 이 모두가 다 '법'이 본래 그렇기 때문입니다. '앞의 부처'와 '나중의 부처'가 고금(古今)이 늘 이와 같아서 모두가 '한 때'요, '한 성품'일 뿐인데, 다만 사람들의 지은 업(業)이 서로 다르기 때문에 모든 시간 공간적인 차별법이 지금처럼 이렇게 들쭉날쭉하게 <나타나 보이는>(示現) 것뿐입니다.



따라서 <'예와 이제'(古今)가 서로 사무치는 것>을 '처음'(始)이라 하고, <법이 본래 스스로 이와 같다는 사실에 잠잠히 계합(契合)하는 것>을 '이룸'(成)이라 하며, 이런 경지에 의지해서, <결코 마음의 조작이 아닌 것>을 '바름'(正)이라 하고, <'지혜'가 이와 같은 '진리'를 깨치는 것>을 이름해서 '깨달음'(覺)이라 하는 겁니다.



결코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그에 상응하는 훌륭한 과보를 얻는 것으로써 '깨달음'을 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특별히 얻어야 할 것도 없고 버려야 할 것도 없이 그저 근기(根機) 따라서 감당할 만큼 감당하면 그것이 바로 도(道)요, 달리 아무것도 없는 겁니다. 이렇게 말해 주어도, 이 말 가운데서 어떻게든 뭔가 그럴싸한 규범을 만들어내서는 이것을 짊어지고 다니는 게 바로 범부의 업보(業報)니, 참으로 어찌해 볼 도리가 없습니다.



어느 날 흥화 선사(興化禪師)에게 어떤 중이 묻기를,···

『다자탑(多子塔) 앞에서 두 분이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하니, 선사가 대답하기를, ···
한 사람이 '거짓'을 전하니, 만인이 '진실'을 전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다자탑' 앞 ··· 」 한 것은, 부처님이 일찍이 다자탑 앞에서 가섭(迦葉)을 만나서는 '반 자리'(半座)를 내주어 앉게 했다는 경전의 말씀을 두고(拈) 한 말입니다. 세존은 평소에 한결같이 「나는 한 법도 그대들에게 일러준 말이 없느니라」라고 하셨으며, 심지어는 「여래가 '법'을 설했다고 말하는 자는 여래를 비방하는 자니라」라고까지 단단히 다짐을 두셨는데도, '불법'(佛法)에 관해서 지금 얼마나 많은 '지견'들이 횡행하고 있습니까? 결국 '할 말'도 없고, '한 말'도 없다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했던 말이 새끼에 새끼를 쳐서 "이러히 내가 들었노라"(如是我聞)를 빌미 삼아서 마구 보(堡)가 터지듯이 흘러 넘치고 있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