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일체 존재가 허공과 같으니, 그 마음을 장애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2. 법문(法門) : 모든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3. 공안(公案) : 있음과 없음은 마치 등(藤)이 나무에 의지한 것과 같다.
  4. 게송(揭頌) : 만법이 환(幻)과 같아 법계가 모두 평안하다.
 
     
   
     
   

그 어떤 유위의 노력이나 조작함이 없이, 그저 문득 한 생각으로 수행에 들어야 참된 수행이라 할 수 있소.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장차 먼 훗날 그 수행의 공덕으로 어떤 훌륭한 결과에 도달한다는, 그러한 깨달음을 궁극적인 목표로 삼고 있는 한 그 사람은 천년 만년 가도 성품 보긴 틀린 거요. 심지어 이 말을 듣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장차 '나'가 기필코 성불해 마치리라 하는 생각이 쉬질 않을 만큼 그 뿌리가 워낙 깊소.· · · · · · 그게 세속적인 바램이었건, 출세간적인 바램이었건, 일체의 바램은 자기 마음으로 그려낸 환영을 쫓는 거요. 지금 여러분이 듣고 있는 일체 모든 법문은 그러한 바램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게 아니오.

모두 한 마음 안의 일이오.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한 생각으로 모든 게 이루어져도 이루어진 일이 없고, 허물어져도 허물어진 일이 없소. 얻고, 잃고가 다만 한 생각일 뿐, 얻을 때에도 본래 얻은 게 없고, 잃었을 때에도 잃은 게 없는 거요. 얻은 자도 얻음이 없고, 잃은 자도 잃음이 없는 게 진실이라, 항상 본래 그대로여서 도무지 늘거나 줄거나 하는 일이 없으니, 그래서 그것을 일러 여여(如如)하다고 말하는 거요.



화엄경 입법계품(入法界品)에 보면, 선재동자가 마지막에 미륵보살을 만나 미륵탑 속에 들어갔더니, 과거 현재 미래를 통해 계시는 모든 불보살(佛菩薩)들이 한꺼번에 나타나 수많은 대중들 앞에서 법륜(法輪)을 굴리는 모습이 나오는데, 이 길에 들어선 수행자라면 아마 너, 나 할 것 없이 전부 그런 세계에 한번쯤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할거요. 그런데 진지한 수행자라면 그렇게 뭔가 간절히 '하고싶다'는 생각이 들 때, '왜 내가 그런 생각을 하게될까?' 하고 자문할 수 있어야 하오.· · · · · · 가보고 싶은 생각이 왜 나겠소?· · · · · · 우리가 이 특정 공간에 갇혀있다는 생각, 그런 갇혀있다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작용이오. 결론부터 말해서, 과거, 현재, 미래의 일체의 시간적 제약이나 공간적 제약이라 것은 전혀 본래 없었던 허구요.

말을 할 때는 늘 환화공신(幻化空身)이라 하면서도, 이 몸을 물질적인 실체로 보는 것에 대해선 다들 의심의 여지가 없질 않소? 이처럼 미혹한 중생들에겐 이른바 존재와 비(非)존재가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많이 들어서 환화공신이라고 말도 하고, 참으로 그 말씀이 진리라고 입으로는 그러면서도, 마음을 쓸 때에는 여전히 실체와 실체 아닌 것을 갈라놓고 쓰고 있는 거요.· · · · · · 존재가 존재가 아니라는 말이 참으로 사실이라면 과연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이런 진지한 의문을 품고 참구해야 제대로 된 수행자라 할 수 있는 거요.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이란 말은 막걸리 집 벽에도 붙어있을 만큼 흔한 말이지만, 그 뜻을 밑바닥까지 제대로 사무친 사람은 참으로 만나기 어렵소. 여러 말 필요 없이 그 짧은 구절 하나만 제대로 깨닫는다면 앉은 그 자리에서 해탈을 이룰 수 있소.

물질이 곧 그대로 허공이고 허공이 곧 그대로 물질이라는 말이, 말로써가 아니라 사실로 그렇게 나타난다면, 이미 그때는 실제니 허공이니 하는 말 자체가 의미가 없어지는 거요. 도무지 그 어떤 구분도 있을 수 없소. 그 정도 돼야 하나의 참된 성품이 올올히 드러날 수 있는 거요.

그 참성품을 바탕으로 뭐든 짓는 대로 나투어지는 거요. 지어 나투되 어떻게 지어 나투는가?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그렇게 순전히 느낌만으로 나투는 거요. 일체가 느낌만 있을 뿐이오. 어떤 것은 실제고 어떤 것은 허망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고 듣는 것, 또 보고 듣고 해서 우리 의식 속에 축적된 그 모든 것이 다 허망한 그림자 같은 거라 소리요. 그러니 우리가 지금 진실인 듯, 구체적인 사실인 듯 보는 것이나, 머릿속에 허망하게 그렸다고 생각하는 그 허상이나, 사실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소리를 하고 있는 거요.

