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있음'을 버리고 '없음'으로 나아감은 바로 범부의 첫째가는 허물이다.
  2. 법문(法門) :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3. 공안(公案) : 갈림 길이 어렵다 말을 말라 눈앞이 그대로가 장안(長安) 길이니라
  4. 게송(揭頌) : 신심명(信心銘) 중에서
 
     
   
     
   

 내가 하는 말은 이분법적인 논리 가지고는 절대 못 알아듣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언어를 가지고는 내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소립니다. 왜 그런가? 말 자체가 이분법적인 구조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오. 언어화나 개념화가 전부 다 이분법적인 체계에 의해서 지탱되고 있는 거예요.
 예전에 처음 나온 듯한 한 청년이 법정님은 번뇌가 있는가 없는가하고 묻더군요. 물론 그 질문이 잘 됐다, 못 됐다 하는 것은 차치하고 라도 내가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어요? 아마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도 의아하게 생각했을 거예요. 왜 한 마디로 잘라서 번뇌가 없다고 얘기 안 하는가? 그러나 여러분이 여기서 꼭 알아차려야 하는 것은 '있다', '없다'하는 그 양변은 전혀 의미가 없다는 점이에요. 하지만 여러분한테는 있고 없는 게 여전히 중대한 문제겠지요. 번뇌가 있는가 번뇌가 없는가 하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 허공이 곧 물질이고 물질이 곧 허공이고,... 그럼 물질과 허공이 전혀 다르지 않다는 건데,... 자, 색불이공 공불이색, 물질이 곧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곧 물질과 다르지 않고,... 이렇게 거듭 거듭 강조하는데도 그건 앵무새처럼 잘 외면서, 여전히 '있는 것'과 '없는 것'은 하늘과 땅 만큼 틀린 것이 사실 아닙니까? 이분법적인 견해를 부셔버리기 위해, 소위 '있다', '없다' 하는 양변이 빈 이름뿐이라는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누누이 반복한 것인데,... 하지만 어때요? 이젠 너무나 흔해빠져서 누구나 부처님하고 인연만 있으면, 인연이 없어도 유식한 체하는 사람들은 다 알아요, 색즉시공 공즉시색 하는 정도는,... 어느 막걸리 집에 걸린 액자에도 써붙여 놓았을 정도예요. 그렇게 흔한 말이 되었지만, 진짜로 그 뜻을 알아차린 사람은 만나기 어렵소.
 이건 대단히 엄청난 이야기입니다. 소위 이분법적인 논리체계는 우리가 자기 본향, 자기 본래 모습을 잊어버리고 떠돌이 신세가 되기 시작하면서부터 들고 다니던 찌그러진 깡통입니다. 본래 원만구족한 성품을 등지고 일그러지고 반쪽이 되어버린 연장을 들고 다니는 겁니다. 그래서 그걸 본래의 원만구족한 성품자리로 돌리기 위한 첫 작업으로 물질이 허공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물질과 다르지 않고, 허공이 곧 물질이고 물질이 곧 허공이라고 하는 걸 거듭거듭 강조하는 겁니다.

 반야바라밀다라고 하는 반야지혜가 무슨 지혜요? 이분법적인 논리가 초월적으로 극복된 경지에서 쓰는 지혜가 바로 반야지혜요. 그 반야지혜를 얻은 사람만이 진정한 해탈 열반을 얻을 수 있는 거예요. 그래서 육바라밀 중에 맨 마지막 끝이 반야바라밀인 겁니다. 그건 원융된 지혜이기 때문에 '옳은가, 그른가?', '있는가, 없는가?', '선인가, 악인가?' 하는 따위의 소위 분별지혜 가지고는 절대로 붓다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얘기요.

 수 천만년동안 자기 본래 성품을 등지고, 있지도 않은 허망한 경계와 '나' 아닌 것을 '나'로 여기고, 수 없이 대경에 집착해서 억지로 이름을 짓고 구분 지어서 취하고 버리고 하는 이 무명의 소용돌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무명중생들,... 왜 무명중생인가?... 나눌 수 없는 것을 억지로 나누어 놓고 양분(兩分)을 해놨기 때문인 겁니다. 그래 놓고 지금 헐떡이는 바람에 그 대립과 갈등이 소위 번뇌로 나타나는 거요. 그 번뇌의 가장 근본적인 것이 '나와 너', '안과 밖', '선과 악', '생과 사', '시(是)와 비(非)', '범부와 성인',... 그 모든 게 근본 원 바탕은 아주 원만한 본래 성품인데 이걸 억지로 나눠서 그런 구분이 생겼던 거라 하는 말입니다. 있지도 않는걸 있다고 집착하여, '있다', '없다' 하는 유무 양변에 걸렸기 때문에 거기서 헷갈려서 번뇌가 생긴 거예요. 입만 벌리면 색즉시공 공즉시색을 되뇌이면서 말이지요.

