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법이 다만 의식에 의해 지어진 것일 뿐, 실제(實際)란 없다.
  2. 법문(法門) :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는 이 말 자체가 또 하나의 법이다.
  3. 공안(公案) : 법(法)이란 바로 중생의 마음을 가리키는 것이다.
  4. 게송(揭頌) : 무명이 본래 석가의 몸이거늘·······
 
     
   
     
   

흔히 본래의 마음자리를 얘기하면서 부동지(不動地)라는 말을 자주 쓰는데, 그것은 말 그대로 움직임이 없이 여여한 본체 자리를 말하는 거요. 그런데 왜 유독 그렇게 움직임 없음을 강조하는가? · · · · · · 모든 사람들이 한결같이 산하대지 삼라만상의 변화하는 움직임만을 보기 때문이오. 지금 이 순간에도 여러분 면전에서 생주이멸(生住異滅), 생로병사(生老病死), 성주괴공(成住壞空)이 번성하게 일어나고 있지 않소?  


모든 사람들이 변화변천에만 온통 정신을 빼앗겨 있기 때문에 하는 수없이 움직임 없음을 강조하지만, 그 마음은 사실 움직임이라든가 움직임이 아니라든가 하는 그런 인간의 규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거요. 그 마음은 움직임에 속하는 것도 아니고, 고요함에 속하는 것도 아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참 마음에 대해, 그 마음의 성질이 어떻고, 모양이 어떻고, 작용이 어떻고 하며, 마음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얘기하는 것은 전혀 쓸데없는 짓이오. 그건 마치 허공을 만져봤더니 이러저러 하더라는 얘기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오.  




마음공부를 하기 위해, 아주 당연하게, 마음에 대해 궁리하고 연구를 한다는데, 사실 그 말은 전혀 어불성설이오. 마음은 수행자의 탐구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또한 증득의 대상도 될 수 없소. 마음에 대해 알아보고자 하는 그 생각도 역시 같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 아니겠소? 결국 마음이 마음을 알아본다는 것인데, 그것은 마치 제 눈으로 다시 제 눈을 보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은 거요. 알아야 할 마음과 아는 마음이 본래 한 뿌리이기 때문에 마음이 마음을 알아본다는 이치는 성립될 수가 없는 거요. 물이 물을 알 수 없고, 불이 불을 알 수 없고, 허공이 허공을 알 수 없듯이, 본래 근본이 한 법이기 때문에 서로 안다는 일 자체가 불가능한 거요.  


그러니 마음은 마음을 가지고 알 수가 없는 거요. 그 마음이 아직 미혹하고 어리석어서 그런 게 아니고, 구조적으로 본래 불가능한 거요. 마음으로써 마음을 알려고 하는 것은 단지 인간의 미망 때문에 그런 것이니, 그래서 마음으로써 마음을 구하지 말라는 말을 하는 거요.  




세간에서 법대로 하자란 말을 흔히들 쓰는데, 그 법이 육법전서(六法全書) 상의 법이건, 사회 구성원들 간에 당연히 지켜야할 암묵적인 도덕률이건 간에, 마음으로 말미암지 않고 존재하는 법은 없소. 그런데 우리는 그 법이 인간의 존재 이전부터 절대한 진리로서 이미 존재한다고 여기고 있소. 그리고 그런 것들을 일컬어 진리라는 이름을 붙이고는, 진리탐구라는 거창한 작업까지 하고 있는 거요. · · · · · · 그렇지 않소. 그것이 진리가 됐건 뭐가 됐건 그 모든 일체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다만 생각으로 지어낸 것뿐이오.


지금 여러분이 저 근저로부터의 근본적인 변혁을 이루지 못하는 이유는, 말로만 만법이 유식이라고 할 뿐, 그 사실이 절절히 와 닿지 않기 때문이오. 온갖 삼라만상 일체만법이 한 마음으로 거두어들여지지 않는 거요.  


