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백천 가지 법문이 모두 마음으로 돌아가고 · · · · · ·
  2. 법문(法門) : 미(迷)해도 깨달아도 그 모두가 한 성품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3. 공안(公案) : 지금 있는 이대로의 온갖 법이 바로 부처의 길이다.
  4. 게송(揭頌) : '있고 없음'은 동일한 체성이요· · · · · ·
 
     
   
     
   

여러분이 질문하는 방식은 대개 똑 같소. "이겁니까, 저겁니까?", 아니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등등. 늘 이것과 저것 사이에서의 선택이나, 혹은 옳은 방법에 대해 묻고 있는 거요. 그렇게 계속 어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구하고 있다는 것은 아직 발심(發心)도 못했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요. 자주 하는 소리지만, 붓다는 문제에 대한 해답을 주는 분이 아니고, 그 문제가 본래 문제가 아니었더라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분이오.


그게 무슨 소리겠소? · · · · · · 본래 텅 트인 하나의 참 성품 자리에 인간이 끊임없이 분별을 일으켜 획을 긋고, 나누고 떼어내고, 구획을 정하고, 그래서 이것과 저것 사이에 차별을 짓고 대립을 만들어 왔던 거요. 인류가 생겨난 이래로 수백만 년 동안 쉬지 않고 그 짓을 해왔으니 도대체 거기에 얼마나 많은 차별과 대립이 지어졌겠소? 그러면 그럴수록 문제는 더욱더 복잡다단해졌을 것 아니겠소?


그런데 요는, 그 허공 같은 참 성품자리는 그 어떠한 획도 받아들이질 않는다는 사실이오. 인간이 제 아무리 머리를 굴려서 분별을 짓고 차별을 지어도, 그 본 성품자리는 일찍이 단 한순간도 서로 나뉘어 따로따로인 적이 없었던 거요. 단지 인간이 근거도 없이 제 멋대로 획을 그어 차별을 짓고 대립을 지어 문제를 야기했을 뿐, 본래 그 땅에는 문제라는 건 있어본 적이 없소. 결국 모든 문제라는 것이 몽땅 허망한 헛소리라는 얘기요. 그래서 저 끝, 말단에서 먼지 피우지 말고, 훌쩍 마음을 돌이켜 근원으로 돌아가라 소리를 하는 거요. 근원으로 돌아가면 모든 것은 본래 문제가 아니었던 거요.


다시 말해 참된 수행자의 질문이라는 것은 "이게 왜 이렇게 됐지? 저렇게 돼야 하는데" 하면서 그 잘못된 원인과 해법을 찾는 과정이 아니오. 그 문제라는 것이 뭔가? 지금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에 대해, 보다 진지하고 근원적인 의증을 갖는 계기가 되어야 하는 거요. 그러니 "나는 산란한 마음이 싫다. 고요한 마음이 되고 싶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하는 식의 접근은 벌써 그 출발부터가 잘못 된 거라 소리요.


우선 그 산란한 마음을 회피하려 하지말고 "산란함이라 뭔가? 산란한 마음은 왜 싫은가? 싫어하는 그 '나'는 누구인가?" 등등, 한 생각이 일어나면 그 한 생각이 일어난 근원을 밝히고 들어가야 하는 거요. 산란함이라는 말 자체가 이미 부정적인 의미를 담고 있기 때문에, 거의 자동적으로 그 산란함을 제하려는 쪽으로 마음을 쓰지만, 참으로 진지한 수행자라면 산란함이라 이름 붙여진 그 현상을 있는 그대로 볼 줄 알아야 하오. · · · · · · 초발심에 변성정각(便成正覺)한다고 했으니, 그 출발점을 바로 잡는다면 바로 지금 여기 앉은 그 자리에서 훤칠하게 벗어날 수 있는 거요.




참선을 하건 고행을 하건 여러분이 제 아무리 각고의 노력 끝에 얻은 고요함일지라도 그것은 결코 참된 고요함이 아니오. '나'를 정신없이 뒤흔들고 힘들게 하는 산란함은 싫어서 내 차고, 편안하고 안락한 고요함을 새로 얻었다는 소리요. 그런 고요함은 시작이 있는 것이니 곧 끝이 있고, 얻은 것이기 때문에 곧 사라지게 돼 있소. · · · · · · 그 본래의 땅, 참 성품 자리는 새로 얻는 것이 아닌 본래적인 것이어서, 거기엔 시작도 없고 끝도 없소. 먼저도 없고 나중도 없이 본래 그대로요.