 번뇌라 하는 것은 번뇌에 휘말려 있는 '나', 그러니까 내 마음하고 그 마음이 상대하고 있는 경계, 마음과 경계 사이에서 마땅찮은 일이 일어난 거요. 그게 번뇌라고,... 그럼 마음과 경계가 벌써 양분된 거요. 그리고 그 경계를 보고 '마땅하다', '마땅치 않다' 하고 짓게되니, 그게 또 양분(兩分)이요. 끊임없이 이렇게 갈라집니다. 이 경우 이분법적인 논리체계에 철저히 길들여져 있는 사람들은 모든 문제에 직면했을 때, 부정적인 측면을 제거하고 긍정적인 측면을 취하는 게 공통적인 해결방식이에요. 틀림없어요. 괴로운 사람은 괴로움은 버리고 즐거움을 취하려고 하고,... 맞죠? 번뇌는 천하에 몹쓸 것이니 팽개쳐 버리고 아무 근심 걱정 없는 '보리'는 취하고,...이러고 있는 동안은 아직 설법을 들을 자격도 갖추지 않았고 경전을 읽을 자격도 갖추지 못했다는 말을 면키 어렵소.

 여기 거울에 어두운 그림자가 비치는 걸 가령 번뇌라 하고, 하얗고 밝은 게 비친 것을 보리, 해탈이라고 합시다. 거울에 어두운 것이 비춰도 거울의 성품은 어두운 게 아니고, 밝은 것이 비춰도 거울의 성품은 밝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간파하여 우리 인간의 성품이 그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실히 체달한 사람에겐 밝고 어두운 게 전혀 다르달 게 없지만, 이분법적인 논리체계에 철저히 갇혀 있는 사람한테는 밝고 어두운 게 하늘과 땅 만큼 틀린 겁니다.
 밝음의 성품도 어두움의 성품도, 그 본래 성품은 모두 빈 것이기 때문에 겉모습으론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다른 게 아니라는 사실을 납득시키는 것이 소위 성직자들이 할 일입니다. 허나 지금 스승이라고 자처하고 법사의 칭호를 참칭(僭稱) 하는 많은 사람들이 하고 있는 일이 뭔가?...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어두움을 제거하고 밝음을 얻을 수 있겠는가 하고 일러준다고,... 그건 외도도 엄청난 외도요. 그건 붓다의 가르침하고는 전혀 상관없는 겁니다.

 이 길에 들어선 수행자라면 흔히들 어떻게 하면 이 어두운 무명의 멍에에서 벗어나, 본래 원만 구족하고 항상한 밝은 지혜를 얻을 수 있겠느냐고 묻습니다. 육조 혜능대사가 그 질문을 받고 뭐라 했는고 하니,... '그대의 본래 청정한 성품인 불성은 밝고 어두움과 상관없느니라...' 말하자면 밝고 어두움 이전(以前)이라는 소리요. 또 그대가 청정한 자성을 밝혀서 그 밝디 밝은 성품이 끊어지지 않고 내내 이어지길 바라는데,... 그 자체도 절대로 그리될 수가 없는 거예요. 왜 그런가? 그 자체가 바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기 때문이요. 밝고 밝은 성품이 이어지라 하는 건 끊어지지 말라 하는 소리니,... 이어지라, 끊어지라 하는 건 전부 이분법 아니겠소?.... 소위 어떤 형상이 있고 의미가 있는 건 전부 이분법적으로 뜻이 정해져 있는 것이요,... 유한한 거라고. 그러니 밝고 밝은 성품이 계속 유지되라고 하는 한, 밝고 밝은 성품은 유지될 수가 없어요. 밝고 어두움이 한결 같은 그 본래 뜻을 사무치기 전에는 안 된다고... 밝음이 밝음이 아니고 어두움이 어두움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이 확철히 사무쳐지기 전에는 그 사람은 어디 가서도 쉴 수가 없어요.
 다시 말해 지혜로 비추어서 번뇌를 제거하려고 하는 건 이승적(二乘的)인 논리예요. 이승이라고 하는 건 상대논리, 이분법적인 사고의 체계 속에 사는 걸 이승이라고 하는 거요. 일승(一乘)이라고 하는 건 뭔가? 이러한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완전히 평정되어, 원융된 한 바탕으로 돌아간 것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여태 한 이 말을 알아듣는 사람이 이 중에 한 두 사람이라도 있으면 다행인데 나머지는 긍정, 부정 양단으로 이해합니다. 내 말을 말로 이해하고 알아들으면 여전히 그들은 이승입니다. 내가 하는 말 알아들으면 전부 '들 여우'라고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거예요. 내 하는 말 어떻게 알아들어도 잘못 알아들었다 하고 대못을 박아 놓아도 그래도 여전히 말과 글 속에서 무언가 알아내려고 한다구요,... 계속 이러면 옳고, 저러면 그르고 하면서 말이지요.

