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칼은 스스로를 베지 못하고, 손가락은 스스로를 만지지 못한다.
  2. 법문(法門) : 전일(全一)한 그 자리는 능·소(能所)가 나뉘기 이전이다.
  3. 공안(公案) : 마음 밖에서 부처를 찾지 말라.
  4. 게송(揭頌) : ‘불법의 견해’나 ‘외도의 견해’가 모두 나쁘고...
 
     
   
     
   

 대부분의 수행자들은 흔히 '사고(思考)하는 사람'이 그 사고로부터 떨어져, 그 바깥에서 자신의 사고를 통제할 수 있다고 여긴다. 하지만 그러한 이원적인 구도로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려 하며 공부를 지어나가는 한, '참된 깨달음'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또한 '내'가 관찰자가 되어 견문각지(見聞覺知)로 인해 얻은 경험을 통해서 ―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 자아(自我)를 계속 강화하고 있는 한, 수천만 년 동안 눌려 살아온 상식의 굴레를 벗어 던질 수 있는 '근본적인 변혁'도 '진정한 깨달음'도 결코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다. '진정한 깨달음'은 '사고하는 사람'이 '사고' 자체일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경에 이르기를, ···
 ≪만약 '마음'이 '마음'을 본다면, '앞의 마음'은 능견(能見)이 되고 '뒤의 마음'은 소견(所見)이 되겠지만, ― 그러나 칼은 스스로를 베이지 못하고, 손가락은 스스로를 만지지 못하거늘, 어찌 '제 마음'이 도리어 '제 마음'을 보겠는가. 그러므로 능·소(能所)가 분리되지 않고, 견분(見分)과 상분(相分)이 여기서 끊어진다.
 따라서 만약 마음에 생각이 있으면 어리석고, 마음에 생각이 없으면 곧 '마음'이 '성품'과 '부처'에 명합(冥合)하므로 영원히 생각을 굴려서 밖으로 구하는 일이 끊어진다.≫고 했다.

 나아가 모든 '이런 법'과 모든 '저런 법' 사이에서 옳고 그름을 따져, 옳다고 여겨지는 길만을 따라가면 구경에 이르를 수 있다는, 아니라고 하지만 여전히 모든 판단의 기준이 되고있는, 기왕의 상식의 틀을 고수하고있는 한 여전히 문밖에서 먼지만 피우고 있다는 경책을 피할 길이 없다.

 고덕(古德)이 이르기를, ···
 ≪"만약 '물질'이 곧 '공'이라(色卽是空)고 올바르게 알면서 '물질'을 관하면 옳은가? 만약 '물질'이 '공'하지 않다고 미혹하면서 '물질'을 관하면 잘못인가? 또 만약 '공'이 곧 '물질'이라(空卽是色)고 올바르게 알면서 '공'을 관하면 옳은가? 만약 '공'은 '물질'과 다르다고 미혹하면서 '공'을 관하면 잘못인가?"라고 했다. 이야말로 '옳게 앎'과 '미혹함'이 완연히 '다른 길'이어서 스스로가 '옳음'과 '그름'을 분별하는 것이니, 만약 눈이 밝은 이라면 어찌 '물질과 공'(色空)의 '두 경계'에 관계하면서 '삿됨'과 '바름'을 가리겠는가?
 만약 종지(宗旨)를 분명히 알면 '항상한 물질'이라 관하여도 언제나 올바르고, 만약 뜻(旨)을 미혹하면 비록 '공'을 관한다 하더라도 항상 삿되다.
 중생이 '아공(我空)과 법공(法空)'을 분명히 알지 못하는 까닭은 '마음'과 '물질'을 실다운 존재로 집착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하는 마음'도 미묘하지 않고, '비추는 경계'도 공덕이 없어서, '물질'에 즉하여 '공'을 밝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였다.≫라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