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무애(無碍)를 탐하는 것이 이미 장애(障碍)이다.
  2. 법문(法門) : 있는 그대로, 지금 무엇이 부족합니까?
  3. 공안(公案) : 흐름을 따라 성품을 깨달으면...
  4. 게송(揭頌) : 도(道)를 닦으나, 도는 원래 닦을 것이 없고...
 
     
   
     
   

 말로 표현될 수 있는 법문의 끝 간 자리가 무애법문(無碍法門)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무애법문이라고 하면 선뜻 그 말을 듣기 무섭게 어떻게 하면 나도 무애자재(無碍自在)하게 될까? '어떻게 하면,...'이 먼저지요? 그러나 '어떻게,...'라고 하는 동안에는, 그 '어떻게,...'라는 짐을 마음이 지기 때문에 절대로 무애자재 할 수가 없는 겁니다.
 마음공부, 불법공부라는 것은 절대로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서, 또 그 노력의 결과로 뭔가가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 우리의 깨달음이 확연해서 일체의 제한이나 한계를 넘어서게 되면 저절로 자유롭게 되고 무애자재하게 되는 거예요, 저절로,...

 사익경(思益經)이라는 경전에 보면 부처님이 말씀하시기를,...
 “현덕 천자라는 사람이 다라니(陀羅尼) 공부를 했더니 수 억 겁을 두고 지금까지 설법을 해도 막힘이 없다”고 했어요. 이에 제자가 묻기를
 “그게 어떤 다라니입니까?” 하자, 부처님 말씀이
 “그 속에는 한 법도 들어갈 수가 없고, 그 속에서는 털끝만큼의 한 법도 나올 수가 없고,... 그 다라니로 말미암아서 뭐를 세우지도 않고 뭐를 허물지도 않고,...”

 모두 욀 수는 없지만 암튼 요점은, 털끝만큼의 한 법도 거기에 들어갈 수가 없고, 털끝 만큼의 한 법도 거기에서 나올 수가 없는, 그런 다라니라고 했어요. 자, 이런 다라니 같으면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통상적인 방법으로 배울 수는 없는 거지요? 그 말을 잘 음미해 봐요. 이건 본래 온전하다는 얘기예요.
 그런데 이 다라니를 바로 여러분이 본래 가지고 있는 겁니다. 다만 여러분이 그걸 믿지 못하는 것뿐이에요. 이 다라니를 본래 갖고 있는데 그럼 왜 총지(聰智)가 드러나질 않는가?... 그것은 이 허망한 의식(意識), 지견(知見)에 의지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겁니다.
 다라니는 본래 있는 그대로 온전해서 한 법도 보태거나 덜 수 없지만, 문제의 사단은 그게 무슨 일이던 간에 내가 그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벌어지는 거예요. 내가 받아들였기 때문에 다라니가 이지러진 겁니다. 그렇게 내가 받아들이면 소견(所見)이 생겨요, 이렇다고 저렇다고,... 그리고 그 소견이 점점 자리가 잡혀서 뿌리가 내리면, 그걸 내 신조(信條)로 삼고 신념(信念)으로 삼고,... 마침내 그것을 앞세워 여기저기 부딪치는 거예요. 자, 그러니 그런 사람한테 다라니가 생길 턱이 있겠어요? 다라니가 생기기는커녕 이게 지금 엉망으로 뭉개진 겁니다.