 자 그러면 부처님 말씀을 어떻게 해야 알아듣겠어요?... 알아들으면 틀려요. 못 알아들으면 더 틀리고,... 그럼 이런 말 같지 않은 말들이 뭘 말하는가? 소위 반야(般若)라고 하는 건 우리가 과거에 이해하던 그런 방식으로 긍정 혹은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것, 긍정 부정은 다만 시절과 인연 따라서 굴리는 내 연장일 뿐이지 어떤 궁극적인 이론이나 이치를 딱 찍어서 정의를 내리는 그런 것들이 아니라는 소리요. 말은 전부 빈 거요. 빈 것을 빈 것인 줄 알고 쓰는 사람은 전혀 자취가 없어요. 걸리고 막힘이 없어요. 그러나 빈 것을 빈 것인 줄 모르고 이것만이 참이고 이것과 상반되는 것은 전부 틀린 거라고 붙잡힌 사람은 영영 놓여나지 못합니다.

 경전에 보면 총별동이성괴(總別同異成壞), 육상(六相)이 원융(圓融)하다 했어요. 화염경의 가장 중요한 핵심을 이루는 부분이지요. 이게 세 쌍으로 되어있어요. 총별(總別)은 전체와 부분, 동이(同異)는 같고 다른 것, 성괴(成壞)는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걸 말하는데,... 이 여섯 가지 모습이 원융되어서 다름이 없다 하는 소립니다. 그런데 우리한텐 어때요? 전체와 부분이 우리한테는 전혀 다른 거요. 같고 다른 것도 전혀 다른 거요. 서로 용납될 수가 없어요.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것은 더더구나 다른 거요.
 그러나 이 여섯 모습이 근본 성품을 밝힌 사람에게는 전혀 다르달 게 없는 거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전부 다 실다운 존재가 아니고 허깨비 같고 꿈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은 겁니다. 그 본 성품이 밝혀지면 이러한 낱낱이 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인 성품이 있는 게 아니고, 그 모두가 전부 한바탕에 의지해 있는 거예요. 그 한바탕이 변해서 나타난 것이 총별동이성괴 인데, 이 나타난 겉모양은 전부 다르게 보이나 진실을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이게 전부다 빈 이름 뿐이요, 그 원 성품은 전부 한바탕이라 모두 가지런한 것입니다.
 총별동이성괴, 이 중에서 여러분에게 가장 문제가 되는 게 성괴(成壞)요. 성공과 실패, 합격과 불합격, 돈 버는 것과 못 버는 것, 흥하는 것 망하는 것,... 그리고 구도(求道)의 길에 들어선 사람에겐 깨닫는가 못 깨닫는가 하는 각(覺), 불각(不覺). 그런데 이 모든 게 전부 한 모습인 겁니다. 이 육상(六相)에 비추어보면 어느 것도 여기에 적용 안 되는 게 없어요. 다 해결됩니다. 마치 이글거리는 용광로 같아서, 여기에 집어넣어 버리면 아무 것도 걱정할 일이 없는 것을, 우리가 뒤집힌 소견으로 수 없는 대립과 갈등과 걱정이 생겼다는 게 분명해집니다.