지금 저 우뚝 솟은 관악산이 참으로 자기가 마음으로 지은 것임이 사실로서 여겨지시오? · · · · · · 그렇지 않지 않소? 그동안 들은 바가 있으니 말로는 제가 지은 거라 할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내가 짓기 이전에도 관악산은 저기 저렇게 계속 있어 왔다고 철썩 같이 믿고 있질 않소? 그렇다면 불자(佛子)를 자처하는 사람으로서 최소한 부처님이 왜 만법이 유식이라고 말씀하셨는가에 대해 그 뜻이 완전히 소화가 될 때까지 참구에 참구를 거듭해야 하지 않겠소? 늘 하던 방식대로 대충 적당한 선에서 그렇다 카더라라는 식으로 넘어가기 때문에 그 공부가 늘 제자리를 맴도는 거요.  




심지어 자연과학까지도 마음에 의해서 지어진 거요. 만법이라고 하면, 우리가 보고 듣고 생각할 수 있는 모든 법을 몽땅 일컫는 거요. 여기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소. 물리학이든, 정신분석학이든 그 분석이 의미를 가지려면, 분석자(分析者)와 분석대상이 전혀 다른 별개의 것이라야 분석이 가능하오. 그러나 앞서도 얘기했듯이, 우주 삼라만상이 오직 하나의 참된 법계일 뿐이라면, 모든 분석은 전혀 망령된 거요. 더군다나 마음으로 마음을 분석한다? · · · · · · 칼이 제 스스로의 몸을 베겠다는 소리와 같은 거요.


분석하는 사람과 분석대상이 본래 둘이 아님에도, 인간은 으레 분석자와 분석대상을 전혀 별개의 것으로 간주하고는, ‘객관적이라는 말까지 붙여서 분석자의 주관이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고 여기는 착각을 하고 있는 거요. 하지만 분석자와 분석대상이 전혀 별개의 것이 아닌 한 바탕이라면, 그 분석결과는 그게 아무리 정교하고 훌륭하더라도 잠꼬대와 전혀 다르지 않은 거요. 한 마디로 난센스요.  




20세기 초반, 많은 물리학자들이 빛의 성질에 대해 연구한 결과, 빛은 어떤 실험방법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두 개의 성질, 즉 입자(粒子)의 성질과 파동(波動)의 성질, 모두를 띤다는 사실을 밝혀냈소. 즉 관찰자가 입자로 보이는 실험방법을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파동으로 보이는 실험방법을 선택할 것인가에 따라 빛의 성질이 정해진다는 뜻이오. 결국 실험방법을 선택하는 인간의 뜻대로 각기 상반된 성질로 보이게 된다는 소리요. 이 얘긴 결국, 빛은 자신만의 고유의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이 아니고, 관찰자와 빛과의 상호작용 사이에서 그 성질이 정해진다는 뜻이오.  


이렇듯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전혀 별개가 아니기 때문에 그 관찰의 결과는 어떠한 절대적 의미도 없다는 사실이 20세기 초엽에 최첨단 물리학을 연구하는 과학자들에 의해 순전히 과학적 방법을 통해 증명된 거요. 특정 종교의 교리나 추상적인 철학의 이론을 들이댄 것이 아니고 순전히 과학적인 방법으로 말이오. 이제 모든 시간적 공간적 측정은 더 이상 절대적인 의미가 없어져 버린 거요. 결국 2500년 전에 붓다가 이미 설파한 내용을 다시 백여 년 전에 물리학자들이 과학적으로 증명을 해 마쳤다 소리요.  




진리를 탐구한다는 것은 진리라는, 내 바깥에 존재하는 어떠한 대상을 연구하겠다는 건데, 바로 위에 언급한 사실에서 유추한다면, 그것은 결국 스스로를 탐구한다는 소리와 같은 거요. ‘너 자신을 알라는 말도 있지만, 진리를 탐구해야겠다고 마음을 내는 그 한 생각, 그 마음이 어디서 나오는가를 차분한 마음으로 깊이 참구해 보시오. 그리하다 보면 차츰차츰 그 마음 가운데에 일체 만법이 모두 갈무리 되어있다는 걸 알게 될 거요.  




