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끝내 실제(實際)란 없는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라.
  2. 법문(法門) :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 하는 것은 올바른 청법(聽法)이 아니다.
  3. 공안(公案) : '정한 법'도 '정해지지 않은 법'도 없도다.
  4. 게송(揭頌) : 마음 밖에 불성(佛性)이 따로 없다.
 
     
   
     
   

법문을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이 하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한다. · · · · · · 만약 법문을 듣고, 그 법문을 통해 알아들은 바가 있어서, 그 들은 바 말을 다시 반연(攀緣)하여 분별을 일으키며 알음알이를 말아낸다면, 그 사람은 법문도 들을 줄 모른다는 말을 면키 어렵다. 그런 식으로 법문을 듣는다면 그 들음도 역시 반연일 뿐이요, 결국 그것은 또 다시 허망한 한 토막 지견을 쌓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기존의 지견을 털어내고 비워도 모자랄 판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계속 새로운 지견들이 견고하게 쌓여만 간다면 어느 세월에 성품을 밝힐 수 있겠는가?


모름지기 모든 설법의 요지는 '끝내 실제란 없는 것이므로 집착하지 말라'는 말로 요약될 수 있다. 그래서 '어떻게 알아들어도 잘못 알아들었다'는 말도 있는 것이다. 진실이 이럴진대 듣는 족족 그 들은 바를 나의 지식, 나의 지견으로 챙겨 간직한다면 그 사람은 차라리 아무것도 안 들음만 못 하지 않겠는가?


일찍이 마음에 능·소(能所)의 자취가 없어야 정각(正覺)이라 했으니, 법문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所覺)가 있다면 거기엔 틀림없이 '깨달은 자'(能覺)가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깨달음은 결코 바른 깨달음이 아님이 분명하다. 따라서 마음을 잘 조복(調伏)하여 번뇌도 없고 탐욕도 없어서 무애자재한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여전히 졸장부 소리를 면하기 어려운 것이다. 결국 눈과 귀 등 육근(六根)에서 빛깔과 소리 등의 육진(六塵)이 흘러 새지 않게 되어야 비로소 올바로 법문을 들을 줄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經)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참으로 법문을 들을 수 있는 자리가 어떠한 것인가를 깊이 숙독해 보아야할 것이다.


『참된 이치(眞諦)는 그 성품이 공(空)의 본체이지만, 공하면서도 공하지 않고, 세속의 이치(俗諦)는 환(幻)으로 존재하는 현상이므로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지 않는 존재인지라, 존재는 공(空)을 장애하지 않고, 공하지 않은 공인지라, 공은 존재를 단절시키지 않는다.


만약 마음으로 한 법이라도 존재한다고 작정하면 곧 상견(常見)에 떨어지고, 만약 '마음 밖에는 한 법도 없다'고 집착하면 곧, 단견(斷見)에 떨어지리니, 이와 같은 지견들이 모두 소견의 그물을 이룰 뿐이요, (이와 같은 지견을 버리지 않는 한) 결코 뚜렷한 대원경(大圓鏡)에 들지 못하리라.』




또한 이르기를 · · · · · ·


『'있다 없다' 함은 '있다 없다'의 두 이름만 나누어졌을 뿐이요, 성품은 원래 하나여서 '있음'으로써 '있음'을 삼거나, '없음'으로써 '없음'을 삼을 수는 없는 것이다.


이것은 형상이 없는 앎이라, 목석처럼 앎이 없으면서 비춤을 잃은 것이 아니며, 신령하게 아는 성품이라, 비록 이름과 형상이 없더라도 고요히 비추면서 빠뜨림이 없다. 형상 없음을 비추되 비추는 공을 잃지 않고, 변동을 보되 무상(無相)의 뜻에 어긋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있음'을 짓되 '없음'과 다르지 않고, '없음'을 짓되 '있음'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일찍이 '있지 않은 일'도 없었고, 일찍이 '없지 않은 일'도 없었다. 그러므로 동요하지 않고 평등하게 깨달으면서 모든 법을 건립한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