만법이 유식(唯識)이라, 지금 여러분 눈앞에 펼쳐진 산하대지 삼라만상은 전부 각자 제 마음이 굴러서 나타난 거요. 그것이 심리현상이었건 물리현상이었건, 자기 마음 바깥에서 계속 무슨 일이 실제로 벌어진다고 보고, 그것 때문에 혼란과 장애를 겪으며 끄달린다면 그런 사람은 제 본래의 땅을 밟을 수가 없소. 일체가 적멸해서 모든 시간, 공간을 넘어선 그 본래의 땅에는 그 어떤 대립과 갈등도 있을 수 없소. 거기엔 산란함도 없고 고요함도 없소. 선도 악도, 해야 하는가 하지 말아야 하는가 하는 따위의 모든 이분법적 대립, 갈등이 없소. 그런 모든 울퉁불퉁한 차별과 대립은 전적으로 여러분 스스로가 지어낸 의식의 산물에 불과한 거요. 거울에 비친 그림자와 전혀 다르지 않다 소리요.


그 본래의 성품 자리는 저절로 고요한 거요. 고요하게 되기 위해 따로 여러분의 노력과 뼈를 깎는 수행을 필요로 하질 않소. 그래서 심지어 중생으로 하여금, 일체 만법이 다만 제 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써, 곧장 배움 없고 닦음 없는 경지로 직입하게 할지언정, 절대로 공부에 떨어지게 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도 하는 거요.


지금 이른바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모든 유위행은 지금 당장 그 종언(終焉)을 고해야 하오. 마땅치 않은 것을 마땅한 것으로, 보잘 것 없는 곳에서 훤칠하게 벗어난 곳으로 등등, 그러한 모든 지향성(指向性), 시간과 공력을 들여서 하는 일체의 인위적인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동안은 여전히 저 문밖에서 먼지만 피우고 있는 거요.




일체 만법이 제 고유의 성품이 없다는 사실을 확철하게 깨쳐야 하오. 그래서 마음 바깥에는 단 한 법도 없다는 사실을 투철하게 사무치는 것, 그것이 불법(佛法)의 요체요. · · · · · · 보는 것이 보는 그대로인 채로 보는 것이 아니고, 듣는 게 듣는 그대로인 채로 듣는 게 아닌, 모든 보고 듣는 것은 다만 제 마음이 변하여 나타난 것이라는 사실, 그 본 성품 자리는 미동도 않는데, 전부 제가 지어 제가 보고 제가 듣고, 저 혼자 그 속에서 대립, 갈등을 일으키고 허우적대고 있는 거요.


하나의 독립적 존재가 또 다른 독립적 존재를 관찰하여 보고, 듣고, 그 관찰의 결과 이러쿵저러쿵 하는 일은 철저하게 환상이오. 전부 제 마음이 변해서 그렇게 보이고 그렇게 들리는 것이오. 꿈속에서 일어나는 일과 전혀 다르지 않소. 그 본래의 땅은 항상 고요한데, 다만 중생들이 지은 업에 따라, 보고 듣고 하는 일이 있는 거요. 문풍지 뚫어진 구멍대로 소리가 나는 거요.




지금 여기서 설법을 하는 내가 있고, 거기 앉아 그 설법을 듣는 여러분이 있다는 생각, 그게 몽땅 실체가 없는 환영이오. 그래서 여래는 일찍이 법을 설한 적이 없다고 하는 거요. · · · · · · 평생 정신없이 의식만을 좇아 문밖에서 먼지만 피우다가, 마침내 여래의 설함이 없는 설법을 들을 줄 알게 돼야, 비로소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니, 그 속에서 보고 듣고 냄새맡고 아는 등등의 오온 십팔계(五蘊十八界)가 몽땅 허망한 꿈 놀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거요.


절대로 목표나 목적을 추구하려 하지 마시오. 여러분이 추구하는 목표나 목적은 전부 환영이오. 그것이 아무리 종교적으로 세련되고 전통이 있는 것일지라도, 심지어 부처님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일지라도, 만약 여러분이 그것을 믿고 그것을 추구한다면 이미 속절없이 걸려든 거요.· · · · · · 부처님의 '본래의 제 땅'이나 여러분의 '본래의 제 땅'이나 모두 한 바탕이오. 이미 다 그 자리에 있는 거요.(自地自住) 단 한 순간도 그곳을 떠났던 적도, 떠날 수도 없소. 다만 제가 알아차리지 못할 뿐이오.


모든 보이고 들리는 것, 모든 알아차려진 바 일체의 지혜가, 다만 내 참 마음에 비친 그림자일 뿐이니, 한 법도 취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는 거요. 미(迷)해도 그 자리고, 깨달아도 그 자리요. 그게 전부 빈 말이고 그림자 놀음놀이라 소리요.· · · · · · 이러한 사실을 바닥까지 철저히 사무쳐 마침내 그 본향(本鄕)의 땅을 밟은 사람이라면 어찌 문제가 있을 수 있겠소? 어찌 대립, 갈등이 있을 수 있겠소? 자신이 이미 아무 것도 부족하지 않은 고귀한 부처님의 신분인데 어찌 근심 걱정이 있을 수 있겠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