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릇 문자나 언어는 그 모두가 '마음의 자취'이다.
  2. 법문(法門) :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머리로 지은 관념에 불과하다.
  3. 공안(公案) : 만약 바로 안다면 무슨 현묘한 말이나 구절이 있을 수 있겠는가?
  4. 게송(揭頌) : 심명(心銘) 중에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억제하는 것도 아니고 조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누구를 막론하고 의식, 무의식중에 자신의 언행을 조작하고 통제하곤 하는데,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아무 조작이나 통제도 없이 그냥 보는 것을 말하는 거예요. 우리한테 긍정적으로 평가되건 부정적으로 평가되건 간에 지금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분석, 판단하거나 어떤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그냥 볼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 요점입니다.
 있는 그대로 본다면, 즉 이름도 짓지 않고 찬성이나 반대도 하지 않고 그냥 볼 수만 있다면 그 때 여러분의 마음은 대단히 새롭고 위대한 뭔가를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가능성을 발견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절대로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의 마음이 고도로 깨어있을 때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가 그 무엇인가에 대해 의견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관점을 붙잡고 있다는 뜻 아닙니까? 예를 들어서 불교신자는 불교신자로서의 관점이 있고 사회주의자는 사회주의자로서의 관점이 있듯이 각기 자기가 받아들이고 있는 관점에 따라서 대상을 보게 되는 겁니다. 만약 '사람이 관점이 없을 수 있다'고 가정한다면, '아무 관점도 없이 세상을 볼 수 있다'고 여기는 그것도 역시 또 하나의 관점이 됩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은 자기 나름대로의 관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관점 그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닌 거예요. 다만 관점에 유연성을 잃는 것이 문제인 거예요. 있는 그대로 보라는 것은 완전히 모든 것을 개방하는 아주 자유로운 관점을 말하는 겁니다.

 한 예로 지금 여러분한테 주먹만한 다이아몬드가 있다면 엄청 좋겠지요? 그런데 지금부터 얼마 전만 해도 남아프리카의 토착민 소년들에게는 주먹만한 다이아몬드나 굴러다니는 돌멩이나 다를 바가 없었어요. 그걸 가지고 돌치기를 하며 놀았다고 합니다. 그 애들한테는 그 다이아몬드가 별 의미가 없었던 거지요. 그런데 지금은 어때요? 같은 다이아몬드를 보는 그 애들의 가치판단의 기준은 얼마 전에 비해 말도 못하게 달라졌겠죠? 지금의 다이아몬드가 얼마나 큰 의미 있는가 하는 것은 여러분 상상에 맡깁니다.
 그러니까 의미가 있다 없다, 허망하다, 참되다 하는 것은 뭔가를 볼 때에 거기에 대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판단 기준을 덮어씌워서 생각하는 것이지 절대적인 것이 아닌 겁니다. 소위 무의미하다는 것도 내가 갖고 있는 판단의 기준이 내가 관찰하는 대상에 잘 들어맞지 않는다는 뜻이에요. 다시 말해서 '나는 아직 그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볼만한 가치기준을 마련하지 못했다'는 뜻인 거지요.··· 그러므로 의미가 있다 없다, 말이 된다 안 된다 혹은 허망하다 참되다 등등은 각각의 사람의 관점 차이일 뿐이지, 이 세상에 절대적으로 참되고 절대적으로 허망한 것은 없다는 겁니다. 이처럼 각자가 가진 관점에 따라서 의미가 있기도 하고 의미가 없기도 한 것이 사실이고 보면, 만약 아무 관점도 없을 때는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볼뿐인 겁니다.
 여기서 '있는 그대로 본다'는 것은 수용하라거나 긍정 혹은 부정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우리가 뭔가를 수용하려면 그것을 합당하다고 판단하는 어떤 기준이 있어야 하는 것이고, 뭔가를 부정하는 데에도 그만한 기준이 있어야 해요. 그러나 있는 그대로 보는 데에는 기준 따위는 없어요. 말 그대로 그냥 볼뿐인 겁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잘 안 된다는 말은, 있는 그대로 보는 게 아니고 기존의 자기가 갖고 있는 기준에 그것을 맞춰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맞춰볼 기준이나 목표가 없으니 걱정이 있을 수가 없겠지요? 걱정이라는 것은 기준에 안 맞아서 걱정인 겁니다.

