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물리적 심리적 온갖 현상은 모두 평등하여 한 모양이다.
  2. 법문(法門) : 만법은 다만 한바탕 위에 찍힌 여러 모습일 뿐, 상대(相對)가 있을 수 없다.
  3. 공안(公案) : 보살은 여래의 온갖 공덕과 온갖 법을 모두 보지 않는다.
  4. 게송(揭頌) : 무명(無明)이 곧 부처라 ······
 
     
   
     
   

흔히 법문을 세속의 강의나 강연 듣듯이 듣지 말라는 말을 한다. · · · · · · 우리가 무언가를 인식하는 방식은 항상 이분법적인 틀 안에서 취사선택하는 구조이다. 이것인가 저것인가, 옳은가 그른가, 좋은가 나쁜가 등등, 항상 두 가지 법 가운데에서 선택을 강요받거나, 심지어 스스로도 선택을 해야 편안함을 느낀다. 이것인지 저것인지 확실치 않고 어중간 한 것은 뭔가 불안하고 믿음이 가지 않는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 구조의 한계이기도 하다. 늘 대립적인 두 개념을 양립시켜 그중 하나를 취사선택하는 구조, 그것이 인간이 뭔가를 알아듣는 구조이다.


온통 한 바탕인 참 성품을 등지고, 그렇게 늘 둘로 쪼개서 보는 버릇을 경책하기 위해 간택하지 말라는 말을 들으면,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아, 간택하면 틀리고, 간택하지 않아야 옳으니, 이제부터 간택하지 말아야겠다'는 것 아닌가? · · · · · ·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간택 있음'과 '간택 없음' 중에서 또 다른 간택을 하고야 마는 미혹한 중생에게 만법이 모두 비어 한 바탕이라는 제법실상을 설하기란 지난(至難)하기 이를 데 없는 일인 것이다.


「지극한 도는 어려움이 없나니, 다만 간택(揀擇)함을 꺼릴 뿐이노라」라는 게송을 듣고 뭔가 알아들은 바가 있다면, 그것은 이미 확실하게 간택하여 한쪽에 들러붙어 버렸다는 증거이다. · · · · · · 제대로 된 수행자라면, 간택 있음이나 간택 없음이나, 참이나 허망이나, 기타 그와 같은 모든 대립적으로 보이는 상대개념은 모두가 손의 양면과 같이 서로를 떠나서는 존재할 수 없는, 하나도 아니지만 둘도 아닌, 모두 한 마음에서 나툰 같은 바탕의 이런 모습 저런 모습일 뿐, 그것은 대립도 대립 아님도 아님을 깨달아야 한다.




결국 요는, 만법이 다만 마음뿐임을 알아서, 일체가 오직 그 참된 하나를 벗어나지 않음을 알아야 한다. 만법이 그저 빈 이름 뿐이요, 실체가 아니라는 사실을 꿰뚫어 본다면, 이미 그 자리엔 도무지 상대할 것이 없으니 서로 마주 보고, 알아보고, 도달하는 일이란 없다. 오직 적멸(寂滅)한 하나의 법계일 뿐, 이 세상이 본래 그러한 것이다.


보는 자도 보는 바도 실체가 없는 것임을 분명히 알아서, 결코 보고 듣는 가운데 헛되이 사량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그저 있는 그대로 볼 수 있겠는가가 관건인 것이다. 이것은 어떤 결과를 바라고 유위행을 일삼는 세속의 일반적인 수행을 이르는 말이 아니다. · · · · · ·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은 모든 것을 수용하라 소리가 아니다. 수용하지도 말고 배제하지도 않는, 모든 이분법적인 대립이 다한 자리를 말하는 것이다. 만법이 인연생기(因緣生起)라 성품이 전부 비어서, 모든 이름이 있고, 형상이 있고, 뜻이 있는 삼라만상이 몽땅 실체가 없는 환상이라면 도무지 대립적인 상대개념이란 말이야말로 참으로 빈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옛 고인(古人)이 말하기를, · · · · · ·


『그러므로 마땅히 알라! 미혹과 깨달음은 이것이 하나의 길이요, 어리석음과 지혜는 따로가 아니다. 본래 이름이 없는데서 이름을 붙이면 그 이름으로 말미암아 시비가 생기고, 이치가 없는데서 이치를 만들면 그 이치로 말미암아 다툼이 일어난다.


요술로 된 것은 진실이 아니니, 어느 것이 옳고 어느 것이 그르겠으며, 허망은 진실이 아니거늘, 무엇이 존재고 무엇이 공이겠는가. 그러므로 얻어도 얻은 바가 없고, 잃어도 잃은 바가 없음을 알리라. 고로 '한 마음'을 분명히 알면 만법이 다 고요해진다.』




문수사리(文殊舍利)가 부처님께 아뢰기를, · · · · · ·


『세존이시여! 만약 '여래가 보리수 아래에 앉으셨다'고 말한다면 여래에게는 두 가지 모양(二相)이 있게 되나니, 첫째는 여래요, 둘째는 보리수입니다. 그러나 여래는 이미 두 가지 모양을 여의셨습니다.』라고 했다. 붓다가 이에 대답하시기를,· · · · · ·


『선남자여, 보리와 중생과 온갖 법성은 본래 차별이 없어서, 한 맛이요, 한 성품이므로, 따라서 여래가 보리수 아래에 앉아서도 이와 같은 법으로 보나니, 때문에 보리를 체득하였다고 하느니라. 나는 도무지 보리를 떠나서는 그밖에 따로 있는 단 하나의 법도 보지 않으며, 나아가서 온갖 법이 모두 평등함을 보면서도, 이 평등은 어떠한 수(數, 槪念化된 範疇)에도 들지 않나니, 그러므로 평등을 일러서 걸림 없음이라 하느니라.』라고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