 이승적인 사고방식이 우리 마음가운데서 떠나지 않는 그런 상황에서 여러분이 불법(佛法)을 대할 때 항상 듣는 얘기가 성주괴공(成住壞空), 생주이멸(生住異滅), 생로병사(生老病死)요. 그럼 뭐가 성주괴공인가? 성주괴공은 이 세상이요. 이 세상은 끊임없이 성주괴공하고 중생의 마음은 끊임없이 생주이멸하고 이 육신은 끊임없이 생로병사 한다 하는 말이요. 말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변화하는 모습을 각기 그 바탕에 따라 구분해서 얘기하는 겁니다. 이 세상은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이루어진 상태로 약간 머물다가 허물어져서 없어진다 하는 소리요. 생주이멸은 뭔가? 우리가 문득 한 생각이 나면 그 생각이 잠시 유지되다가 이내 변해버려요. 절개가 어떻고, 맹세가 어떻고,... 다 소용없어요. 그러다가 마침내 그 생각이 없어지곤,... 내가 언제 그랬더냐 하지요. 이 육신? 태어나서 늙어서 병들어서 죽는다 하는 소리요. 이게 모든 변하는 모양인데 그걸 한마디로 추려 얘기하면 성괴(成壞)라 할 수 있어요. 이루어지고 허물어지고,... 이루어지고 허물어지는 게 전부 원융되어서 한 모습이라면 성주괴공이 한 모습이고, 생주이멸, 생로병사가 전부 한 모습이라 그 외양(外樣)은 끊임없이 소용돌이치면서 변해 가는데, 근본 바탕은 전혀 원융되어서 변하는 게 없다 하는 소리요. 겉모습은 끊임없이 변하는 데 진실 세계는 하나도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겉모습인 상(相)에 철저히 얽매여 있기 때문에 이 상이 전부 성주괴공, 생주이멸, 생로병사 하는 거요. 이 상이 진실이고, 이 상이 실다운 거라고 봐 버리는 한, 이건 가망 없어요. 끊임없이 여기 휘말립니다. 성주괴공하고 생주이멸하고 생로병사해서 늘 '아이고 데고',... 아무리 그럴싸하게 정신적으로 이치로 무장해도 소용없어요. 끊임없이 소용돌이칩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아까도 얘기했듯이 전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에 의해서 관찰되어진 대상 경계예요. 즉, 실다울 것도 없고, 진실이랄 것도 없는 경계를 상대해서 억지로 이름을 지어 이러쿵저러쿵하니 이분법이 성립되는 겁니다. 그럼 절대(絶對)는 뭔가? 상대가 끊어지는 거요. 상대가 끊어진다는 건 다시 말해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이 끊어진다는 말이요. 상대가 없는데 뭘 이러쿵저러쿵해요? 상대가 없는데 뭘 상대해서 되고 안 되고를 보느냐고?...
 그러면 상대세계에서 헬리콥터 타고 절대세계로 가는가? 그게 아니에요. 이 상(相)이라는 게 본래 없는 것 같으면 지금 이대로 인 채로 그 근본 바탕은 절대세계인 거요. 깨달음은 들고 나는 법이 없어요. 가고 오는 법도 없고. 왜 그런가? 상대가 끊어졌기 때문이요. 육진(六塵) 경계라는 게 상대세계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 육진경계가 몽땅 육진경계가 아니라 이 말이요. 여러분 반야심경 외울 줄 알죠?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 그러니까 육진경계가 본래 없는 거란 말이요. 경계가 없는데 어디로 들락날락해요? 경계가 있어야 가고 오고 하죠? 육진경계가 본래 육진경계가 아닌 것 같으면 뭘 상대를 하고, 또 새삼스레 무슨 대(對)를 끊느냔 말이요?
 여기서 절대라고 하는 말은 상대라는 말하고 맞서는 의미가 아닙니다. 흔히들 철학적인 논리를 전개할 때는 상대와 절대를 다시 대립시켜, 상대세계를 극복하고 절대세계를 얻어야 된다는 식으로 말하지만,... 그렇게 되면 여전히 그 사람은 이분법적인 사고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그 자신이 언어를 구사하고 논리를 구사하는 한 그 사람은 여전히 이 상대세계 안에 있는 거예요. 언어와 논리 자체가 상대론적으로 밖에 구사할 수가 없는 거요. 그래서 진실의 세계는 말과 뜻을 넘어섰다고 얘기하는 겁니다.