흔히 공부가 안 된다고 푸념하는 사람들이 많소. 그런데 그 안 된다는 소리는 자신이 튕겨놓은 먹줄 위를 고대로 따라 걸어야 하는데, 그게 자꾸 뒤뚱거려서 도무지 먹줄대로 걸을 수가 없다는 뜻이오. · · · · · · 먹줄을 안 튕겨놨으면 휘청거리며 헛다리짚을 일은 없소. 가야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는 사람만이 길을 잃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 가야할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길을 잃는 경우가 없소. 매 순간 발길이 닿는 그 자리가 목적지요.  


마음공부는 이러저러 해야 하고, 깨달음에 대한 원대한 뜻이 어떻고, 인생의 보람이 어떻고, 신성(神性)이 어떻고 불성(佛性)이 어떻고 하면, 그 삶은 그만큼 피곤하고 늘 허둥대며 쫓기다가 마침내 아득히 길을 잃어버리는 거요. 진리는 어떠어떠하다고 거창하게 정해놓고는 제 스스로 그 앞에서 오금을 못 펴고 짓눌려 허우적거리는 거요.  


만법(萬法)이 유식(唯識)이라는 이 말 자체가 또 하나의 법이오. 이 말도 역시 마음에 의해 지어진 숱한 법들 중의 하나에 불과한 거요. 그걸 모르고, 만법이 유식이라고 지어놓은 그 법이 마치 마음의 실상을 몽땅 드러낸 절대적인 명제인 냥, 이 말을 지키려고 또 끙끙 애를 쓰는 게 바로 미혹이오. 그건 마치 이래야 옳고 저러면 그르고 하는 따위의 법규를 따르는 것과 전혀 다른 것이 아니니, 그것은 또 하나의 분쟁요소를 더할 뿐이오.  


만법이 유식이라는, 거의 완벽한 이 진리의 말씀도 듣는 사람이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따라 참되고 참되지 않은 게 좌우되는 것이지, 그 말 자체는 진리도 아니고, 진리 아닌 것도 아니요. 이놈이 한 번 굴러야 참되다, 참되지 않다가 지어지는 거요. · · · · · · 그 짓기 이전, 말도 뜻도 개념도 생기기 그 이전의 마음, 그것이 정의(正義)’. 그 정의를 등지고, 숱하게 주워듣고 주워읽고 별로 신통치도 않은 머리를 내내 굴려가며 얻어낸 것이 바로 여러분 앞에 펼쳐진 우주 삼라만상이오.  


만법이 유식이라는 말까지 포함해서,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라는 말까지 포함해서, 그 보다 더 대단한 그 어떤 진리의 말씀도 전부 그렇게 해서 지어진 거요.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고, 일체 만법이 제 성품이 없고, 그래서 작용의 주체가 없고 하는 등등의 말들이 몽땅 여러분 마음에 비추어진 만법중의 몇몇 법인 거요.  




여러분이 고요하고 청정한 마음을 얻기 위해 애써 노력한다면 그것은 오히려 그 마음을 더욱 더 수고롭게 할 뿐이오. 마음을 밝히기 위한 노력, 마음을 맑히기 위한 노력, 마음을 고요하게 하기 위한 노력, 그 모든 노력은 마음을 더욱 더 산란하고 더욱 더 어지럽고, 더욱 더 혼란스럽게 할 뿐이요. · · · · · · 그게 뭐가 됐든, ‘하면틀려요!  


그저 일체 만법이 제 성품이 없어서, 그 어떠한 법도 얻을 법도 없고, 덜어내 버릴 법도 없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사무침으로써, 배울 것 없고 닦을 것 없는 자리에 이르면 본래 마음은 저절로 드러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