 엉망으로 뭉개진 다라니를 회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여러분 제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게 전부 다 허깨비라는 것을 말로써만이 아니라 사실로써 받아들여야 합니다. 결국 우리가 자유롭지 못한 것은 빛깔과 소리 때문인데, 눈과 귀에 가득한 보이고 들리는 게 다만 그림자라면 자유롭지 못할 이유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옛날에 '점고(點考)'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러서 대답하는 사람은 아직 진리에 닿지 못했고, 진리에 닿은 사람은 대답을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점고라는 게 뭘까요?
 "아무개야-" 하고 불렀을 때, "네" 하고 대답하면.... 즉, 점고하면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는 말입니다. 대답하는 이게 '나'이기 때문입니다. 이건 허공입니다. 그런데 여전히 여기 '나'라는 이름이 붙어있으니 한 법도 들어갈 수도 나올 수도 없는 다라니에 부르는 소리가 비집고 들어가 그 부르는 소리를 받아들여서 '아 저게 내 이름이구나' 하고 번역했으니까 "예"하는 반응이 있었겠지요? 그러니 그 사람은 다라니를 얻으려면 아직 멀은 겁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될까요? 대답하지 않아야 할까요? 여러분, 진리를 발견하는 게 먼저지 대답하고 안하고가 먼저는 아닙니다. 저절로 그렇게 돼야 하는 겁니다.
 형상 없는 '참 나'는 이미 온 누리에 두루해서 제한이 없고 한계가 없는 겁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이 참 다라니, 참 성품에는 본래 내 성품, 네 성품 하는 게 없어요. 본래 한계도 차별도 없는 그런 성품에 망상으로 이런 형상이 '나'인 줄 알고 거기에 이름을 짓고 어떤 연관을 지어서 살고 있는 겁니다. 자기가 지은 소견의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이게 터무니없는 어떤 제한성 억압성이라는 걸 알고 여기서 빨리 벗어나야 합니다. 모든 작용이 -부르는 것도 작용이고 그걸 듣고 대답한 것도 작용이고- 겉으로 볼 때는 작용이 일어나는데 성품자리에서 보면 전혀 아무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거울 속에 끊임없이 어떤 그림자가 비치고 있기는 있는데 거울 그 자체는 아무 일도 안 하고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작용을 하기는 하는데 진실로는 아무 작용도 일어나지 않고 있는 겁니다.

 이 성품을 확철히 깨친 사람은 온갖 감정이 떠올라도 모두가 그림자 같은 건 줄로 알기 때문에 거기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점고한 사람은 이르지 못했고 이른 사람은 점고하지 않는다.'는 이 말을 들으면 이 말이 대뜸 여러분 의식의 흐름에 영향을 줍니다. '대답해야 하는가, 하지 않아야 하는가...' 벌써 푸성귀에 뿌리가 내린 겁니다. 내가 하는 말을 긍정도 않고 부정도 않고 들어보라고 한 적이 있는데 지금 바로 그 얘기를 하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을 경전에서는 현량(現量)이라 합니다. 