 그러면 '법정님은 번뇌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하고 물었을 때 내가 여러분에게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는가? 내가 늘 하는 얘기가 있어요. 붓다는 문제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주는 분이 아니고 그 문제가 본래 문제가 아니었었더라 하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라는 사실이오. 부처님이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새벽별을 보고 깨달았다고 했잖아요? '그럼 깨닫고 난 다음에는 어떻습니까?' 하고 물었더니 '샛별이 샛별이 아니니라' 하셨어요... 깨닫고 났더니 '번뇌가 번뇌가 아니니라' 하는 소리요.
 샛별이라고 하는 게 밤이 캄캄하게 어두우면 그 빛이 더욱더 초롱초롱합니다. 그 수많은 별의 개수만큼 우리 범부들에게는 번뇌가 많지요. 그러나 찬란한 아침햇살이 떠오르면 뭇 별들이 전부 자취를 감추어 버립니다. 그것은 단지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지, 즉 태양이 떠올랐기 때문에 자취를 감추었을 뿐이지 번뇌가 사라지고 없어지고 한 것하고는 다르죠? 촛불이 태양 빛 아래서는 필요 없잖아요? 태양이 빛나고 나면 여러분이 들고 다니는 촛불 따위는 문제가 안 된다 하는 소리 아니오?
 이렇듯 큰 지혜가 확연하게 되면 번뇌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일체 모든 문젯거리는 전혀 문젯거리가 아니라는 사실이 확연해지는 거요. 전부 마음이 지어서 번뇌고, 마음이 지어서 보리라는 게 드러난다 하는 소리요. 그러니 번뇌 제거할 것 없고, 보리 얻을 것 없는 것이오. 모든 번뇌니 보리니 온갖 무한한 가능성은 여러분이 본래 갈무리하고 있는 수많은 공덕일 뿐인 거요. 결국 모든 칼자루는 여러분이 쥐고있다 하는 소리니, 번뇌를 제거하고 난 뒤에 보리를 얻을 수 있다고 여기는 것은, 이분법적인 논리를 갖고 있을 때만 가능한 망견(妄見)인 겁니다. 그래서 이분법적인 논리체계에 철저히 사로잡혀 있는 사람을 소위 이승이라 하는 거요. 이승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동안은 절대로 깨달을 가망 없다 하는 소리요. 그리고 일승법 이라고 하는 것도 이승법과 상대해서 일승법을 세우는 게 아니에요. 일승이라 하는 것은 삼승이 전부다 일승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일체 모든 강하(江河)가 바다로 돌아가면 한 모양으로 돌아가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일체 모든 이름과 뜻은 마음 근원으로 돌아가면 전부 한 바탕에서 비롯된 거요. 지금 현재 한 바탕에 의지해 있는 거요. 그걸 그저 근본을 등지면 전부 양분되어져 버려요. 나누어지면 이것과 저것은 하늘과 땅 만큼 달라져 보인다 말이오.
 밝음과 어두움은 깨달으면 한 모습이고 미혹하면 하늘과 땅 만큼 틀려요. 모든 게 다 마찬가지요. 미혹하면 전부 따로따로 양분되어 보이고 깨달으면 전부 근본이 하나로 보이는 겁니다. 육안으로 보면 전부 따로따로 이지만 지혜의 눈으로 보면 전부 근본이 하나입니다.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고, 하나와 둘 사이를 활짝 열어놓은 대문 드나들 듯이 드나들 수 있는 사람만이 무애자재한 사람이오.
 하나라고 하면 하나인 줄만 알고 따로따로 라고 하면 따로따로 인줄만 알고 달라붙어 있으면 그 사람은 여전히 이분법적인 이승적인 멍에를 뒤집어쓰고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쉴 겨를이 없는 거요. 깊고 깊은 내 마음근원으로 돌아가면 거기엔 아무 일 없어요. 우리는 지금 현재 제거해야될 수많은 문제 거리들이 있죠? 근심거리, 걱정거리, 두려움,... 숱한 문제 거리들이 있는데 그게 전부 이분법적인 사고방식 때문에 생긴 분수 밖의 일거리들이오. 여러분 한 근원으로 돌아가게 되면 본래 그런 대립 갈등이 없어요. 그걸 깨달으라고 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