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은 스스로를 베지 못하고, 손가락은 스스로를 만지지 못한다.
  2. 법문(法門) : 전일(全一)한 그 자리는 능·소(能所)가 나뉘기 이전이다.
  3. 공안(公案) :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4. 게송(揭頌) : ‘불법의 견해’나 ‘외도의 견해’가 모두 나쁘고...
 
     
   
     
   

 전일성(全一性)이라는 그 말이 갖는 참뜻을 이해해야 됩니다. 흔히들 전체가 본래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는다고 하는데, 그러면 반드시 깨닫는 자가 있고 깨닫는 바가 있어서 이원적으로 분리되는 겁니다. 전체가 하나인 것 같으면 뭐가 뭐를 알겠어요?· · · 이 이치가 중요한 겁니다. 능지(能知)와 소지(所知)가 분리된 인식작용이 계속되는 한, 전일성 그 자체가 체현되는 게 아니에요. 인식작용으로 어떻게 알았다 해도 아는 자와 아는 바가 분열돼 있으니 전일하지 않은 겁니다. 그래서 뭔가 알고 싶고 어떻게 되고 싶은 것이 있어서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한, 이 이원성이 해소되지 않습니다.

 원래 모든 것이 전일하지만 우리에게 제각각 분리된 실체로 보이는 것은 우리가 지금 구사하고 있는 인식기능 자체가 잘못된 것이기 때문이오. '지각(知覺)한다'고 하는데, 이 지각이 직접적인 지각이 아니고 과거에 경험했던 기억이나 지식이 끼어드는 겁니다. 우리는 지각하면 선택하고 분석하고 판단해서 결론을 짓고 하는 일이 자동으로 일어나요. 근데 그건 전부 과거의 기억이 작용하는 거예요. 즉, 과거에 기억되어진 지식이라든가 기억이 없으면 이런 인식작용은 일어날 수가 없는 겁니다.

 굳이 이름을 붙여서 '올바른 지각'이라 한다면, 과거의 기억이 끼어들지 않는 직접적인 지각을 말합니다. 과거의 기억작용 없이 직접 지각하고 있을 때 모든 존재는 그냥 거기 그렇게 있는 것뿐이지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것처럼 훌륭하다, 하찮다, 귀하다, 천하다 하는 판단이 있을 수 없어요. 그런 것은 전부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개념입니다. 쉽게 얘기해서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이런 것은 옳은 행위, 저런 것은 옳지 않은 행위· · · ' 라고 분간해 봄으로 해서 본래적인 무한한 마음을 유한한 것을 다룰 수밖에 없는 작은 옹배기 속에 가두어 넣은 거예요. 지금 우리의 마음은 유한성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기 때문에 그 유한한 틀 속에 사는 게 차라리 편안한 그런 상태가 돼버렸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직접 지각을 하게 되면 거기에는 이미 유한성의 느낌 같은 거는 전혀 없어요. 무한한 지평, 무한한 개방이라서 어떤 한계성이라는 것은 전혀 없습니다.

 전일한 그 자리에는 '나'와 '너'가 없어요.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그런 이원적인 구조가 없다는 소리요. 그러나 우리의 모든 질문이나 탐구는 끊임없이 이 추구하는 자와 추구하는 대상이 분리돼 있는 상태입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이런 분열 상태로는 이원성에서 벗어날 수 없는 거예요. 이원성이 모두 해소되고 나면 무엇에 의해서 무엇을 보거나, 무엇이 무엇을 알아보는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거요. 때문에 지금 우리가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는 것은 전혀 허망한 겁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열돼 있기 때문에 보고, 듣고, 깨닫고, 안다는 이런 일이 마치 실제인양 이렇게 전개되는 거예요. 우리의 감각기관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 · 잘못됐다고는 했는데, 사실 잘못됐다는 말을 하고 싶지가 않아요. 사실은 잘못된 거는 아무 것도 없기 때문이오. 다만 우리가 이 감각기능에 너무 의지하는 것뿐입니다. 전체에서 분리해서 내가 뭔가를 보고, 듣고, 안다는 사실을 절대화합니다. 관찰자인 '나'를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시킨다는 말이오. 그래서 전혀 터무니없는 이 분열감이 원래 없었다는 걸 일깨우기 위해서 새삼스럽게 전일하다는 얘기를 하는 겁니다.