거울이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비추듯이 어떤 생각이나 분석, 평가, 판단도 없이 그냥 보는 게 현량입니다. 우리가 지금 사물을 보고 듣는 방식은 일일이 전부 다 받아들여서 그것을 내가 기왕에 가지고 있던 모든 가치 척도와 견주어서 분석하고 판단하고 결론을 짓는데 그게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입니다. 그게 우리가 하는 버릇인데 그 작업을 안 하는 겁니다. 그냥 흘러왔다가 흘러가게 두는 겁니다. 그래야, 그게 뿌리를 내리지 않아야 한 법도 들어가지 않고 한 법도 나오지 않는 겁니다.
 내가 하는 말을 여러분이 듣는다면 여러분은 여전히 성품을 발견한 게 아니고 내 말을 붙잡아다가 뿌리를 내린 겁니다. 그걸 붙잡아서 성품을 점점 더 가립니다. 어떻게 하면 나는 보다 많이 배우고, 갈고 닦아서 훌륭해질 수 있을까?... 그러나 자꾸 보태고 긁어모아서 훌륭해졌다면 도깨비입니다. 변하는 것은 도깨비만 변합니다. 본래 성품은, 아까 다라니 얘기했듯이 한 법도 보탤 수 없고 한 법도 덜 수 없는 겁니다. 훌륭해질 것도 없고 하찮아질 것도 없고 있는 그대로 다 황금입니다. 될 것이 없는 겁니다. 알 것이 없는 거예요. 구할 것이 본래 없는 겁니다. 있는 그대로, 여러분 지금 뭐가 부족합니까? 우리가 목마르게 뭔가 구하려고 하는 것은, 전부 내가 그린 헛것을 보고 헛되이 헐떡이는 겁니다. 문제는 진실을 완전히 깨쳐야 된다는 겁니다. 빛깔도 소리도 다 비어서 모두가 마음 가운데의 그림자라는 것이 확연하지 않으면 절대로 무애자재 할 수가 없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참으로 듣는 것은 들음이 없고 참으로 보는 것은 봄이 없다 했습니다. 참으로 보고 참으로 들으면 곧 다라니가 드러납니다. 그건 하나도 새로 노력해서 갈고 닦고 배워서 익히는 지혜가 아닙니다. 저절로 본래 갖춰진 지혜입니다. 그래서 이 공부를 하면서 가장 어려운 게 자꾸 빛깔과 소리를 향해서 밖으로 내닫기만 하는 그 마음을 안으로 돌려서 본래의 청정한 마음에는 빛깔도 소리도 없어서 어떤 빛깔과 소리에도 상관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겁니다. 그 성품은, 거듭거듭 얘기하지만 우리가 미혹해서 망나니짓을 할 때라고 해서 주는 법이 없고 우리가 아주 높은 법을 깨달았다 해서 느는 법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다라니입니다. 형상이 없기 때문에 한 법도 들어갈 수가 없고 한 법도 나올 수가 없고.. 그러면서 끊임없이 작용을 하면서도 하나도 작용하는 바가 없는 그런 묘한 존재입니다. 그게 우리의 온전한 본래 성품입니다. 여러분 그 본 바탕은 지금 그냥 환히 밝아요. 한 번도 그 자체가 어둡혀져 본 적이 없습니다. 모든 형상, 빛깔, 소리, 냄새, 맛, 촉감,... 그 모든 법이 아무리 요동을 쳐도 이 거울에 비친 어떤 그림자도 거울 속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거울 속에서 나오는 것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육안으로 볼 때는 거울 속에 뭔가 많이 들어가는 것 같고 거울 속에서 많이 나오는 것 같은데 그 바람에 우리가 속는 것뿐입니다.

