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있음'을 버리고 '없음'으로 나아감은 바로 범부의 첫째가는 허물이다.
  2. 법문(法門) : 이분법적인 사고의 틀
  3. 공안(公案) : 갈림 길이 어렵다 말을 말라 눈앞이 그대로가 장안(長安) 길이니라
  4. 게송(揭頌) : 신심명(信心銘) 중에서
 
     
   
     
   

 중생의 가장 특징적인 미혹함은, 보고 듣고 체험하는 모든 것을 철저하게 이분법적으로 토막내어 생각하는 버릇(業)이다. '참 성품'을 밝히는 데에 있어서 소위 '분석적'이라는 그 업식이 가장 큰 장애라고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생들에겐 오히려 그것이 훌륭한 덕목으로 여겨지고 있으니 이래저래 갈 길은 멀기만 하다.

 이 세상이 본래 통틀어 <하나>임을 깨닫는 것이 바로 깨달음의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래서 선지식은 결정적으로 말할 것이 하나도 없지만, 중생이 무엇인가에 단단히 걸려 있거나, 치우치게 집착하고 있으면, 우선 그 치우친 집착에서 벗어나게 해 주기 위해 <결정해>(決定解)를 말하게 된다. 다시 말해서 중생의 작은 지혜가 아직은 분별 없는 '큰 지혜'를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방편으로 결정적인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중생들은 "말이란 본래 허물이 많다"는 말을 늘 듣고 되뇌이면서도 말과 글 너머의 선지식의 뜻을 간파하지 못하고, 경전을 읽을 때나 법문을 들을 때 세간의 강의나 강연을 듣듯이 <이분법적인 분별지혜>로 듣고서는, 그 들은바 말과 글을 자기 나름대로 해석하여 간직하는 버릇을 그치지 않으니, "허구헛날 지견만 쌓고 있다"는 꾸지람을 어떻게 면할 수 있겠는가?

 미혹한 중생은 "이 세상은 본래 '하나'이다"라고 들으면, 곧 <하나>라고 만 알고, <여럿>을 배제해 버린다. 그러나 만약 누군가가 이와 같은 말을 들었을 때, <여럿>이라는 집착뿐만 아니라, <하나>라는 생각까지 보내버린다면, 그 때에야 그 사람은 <하나>와 <여럿>을 가지런히 보아서, 그 양변을 넘나드는데 아무 거리낌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어야 비로소 진정한 의미의 <하나>를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경(經)에도 이르기를,『성인은 '형상'(相)이 없음이 없다.』고 했는데,···
 왜냐하면 『만약 '형상 없음'(無相)으로써 '형상 없음'을 삼는다면 '형상 없음'이 바로 '형상'이 된다. '있음'을 버리면서 '없음'으로 나아가는 것은, 마치 봉우리에서 도망하여 골짜기로 나아가는 것과 같으므로 모두가 허물을 면치 못한다』.
 그러므로 『지인(至人)은 <'있음'에 처하면서도 있지 않고, '없음'에 처하면서도 없지 않다>. 비록 <'있고 없음'을 취하지는 않지만> 역시 <'있고 없음'을 버리지도 않는다>. 따라서 '지인'은 '빛'을 감추고, 진로(塵勞)에 섞여서 오취(五趣)를 돌아다니되, <고요히 갔다가는 고요히 돌아오며, 담백하여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음이 없는 '이'』 이기 때문이다.

 사실 수행자가 <홑 관문>(一重關門)을 벗어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그 모두가 법의 평등을 얻지 못한 중생이 세속에서 익혔던 업식(業識) 때문에 끊임없이 이것과 저것을 분별하여 취사선택하던 잔재(殘滓)이니, 결국 높은 것은 높은 채로, 낮은 것은 낮은 채로 본래 평등하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닫고 나면, 그와 같은 헛된 행은 저절로 쉬게 될 것이다. 부디 크게 발심한 진정한 수행자라면 능히 <있음과 없음>의 이중관문(二重關門)을 훤칠하게 뛰어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