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스런 지혜는 앎이 없고 미혹한 지혜는 없다고 안다.
  2. 법문(法門) : 언어의 허구성
  3. 공안(公案) : 혀끝으로 이야기 하나 말함이 아니다.
  4. 게송(揭頌) : 한 법이 형상이 있으면 곧 그대 눈동자를 가린다.
 
     
   
     
   
     한 어린이가 두 손아귀 가득히 풀잎을 들고 와서
     이게 무엇이냐고 내게 물었다.
     그 물음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어린이가 모르듯 나도 모르는 것을,···


 이제는 귀에 인이 박혀, '말만 배우면서 마음 밝힐 생각은 않는다'는 선지식들의 추상과 같은 경책도 한낱 진부하고 판에 박힌 그렇고 그런 소리로만 들리는 중생들에게, 한 서양 시인의 짤막한 시구(詩句)가 과연 얼마나 가슴에 와 닿을지, 우리 중생들이 딛고 선 세계가 얼마나 어중간하고 터무니없는 곳에 근거하고 있는가를 알아차리게 해줄 수 있을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서술'을 구분하지 못한다. 관(觀)의 힘을 길러야 할 수행자에게 있어선 깊이 참구해야할 부분이다.
 가령 진리에 대한 많은 말과 글들이 있지만, '진리'와 '진리에 대한 설명'은 전혀 다른 것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진리'라는 '말'은 그 어떤 세계를 가리키기 위한 -결코 그럴 수 없지만- 사람들간의 약속에 불과한 것으로 그에 대한 이러저러한 설명이 있을 수는 있겠지만, 그러나 그 어떠한 말과 문자로도 직접 드러낼 수는 없는 것이다. 결국 '진리'라는 낱말은 '진리 그 자체'와는 아무런 직접적인 상관이 없는 한낱 '약속된 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라는 것은 결코 '실제' 그 자체가 될 수 없는 가상의 상징이요 환영에 불과한 것으로서, 불법에 인연을 맺고 선지식의 법문을 처음 대하는 수행자들은 이러한 언어의 한계를 잊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말과 설명으로부터 그 마음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 수행자의 첫 관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수행자가 그토록 받들어 모시는 부처니 해탈이니 하는 것도 모두 세간의 부질없는 이름 뿐이요, '있고, 없음'과 '같고, 다름'이 모두 세간의 허망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행여 말과 문자 너머의 뜻을 곧장 알아차릴지언정 그 말과 뜻을 붙들어 차곡차곡 자기 살림살이로 쌓아가고 있는 한, 성인들이 가리키고자했던 그 마음자리에 드는 일은 점점 요원해질 뿐이다.
 다만 중생의 '미혹'(迷惑)을 설파하기 위하여 '깨달음'을 세웠으며, '망령됨'을 설명하기 위하여 '참됨'을 드러낸 것이니, 이러한 간곡한 성인들의 뜻을 망각하고, 들은 바 말과 문자에 집착하여 대하는 것마다 견해를 일으킨다면, 곳곳마다 도깨비를 만나고 눈에 뜨이는 것마다 역·순으로 엇갈려 내달릴 테니, 정작 고향으로는 언제 돌아갈 수 있겠는가?

 이제 그 어린아이의 물음에 뭐라고 답할 것인가? · · · · · · 쉿! 입만 뻥끗해도 천리 밖이다.


     묘한 종지(宗旨)는 재빠른 것이어서
     말로 설명하려 하면 벌써 늦는다.
     잠시 '말'을 따라 알려고 하면
     곧 '신령스런 기틀'을 미혹한다.

     눈썹을 끄덕여서 물음을 대신하고
     마주 서서 빙그레 웃으니,
     이 무슨 경계이던가?
     '도'가 같은 이라야 알 수 있다.

               ― 지한 선사(智閑 禪師)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