 지금과 같은 인류의 문명사회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닙니다. 오랜 세월을 두고 여러 가지 발전과정을 거친 거예요. 예를 들어 종교의 변천과정을 보면, 원시시대에는 산이나 동구 밖의 나무, 동물, 태양 등등 뭔가 자연물을 숭배하거나 믿음의 대상으로 삼았어요. 그런 단계로부터 저 위에는 하늘나라가 있고 땅 밑에는 지옥이 있고, 땅 저쪽에서 해가 뜨고, 반대쪽에서는 해가 지고,··· 뭐 이런 유형의 모델이 비롯됐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모델은 과거에 만들어진 관념이고, 그때 그런 모델을 기본으로 살아왔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세상을 살아나가는 틀은 그런 모델에 맞도록 만들어져 있던 거예요. 하지만 요새는 '태양이 신'이라느니, '저 높은 데에 하늘나라가 있고 저 밑에 지옥이 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어요. 아마 요즘 애들은 영악해서 코흘리개들도 안 믿을 겁니다.··· 왜 그렇게 됐을까요?··· 지금 우리에게는 태양계가 어떻고 위성이 어떻고 등등 과거의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새로운 우주의 모델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서 혹시 지구에 대하여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델은 맞고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모델은 틀렸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전혀 그렇지 않아요. 인간은 지금과 같은 문명을 갖게 되기까지 끊임없이 보다 높고 -그게 높은지 낮은지 사실 알 수 없지만- 보다 정교한 어떤 추상(抽象)을 발전시켜온 겁니다. 진실은 아무도 볼 수가 없고 그걸 관념화하고 머리로 그려낸 것을 인식할 뿐인 거예요. 가시광선, 가청음파 등등 인간에게 주어진 오관의 한계 때문에 우리는 구조적으로 진실을 볼 수가 없게 되어있다는 사실은 그동안 수도 없이 말해왔어요. 그렇다면 과연 무엇을 사실이라 하겠습니까? 사실이라는 말은 당치도 않은 것입니다. 전부 추상이고 관념에 불과한 겁니다.
 결국 인간 문명이 발전돼 왔다는 것은 끊임없이 새로운 어떤 상징을 만들어냈다는 뜻과 같은 거예요. 천동설이 지동설로 바뀐 것도 추상의 발전이고 뉴턴 물리학이나 현대 물리학,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원리라든가 불확정성의 원리 등도 전부 또 하나의 추상에 불과한 겁니다. 끊임없는 추상의 발전이지요. 진리 그 자체는 전혀 인간에 의해서 개념화나 언어화 될 수가 없기 때문에 인간이 알아본 모든 것은 그게 무엇이었건 간에 사실은 끊임없이 어떤 추상을 발전시켜왔던 것뿐입니다.
 결국 정신적 물질적 모든 존재는 머리로 지은 관념에 불과한 것이란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이러한 사실이 쉽게 수긍이 안 가는 이유는, 우리는 모든 것이 머리로 지은 것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그 모두가 내가 관찰했건 안 했건 자체로 실체성을 갖고 있는 존재라는 가정에 대해 전혀 의심의 여지조차 갖질 않기 때문이에요. 모든 것이 인간이 지은 관념입니다. 일체가 다 없는 거예요.

 자, 그렇다면 이게 참 희한한 일이 아닙니까? 본래 바탕이 없는데 우리의 소위 '앎'이란 것이 '나'도 지어내고 대상도 지어내서 지금 온갖 기기묘묘한 관계들을 만들어내고 있다니 말입니다. 자기 스스로 문득 한 순간에 삼라만상을 전부 지어내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대상화하고 실체화하고 고정화해서 '나'와 분리된 각기 독립적인 존재로 보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겁니다. 그러나 우리가 각기 분리된 것으로 보거나 말거나 일체는 본래 분리될 수가 없는 것들이에요. 그러니 뭔가가 분리된 독립적인 실체라는 것은 순전히 관념일 뿐이라는 것을 깊이 이해해야 합니다.
 지금껏 알아본 바와 같이 모든 것이 추상이고 개념이므로 발전이니 퇴보니 하는 말이 이미 의미 없는 것이지만, 이런 말을 수없이 들으면서도 보고 듣는 가운데 계속 이치로 궁리하고 짐작해서 이론을 발전시키려는 것이 범부중생입니다. 경전을 읽었건 설법을 들었건 간에 나름대로 그 가운데 뭔가 알아들은 게 있으면 그 순간부터 투쟁이 벌어지는 거예요. 자기 자신이나 남의 생각과 행동을 그 알아들은 바에 따라 판단하고, 무의미해 보이는 언행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나 뭔가 의미 없는 것을 의미 있는 것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은 자기확산 내지 자기강화의 과정이지 전혀 자기해체가 아니란 말입니다. 그러니 뭔가를 알아들어서 발전하겠다는 생각일랑 무의미한 것임을 명심하세요. 이 세상에 절대적인 기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므로 뭔가에 접근한다, 퇴보한다, 발전한다 등등의 개념 자체가 잘못됐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이 다만 말 그대로 추상일 뿐이라는 것을 안다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요? 우리한테 부딪쳐오는 모든 상황에 장애를 받거나 걸리고 막힘이 없어지게 됩니다. 자기가 머리로 그려낸 추상이라는 사실을 모르고 자꾸 독립적이고 구체적인 실체가 있다고 보기 때문에 문제인 것인데, 이게 전부 내가 지은 추상이라면, 자기 자신까지 포함해서 모든 것이 관념적으로 지어진 것이라면, 문제라는 것도 추상이고 문제가 해결됐다는 것도 추상 아니겠어요? 사실은 아무 것도 얽힌 적도 없고 풀린 적도 없이 진실은 항상 고요한데, 우리가 생각만으로 시끄러웠던 겁니다.
