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바다의 천파만파(千波萬波) 그 어느 것도 바다 아님이 없다.
  2. 법문(法門) : 작은 파도 하나가 이미 저 광대한 바다와 한 몸이다.
  3. 공안[公案] : 목전의 여러 가지가 여러 가지가 아니요, 여러 가지 아닌 것이 곧 여러 가지이다.
  4. 게송(揭頌) : 이 보고 들음이 보고 들음인 채로 보고 들음이 아니니······
 
     
   
     
   

우리는 전체와 부분을 동시에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없다. 부분을 말하면 전체가 숨고, 전체를 말하면 부분이 숨는 것이 인간이 사용하는 언어와 인식의 한계이기 때문이다. 공부를 지어가다 보면, 즉체지용(卽體之用), 체(本體)에 즉(卽)한 용(用)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데, 사실 본체(本體)에 처해서 부분을 쓴다는 생각은 앞서 말한 태생적인 한계의 의식체계 안에서는 언뜻 그려질 수 있는 구도가 아니다.


기존의 상식으로 그러한 구도를 떠올릴 수 없는 이유는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만 생각하도록 틀 지워진 인간의 의식구조 때문이다. 미혹한 중생의 이해를 돕기 위해 선지식들이 시설한 것이 체와 용인데, 체와 용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중생에게는 그것이 결코 원융될 수 없는 서로 상대적인 별개의 것으로 자리잡는다. 그리하여 이미 상대적인 것이 되어버린 '두 가지', 체와 용을 다시 원융되게 하기 위해 애쓰는 것이 소위 말하는 수행이요, 공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결론부터 말해서, 전체라는 생각도 부분이라는 생각도, 체라는 생각도 용이라는 생각도, 전부 우리의 의식으로 빚어낸 개념임이 틀림없다면, 역시 그것은 우리의 '참 성품'에 의해 나투어진 부분들임에 틀림없다. 전체라는 이름의 부분이요, 역시 부분이라는 이름의 부분에 불과한 것이다. 우리의 의식과 언어로는 포섭될 수 없는 그것을 전체라고 이름짓는 순간 그것은 벌써 몇 바퀴 구른 또 다른 부분인 것이다.




결국 이러저러한 관찰과 그를 통한 온갖 잡다한 사유를 하는, 수행의 주체로서의 '나'가 존재한다는 생각에 의해 첫 단추가 잘못 꿰어진다면, 늘 '나'를 중심으로 전체와 부분이 나뉘고, 이것과 저것이 나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위 진리를 밝히고자 하는 수행자들이 내심 갖고 있는 생각중의 하나가, '내'가 전체를 관찰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이다. 결국 그 말은 전체로부터 분리된 '나'가 '나'의 앞에 펼쳐져 있는 전체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설명하겠다는 것인데, 그것은 너무도 터무니없는 생각 아니겠는가?


신령스런 깨달음의 성품(靈覺性)에 의지해서 관찰의 주체도 관찰대상도 나투어졌다는 사실을 망각하고는, 전부 이 '나'가 중심이 되어 '내'가 들은 바, '내'가 관찰한 바에 의하면 전체는 이렇고 부분은 이렇기 때문에, 따라서 이러쿵저러쿵 모든 언설이 끊이질 않는 것이다. 심지어 전체를 깨달았다는 '나'도 세간에 넘쳐나고 있으니 도대체 그가 깨달은 전체는 '나'의 밖에 있는 것인가, '나'의 안에 있는 것인가?




지금 관찰의 주체라고 생각하는 그 '나'는 가짜 나(妄我)이다. 우리가 쓰고 있는 모든 지각작용을 가능케 하는 그 신령한 앎의 성품(靈覺性), 그것이 '참 나'(眞我)요, 본래의 '나'인 것이다. · · · · · · 관찰의 주체라고 여기고 있는 '나'도, '나'의 바깥에 존재한다고 믿고 있는 관찰 대상도, 그게 전부다 그 '신령스러운 앎의 성품' 안의 소식이라 하는 사실을 잊고있는 것이다.


바다의 천파만파(千波萬波)가 몽땅 그 어떤 예외도 없이 그대로 바다라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제 거기에는 마음도 경계도, 관찰의 주체도 관찰의 대상도 몽땅 '참된 하나'로 돌아간다. 오직 하나의 신령스러운 깨달음의 성품일 뿐이어서, 거기 어디에도 행위의 주체가 없는 가운데, '나'도 나투고 '너'도 나투어서, 지금처럼 이렇게 '차별 없는 차별법'을 굴리는 것이 바로 불사(佛事)요, 달리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경전에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으니 그 뜻을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다만 미혹(迷惑)을 설파(說破)하기 위하여 깨달음을 세웠으며, 망령됨을 설명하기 위하여 참됨을 드러낸 것이다. 이것들이 모두 마땅함(機宜)을 따르나, 저마다 자체가 없다.(미혹과 깨달음, 참과 허망이 서로 依支하면서 세워짐이 緣生이며, 緣生은 無生이다). 즉 세속에서 보면 있거니와, 참 이치(眞諦)에 의하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만 상대적인 이름을 제할 뿐이요, 하나의 신령스러운 성품을 없애는 것이 아니다.(靈性은 生滅이 없으나 움직이는 모양은 相續된다). 따라서 성품은 비록 상대가 끊어졌으나 일(事)에는 항상 다스림이 없지 않다.』


또한 · · · · · ·

『법은 본래 정한 모양이 없고, 진·망(眞妄)은 전혀 마음으로 말미암을 뿐이요, 일어남과 다함은 근원이 같아서 달리 다른 뜻이 없다. 또한 진·망은 항상 서로 통하면서도 참과 허망의 모양을 무너뜨리지 않는다. 그렇다면 허망을 갖춘 진실이므로 진실은 곧 진실이 아니면서 그저 맑고 고요하며, 진실에 통한 허망이므로 허망은 곧 허망이 아니면서 구름처럼 일어난다.

따라서 존재하지도 않고 소멸하지도 않는 성품과 모양을 뚜렷이 알 수 있으며(性相常住), 하나 하나가 서로 융통하고, 겹겹이 서로 통하여 막힘이 없고 걸림이 없나니, 곧 체(體)와 용(用)이 서로 거두어서 대원경(大圓鏡) 안에 들어감이 스스로 본래 그런 것이다.』라고 이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