 그러니 무엇에 의해서 무엇을 본다는 그런 법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반야지혜(般若智慧)라고 하는 것은 관찰자와 관찰대상이라는 대립적이고 이원적인 분열감이 해소된 것을 말하는 거요. '지혜는 아득히 사라지고· · · ' 라는 말이 그래서 있는 겁니다. 지혜가 아득히 사라진다는 이 말은 백치처럼 된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금 사용하고 있는 모든 개념의 굴레가 제거된다는 뜻이에요. 아주 두껍게 가려있던 안개가 활짝 걷힌 것 같은 상황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에게는 지식이 얼마나 중요해요? 지식을 현재에서 미래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로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노력이 우리의 인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게 소위 시간의 굴레라는 겁니다. 이 함정을 알아야 해요. 앞으로 행복해져야 할 '나'와 '내 것'이 있는 한 절대로 해방은 없어요. 전부 자기기만입니다. 여러분이 나에게 뭔가 보다 나은 방법을 자꾸 묻는데, 만약 전일하다면 어디서 오는 대답을 기다립니까, 누가 누구한테서 대답을 기다려요? 묻는 것은 누구고 대답하는 거는 누굽니까? 그게 전부 분열과정인 거예요. '나'와 '내 것'이 있는 한 기억이나 지식은 계속 중요할 수 밖에 없소. 내가 어떻게 돼야 되니까. '나'와 '내 것'이 없으면 지금 여기서 당장 해방이오. 지금 있던 것을 없애라는 게 아니에요. '나'라는 것은 순전히 생각이 만들어내는 환영입니다. '나'라는 생각이 없다는 건 우리의 생각이 어떤 중심도 갖지 않는다는 얘깁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이 어떻게 틀 지워져 있는가 하는 것을 발견할 수가 없어요. 그 조건 자체가 '나'이기 때문이오.· · · 우리는 자기가 어떤 기초 위에서 사물을 보고 있는가 하는 것은 관심도 없고, 뭔가를 보면 그게 그거라고 내지르기 바빠요. 그 판단에 신뢰성, 보편성이 있는가는 돌아보지도 않아요. 그럼 나의 판단이 신뢰성이나 보편성이 있으려면 내가 완전히 조화롭고 치우침이 없는 그런 바탕 위에 있어야겠지요? 만약 그런 바탕 위에 있다면 모든 것이 있는 그대로일 뿐 판단도 하지 않게 됩니다. 굳이 얘기한다면 '나'라는 입장이 없이 산다는 말입니다. '나'라는 입장이 없이 산다는 말을 들으면 '영악하게 굴어도 지금 살까말까 한데 <나>라는 입장이 없으면 어떡하겠나· · · ' 할지 몰라요.· · · '나'라는 입장이 없다면 누가 그런 걱정을 할까요? 여러분 이 세상에 진정코 평화롭고 자유로운 지상 낙원이 오려면 모든 사람들의 마음속에 '나'와 '내 것'이 없다는 본래적인 깨달음이 와야 됩니다. 어찌 '내'가 다른 것하고 고립돼 있겠어요? 어디를 살펴도 고립될 이유는 없는 겁니다. 모든 게 본래 분리돼 있는 게 아닌 겁니다.


 이해한다는 것은 뭔가 머리에 떠올리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건 그 대상을 이해한 게 아니고 내가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떠올린 것을 이해한 거예요. 지금 이 구조를 모르는 겁니다. 우리의 인식작용이라는 게 전혀 잘못된 거예요. 그래서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가 다 없는 것이고 색·성·향·미·촉·법(色聲香味觸法)이 다 없는 것이며, 그 어간에서 일어나는 모든 작용이 다 없는 겁니다. 경험하는 자와 경험 대상, 관찰하는 자와 관찰 대상이 따로따로 존재하고 그 어간에서 관찰하고 인식한 결과, 작용하는 결과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전부 환영이라 소리요. 그러니까 눈을 번히 뜨고 꿈을 꾸고 있는 거예요. 그것은 마음이 완전히 바닥이 드러나기 전에는 이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어리석은 자가 자기 마음을 물질이라고 한다'는 말도 있는 거예요.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대상이 전부다 '나'하고 상관없는 개별적인 실체인 물질이 아니고, 내 마음에 투영된 그림자라고 얘기해도 안 믿어요. 전부 내 마음 바깥에 있는 실체로만 보고있는 거요. 그걸 제대로 알려면 모든 대상을 아무 이름도 짓지 않고 볼 수 있어야해요.
 가령 예를 들어서 우리가 너무나 괴로워 죽고 싶을 때, '괴롭다'고 지었다면 그 마음에는 이미 '나'라는 중심이 있는 거예요. 사고(思考) 자체가 흐를 뿐인데 있지도 않은 그 사고가 '나'라는 것을 만들면 그 '내'가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바에 따라서 괴롭다, 즐겁다 이름을 짓는 겁니다. 그래서 어떤 감정이 떠올랐을 때 그게 어떤 감정이었건 그걸 괴롭다 혹은 즐겁다고 이름을 지었다는 것은 여러분 마음속에 '나'라는 중심이 활동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이런 말을 듣고 '나'라는 중심이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면 우리는 대개 그것을 종식시키려고 하지만 절대로 그러면 안 됩니다. 즐겁다, 괴롭다고 이름을 짓는 '나'라는 중심의 작용을 완전히 이해해서 그냥 보기만 하세요. 그것을 손질해서 바꾸거나 멈추거나 몰아내려고 한다면 그런 조작을 하는 것이 바로 '나'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괴로움이 있을 때에 괴로운 '내'가 괴로움을 말아내는 것처럼 여기고 '나'에게서 이 괴로움을 없애고 싶어 하지만 이게 착각인 거예요. 괴로운 자가 있어서 괴로움을 말아내는 게 아니라 거기 괴로움이 있을 뿐입니다. 한 생각뿐이라서 '나'와 괴로움이 같은 거라면 누가 괴로움이라고 이름짓겠어요? 불은 스스로 뜨겁다고 안 해요. 얼음은 스스로 차갑다고 안 합니다. 괴로움이 스스로 괴롭다고 하는 게 아니라 생각이라는 게 만들어놓은 '나'가 괴로움이라고 이름을 짓는 거예요. 그게 정신분열입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사뭇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을 정상이라고 여기지만 그게 분열인 겁니다.