 여러분, 모름지기 우리 의식의 흐름이나 생각의 구조, 그런 것들을 전체적으로 통찰할 수 있는 지혜만 있다면, 다시 말해서 자기중심적인 관점이 고정화 돼 있지 않다면 시절과 인연에 따라서 어떻게 행동해야 될까 하는 대답은 그때그때 저절로 나옵니다. 우리의 마음은 본래 무한한 마음입니다. 한정이 없는 마음인데 이것이 '나'라는 응어리로 고정돼 있기 때문에 아프면 안 되고, 해로우면 안 된다고 하는 따위의 주장을 하는 겁니다. 만약 이 '나'라는 응어리가 본래 없는 것이라면 소위 아프다, 괴롭다, 해롭다하는 개념 자체가 전혀 메아리 같은 거예요. 근본적으로는 있다 없다 하는 데서부터 잘못된 겁니다. 있다는 것도 없다는 것도 전부 관념적인 구분입니다. 우리의 관념이 활동을 멈춘다면 있다, 없다 하는 그런 말도 전부다 메아리입니다. 의미가 없어져요.
 왜 아프면 안 될까요? 왜 괴로우면 안 될까요? 때때로 여러분이 아픔을 당하거나 억울한 일을 당해서 불끈 뭔가가 솟아오를 때, 그게 전부다 마음의 장난이라는 것을 한 찰나에 봐야합니다. 그렇게 불끈 분노를 촉발시키는 자기 자신까지를 포함해서 그 전체 상황을 그냥 봐야 합니다. 그랬을 때에 그 분노가 자취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을 한 찰나에 보게 됩니다. 그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꿈에서 깨는 것과 같이 한 찰나에 깨집니다. 모든 분노, 억울함, 불안, 공포가 한 찰나에 사라져버립니다. 그것을 여러분이 직접 체달하거나 증득하지 못한다면 평생토록 법문을 듣고 경전을 연구해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지금도 '왜 아프면 안 되는가' 라는 말을 듣고, '아픔을 그냥 보면 아프지 않을 수 있다'는 묘한 비책쯤으로 이해하기가 쉬운데, 그런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아픈 게 아프지 않은 겁니다. 무한한 가능성 중에 하나가 현실화 됐을 뿐이지 그 뭔가에 대해서 좋다, 싫다 하며 취사선택 되어질 그런 일이 아닌 것입니다. 전부 그것은 그럴 만 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결국 서운한 소리를 들었건 칭찬하는 소리를 들었건, 내가 지금 피해를 봤건 이익을 봤건, 그런 일들은 전부 지난밤에 꾼 꿈과 같은 겁니다. 실제로는 그런 일에 가해자도 피해자도 없는 겁니다. 전부 머리로 지어낸 추상이고 관념입니다. 모든 관계도 인간이 지어내는 개념입니다. 만약 이 세상에 인간이 없어서 머리로 지어내지 않는다면 모든 관계는 없는 겁니다. 그 모든 관계가 전적으로 환상적인 것이고 가공적인 것이라는 사실을 진정으로 알았을 때 비로소 우리가 인연의 오랏줄에서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모두가 관념입니다. 그러니 생각 일으켜서 이러쿵 저러쿵 두리번거리지 말고 편히 쉬세요. 그게 어떤 상황이건 그대로 가세요. 여러분 지금 있는 그대로인 채로 온전합니다. 뭔가 어떻게 바꾸려고 하는 것은 자기가 만든 숱한 추상 속에서 어느 하나를 추켜들고 나머지를 배척하는 그런 허망한 장난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지금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과거에 갖고 있던 관념의 틀은 틀렸으니까 버리고 내가 얘기하는 '모든 사물이나 관계는 관념일 뿐이다'라는 말을 받아 가지라는 뜻으로 알아들으면 안 됩니다. 어느 것도 관념 아닌 것이 없습니다. 어느 게 참되고 어느 게 허망하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함께 알아보는 것으로 족합니다. 그러면 여러분이 시절과 인연에 따라서 형편에 맞게 쓰면 되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