 지금 우리가 뭐를 대하건 좋고 싫고 마땅하고 마땅치 않은 것은 형상에 속아서 본 성품을 등졌기 때문입니다. 본 성품을 밝히게 되면 삼라만상 일체만유의 모습이 전부 이 성품으로 돌아갑니다. 전부 한 성품에 찍힌 겁니다. 예를 들어 황금으로 만든 불상과 소를 갖다 놓았을 때 그게 둘 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건 줄 모를 때는 부처와 소가 하늘과 땅만큼 다르게 보이겠지만, 그게 모두 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라는 사실을 확실히 아는 순간, 둘 다 황금이지 부처나 소라는 고유의 체성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성품을 밝히고 보면 그게 전부다 황금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겉모양만 다를 뿐이지, 부처와 소는 원래 한바탕인 겁니다. 마음 밖에 한 법도 없습니다. 그래서 그 이치를,... 성품을 확연히 밝히고 보면 모든 게 서로 상호간에 걸림이 없습니다. 이게 성상무애(性相無碍, 眞應無碍)입니다. 이것만 완전히 알면 나머지는 저절로 다 해결이 됩니다.
 여러 무애법문중 또 하나가 상입무애(相入無碍, 潛入無碍)인데,... 이것은 서로가 서로한테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두 개의 거울을 마주 세워 놓으면 서로가 서로를 비추지요? 서로 상입(相入)합니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아주 훌륭하고 재주도 높은 사람 속에 들어가 합하면 그 사람이 내 속에 있고 내가 그 사람 속에 있게 됩니다.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비추듯이 상입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힘과 지혜가 서로 통합니다. 더 나아가 자기를 폐하고 다른 뭔가가 되는 것을 상즉(相卽)이라고 합니다. 황금비녀를 예로 들면 황금과 비녀가 상즉해서 비녀가 비녀이기를 그치면 황금이 되는 겁니다. 비녀는 없어져 버리고 황금으로 합하는 겁니다. 또한 황금을 보지 않고 비녀만 보면 황금은 끝나 버리고 비녀만 남는 겁니다. 이것은 무애법문을 얻은 사람만이 가능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근본 바탕에 나는 나고 너는 너고.. 나와 너는 다르다는 생각이 있다면 상입도 상즉도 불가능합니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온누리에 미치지 못하는 자리가 없는 항상한 법성신(法性身)이 확연히 드러나서 일체의 모든 존재는 그 법성신에 드러난,... 마치 물 속에 비친 달그림자 같은 것인 줄로 확철히 본 사람은 이미 안 통하는 데가 없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그림자는 그림자이기 때문에 다 서로 통해 있는 겁니다. 우리가 다만 마음으로 다른 거라고 분리해 놨을 뿐, 원래가 통해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주 지극한 마음, '나' 없는 마음이 되면,... '나'가 없으면 '너'도 없는 거예요. 그러면 온 누리가 하나입니다. 전부가 한 몸이고 한 마음이면 일체가 하나로 모여져서 우주를 조종 통제하는 힘도 '나'와 더불어 하나입니다. 누구나 그런 엄청난 힘을 구사 할 수 있는데 나는 나고 너는 너라고 분리되어 전혀 그런 힘이 드러날 수가 없는 겁니다.
 예를 들어 아무 배운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지만 단 한 가지 아주 순직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 있다 칩시다. 그런 사람은 네가 곧 부처고 부처가 곧 너라고 하면 완전히 아무 의심없이 부처를 받아들입니다. 그러나 사량분별(思量分別)이 많은 사람은 전혀 못 받아들입니다. 받아들이고 싶지만,... 받아들이려고 헐떡거려도 저 안에서는 '내'가 부처를 받아들입니다. '나'가 없다면 부처가 곧 '나'입니다. 그러나 '나'가 있는 동안은 절대로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입니다. 이 비밀을 꼭 알아야 됩니다. 그래서 수행의 주체가 '나'로서 공부하고 있는 한 그건 천 년 만 년 가도 틀린 일입니다.
 그래서 도대체 신통묘용(神通妙用)이란 우리가 인위적으로 어떻게 되려고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닌 겁니다. 모두가 빈 이름뿐이라는 걸 확연히 알아서 일체에 무심해졌을 때 비로소 통하지 않는 데가 없고 통하지 않는 데가 없으니까 무애법문이 드러나서 이런 힘이 생기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난감한 것은 무한한 능력을 갖고 있으면서도 있는 줄도 모르고, 있는 줄 모르니까 써 본 적도 없고 쓰는 방법도 모르는 겁니다. 이치는 한 목에 깨치지만 이게 워낙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거라서 불편한 겁니다. 그 쓰는 방법의 한 일단을 지금 살풋 드러내 보였는데,... 자꾸 쓰다 보면 그 물미가 틀 것입니다. 그 일단을 알면 나머지는 미루어 짐작해서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아무 공도 들이지 않고 지금 몰록 쓸 수 있는 겁니다. 이치는 몰록 깨닫는다 해도 그 지혜의 폭과 깊이가 더해지는 것은 각자가 얼만큼 빽빽이 촘촘히 노력하는 가에 달려있습니다. 뭐를 노력해야 할까요? 안 보고 안 듣는 공부하는 겁니다. 뭐가 보이건 뭐가 들리건 일체에 끄달리지 않고 홀리지 않고, 정신 똑바로 차리는 겁니다. 그러면 나날이 성태(聖胎), 성인의 태가 길러집니다. 지금 우리가 보이고 들리는 족족 이렇다고 짓고 저렇다고 짓고 하던 그 버릇을 안 하는 게 성태를 기르는 겁니다. 성태를 왜 기릅니까? 그게 본래 내 것이지만 한 번도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 자꾸 힘을 기르는 겁니다. 뭐를 보건 뭐를 듣건 자기가 지어낸 환영이라는 것을 한 찰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빽빽이 촘촘히 간다면 머지않아 번뇌가 새지 않아 무루지혜(無漏智慧), 누진통(漏盡通)이 생기게 됩니다. 자, 이 일을 누가 대신해주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