 여러분 자신이 괴로운 자와 괴로움이 둘이 아니라는 사실을 직접 본다면 거기 괴롭다고 하는 놈은 없어요. 괴로움의 한 가운데에서 괴로운 자와 괴로움이 둘이 아니고 본래 하나라는 사실을 스스로 발견한 그 자리에는 괴로움이니 괴로움이 아니니 하는 그런 일 자체가 없어요. 여러분이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몸은 스스로 괴로운 것을 모른다는 거요. 생각이 괴로움을 지어내는 겁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직접 증험해야 되요. 스스로 증험하지 못하면 이런 말을 듣고 새로운 갈증이 생겨날 뿐입니다. 지금 '어떻게 하면 그렇게 되지?' 하는 '나'가 분명히 있지요? 그건 괴롭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완강히 세력을 부리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아주 깊어야 되는 거요.

 우리는 괴롭고 슬프고 부정적인 뭔가가 나타나면 도망치기 바쁘기 때문에 괴로움이나 슬픔 그 자체를 이해할 겨를이 없어요. 이해하려고도 안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찍어누르거나 피하려고도 하지 않고 완전히 정면으로 맞부딪치면, 괴로움이 괴로움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됩니다. 정면으로 맞부딪친다는 것은 절대로 괴로움이라고 이름짓지 않는다는 뜻이오. 내가 괴로움이라고 인식했기 때문에 괴로움이 '나'하고 대립이 되는 거요. 내가 괴로움이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에 괴로움이 기승을 부린다 소립니다. 여러분이 어떻다고 자기감정에 대해서 이름을 지으면 거기 '나'라는 중심이 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거요.


 '나'라는 중심이 활동하고 있으면 그 '나'라는 중심은 뭔가 경험해서 어떻다고 알아요. 깨달음이라고 알고, 이치가 이렇다고 저렇다고 알고,· · ·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모든 알음알이는 '나'라는 중심에서 비롯된 망상일 뿐이지 전혀 진실이 아닌 거요. 그 전체를 완전히 깨닫게 되면 옳고, 그르고, 귀하고, 천하고 하는 일체가 스스로 만들어서 뒤집어쓴 개념의 굴레이지 그런 게 본래 없다는 걸 알게 됩니다. 그런 차별이 일체 다해버렸을 때 지금 있는 그대로 뭐든지 이름을 짓지 않고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볼 수 있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나'라는 입장이 없는 거라고 했소. '나'가 있으면 있는 그대로 못 봐요. '이렇지 않고 왜 그러냐'는 등등 소견이 생겨납니다. 그것은 보는 놈이 여기 있고 보이는 게 있다는 얘기요. 순간순간 많은 생각들 속에서 못난 생각은 자꾸 억압하고 잘난 생각만 수집해서 '내 것'으로 하려고 하는 그 작업을 누구나 하고 있잖아요? 속은 마구 소용돌이치는데 대단한 '나'로만 포장을 해야 되기 때문에 늘 힘들고 어려운 거요. 그렇다고 해서 모든 생각을 다 드러내라는 얘기도 아닙니다. 그 전체의 흐름을 그냥 볼 수 없겠는가? 그것을 잘난 생각이라거나 못난 생각이라고도 하지말고 그냥 보고만 있을 수 없겠느냐 하는 말이에요.· · · 어떻게 되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절대로 있는 그대로 못 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는 전혀 힘이 안 들어요. 지식이나 기술 훈련도 필요 없어요. 다만 그 마음이 아주 유연해야 됩니다. 물이 그 자체의 정한 모습이 없기 때문에 그릇 생긴 대로 담기듯이 기왕에 어떤 관념도 받아들이지 않는 그런 마음이라야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볼 수가 있는 거요.

 이것은 누구도 대신해 줄 수가 없어요. 모든 걸 있는 그대로 보다가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저절로, 내 본래의 절대 자유로운 그 마음이 거기에 그렇게 나타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거기는 높고 낮은 게 없으니까 뭔가 바랄 것도 의지할 것도 요구할 것도 없어요. 전체가 한 몸이고 한 목숨이고 한 지혜요.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노력해서 얻는 게 아니고 누구에게나 갖추어진 본래적인 것입니다. 일체의 차별과 유한성의 느낌이 해소된 그 자리가 되면 모두에게 사사로움이 없는 완전한 공감의 세계가 형성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