안으로 일어나는 생각이 남이 없고, 밖으로 보이는 일체 존재가 모양이 없으니, 일체가 적멸한 가운데서 나타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지은 업대로 우리 마음에 나타나는 허망한 그림자에 지나지 않는 것이오. 실상이니 허상이니 하는 말도, 우리가 다만 꿈같고 환(幻)같은 허망한 것들을 전부 실체화하고 고정화했기 때문에 그에 상대해서 허망이란 말도 생겨난 거요. 일체가 꿈같고 환 같은데 실상이니 허상이니 하는 말들이 더 이상 어디 붙을 데가 있겠소?

우리가 이 한정된 공간에 살면서, 있지도 않은 것을 실제로 있다고, 또 일어나지도 않은 것을 실제로 일어났다고 믿어 의심치 않지만, 사실은 그 모든 것이 다만 있는 듯 할 뿐이지 있는 것이 없고, 일어난 듯 할 뿐이지 일어난 것이 없는 게 진실이오.



누군가 나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다고 말했다지만, 참으로 그렇소. 수천만 년 동안 이 지구라는, 절대 시간, 절대 공간이 지배하는 땅 갈피에 달라붙어 축적한 경험, 대단히 불행한 이 경험이 여러분의 그 무한량한 능력을 장애하고 있는 거요. 여러분의 참 마음은 그 어떤 것도 장애할 수 없지만, 다만 여러분 스스로가 어떤 것은 가능하고 어떤 것은 불가능하다고 스스로 정해놓은 거요. 결국 여러분의 그 대단한 지식과 상식이 바로 장애인 거요. 그게 무명(無明)이오. 그 참 마음은 짓는 대로 나툴 뿐인데, 여러분이 불가능하다고 이미 지었으니 불가능할 수밖에 없는 거요.

여러분의 마음을 장애할 수 있는 건 한 물건도 없소. 석벽(石壁)이 석벽이 아니고 대해(大海)가 대해가 아니오. 석벽의 성품이 본래 없고, 대해의 성품이 본래 없소. 수미산(須彌山)의 성품이 본래 없고, 겨자씨의 성품이 본래 없소. 그러니 겨자씨 벌레 먹은 구멍 속에 수미산이 들어간다 한들 전혀 방해로움이 없는 거요. 작은 것이 큰 것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가능하지만, 큰 것이 작은 것 속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어찌 가능한가?· · · · · · 아니오. 큰 것의 성품이나 작은 것의 성품이나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거요. 전부 한 마음에 의해서 껴잡혀진 허망한 그림자일 뿐이오.

이름짓지 마시오. 석벽이라는 둥, 석벽이 아니라는 둥, 이렇다는 둥, 저렇다는 둥 그 무엇도 이름짓지 않고 무엇을 보건, 무엇을 느끼건, 무엇을 체험하건, 여러분의 본래 움직이지 않는, 저절로 항상 환히 밝은, 신령한 그 광명으로 하여금 저절로 빛나게 하시오. 거기에 나타나는 것이 무엇이 됐건, 그게 물질이었건 비(非)물질이었건, 먼 것이었건 가까운 것이었건, 과거가 됐건 현재가 됐건 미래가 됐건, 일체의 시간, 공간적 멀고 가까움, 그 모든 생각을 다만 그냥 보시오.

일체 만법은 자체의 성품이 없기 때문에 있는 그대로 평등한 거요. 멀어도 가까워도 빈 말일 뿐이요, 과거나 지금이나 모두 빈 말만 그러할 뿐이오. 모든 시간적 공간적 관찰은 이미 절대적인 의미가 없는 거요.· · · · · · 물질과 마음, 존재와 비(非)존재, 그러한 일체의 차별이 전부다 한 맛으로 돌아갔을 때, 그게 소위 등각이오. 평등한 깨달음. 그 때 비로소 여러분의 참 마음이 올올히 드러나는 거요.

일승법(一乘法)이라는 말은, 쉽게 얘기해서, 일체 우주 삼라만상, 유정, 무정 할 것 없이 몽땅 통틀어 다 한 바탕이라 소리요. 그 위에서 각자 지은 업에 따라 시간도 펼쳐지고 공간도 펼치고, 이런 모습도 나투고 저런 모습도 나투는 거요. 마치 그림자처럼, 메아리처럼.

하나의 참된 법계만이 있을 뿐이오. 거기엔 두 법이 없소. 이것과 저것, 과거와 현재, 좋은 것과 나쁜 것, 범속한 것과 거룩한 것, 마땅한 것과 마땅치 않은 것 등등. 일체의 대립적인 요소들이 전부 한 모양, 한 맛으로 돌아간 자리. 그것을 일러 일승(一乘)이라고 하는 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