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마음에 능·소(能所)의 자취가 없으면 곧 정각(正覺)이다.
  2. 법문(法門) :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둘이 아니다.
  3. 공안(公案) : 관계치 말라!
  4. 게송(揭頌) : 마음과 경계는 허망하여 서로가 알지 못한다.
 
     
   
     
   

 부처님이 49년 동안 말씀하신 팔만 사천 법문이나, 또 모든 선지식들이 후진들을 위해 노심초사하신 모든 자취는 오직 하나, 중생들이 인식작용에 의하지 않고 직접 대상을 볼 수 있는 지혜를 터득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인식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직접 대상을 볼 수 있는 관법(觀法)을 터득하는 것, 이게 마음공부의 유일한 요체요. 그런데 문제는 인식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볼 수 있는 방법은 말이나 글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데 있소.



 인식작용의 구조는 관찰자와 관찰 대상으로 이루어져 있소. 그러나 그 이름이 무엇이건 간에, 진리가 됐건, 진여(眞如)가 됐건, 혹은 성품이 됐건, 그 바탕은 전부 하나요. 그 한 바탕에서 주어(主語)를 내고, 그 한 바탕에서 술어(述語)를 내는 거요. 다시 말해 모든 이런 것들과 모든 저런 것들이 몽땅 같은 바탕인데, 우리의 인식 작용 때문에 전부 제 각각 다르게 보이는 거요. 그래서 만약 여러분들이 지금 뭔가를 깨달으려 한다면, 바로 이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한 바탕, 한 성품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하오.



 흔히 바다와 물결의 비유를 많이 드는데, 여러분이 뭔가를 알아본다는 것은 이 물결이 저 물결을 알아본다는 얘기와 마찬가지인 거요. 이 물결이나 저 물결이나 모두 바다 위에 잠시 출렁이는 다 똑같은 물일뿐이니, 결국 물이 물을 알아본다는 소리 아니겠소? 제가 제 자신을 알아본다는 것이니, 그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있는 것처럼, 독립된 특정 실체와 또 다른 특정 실체가 서로 마주보거나 혹은 알아본다는 그런 구조 자체가 전혀 허망한 거라 소리요.

 만약 이와 같이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둘이 아니라면,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 · · · · · · · · · · 지금 이 말에 뭔가 알아들은 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이고 수긍을 한다면, 그 사람은 아직 그 말의 참뜻을 모르고 있는 거요.

 구체적이란 말을 썼지만, 구체(具體)가 뭐요? 체(體)를 갖춘다는 소리 아니오?· · · · · · 마음을 돌이켜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나툰 그 본체를 곧장 드러내지 못하고, 그 본체에서 한 번, 두 번 굴러서 나툰, 그 말단의 드러난 모습들에만 관심을 빼앗겨, 뭔가를 계속 긍정하고 혹은 부정하는 일을 계속 한다면, 그 사람은 체를 갖추지(具體的) 못하고 계속 끝에서 먼지만 피우고 있는 거요.· · · · · · 관찰자와 관찰대상을 함께 껴잡아 이른바 이 관찰이라는 모든 현상을 드러낸 그 바탕을 보는 것, 그것이 바로 체를 갖추는 거라 소리요.



 인식작용에 의지하지 않고 대상을 직접 볼 수 있으려면, 지관(止觀)을 알아야 하오.· · · · · · 관찰자와 관찰대상 그 양변(兩邊)이 전부 한바탕에서 비롯된 것이라, 보는 것이 곧 보이는 것이요, 보이는 것이 곧 보는 것이니, 이른바 본다, 듣는다, 안다 하는 따위의 말들이 전부 허망한 빈 말, 빈 소리일 뿐이요, 그 근본은 언제나 한바탕임을 투철히 깨달으면 그게 지(止)요. 무엇을 보았건, 무엇을 들었건, 그 실상은 도무지 들었다할 게 없고 보았다할 게 없는 거요.

 듣기는 들었는데, 그 들은 바는 과거의 업(業) 때문에 나타난 메아리일 뿐이요, 보기는 봤는데, 그 본 바 역시 업 때문에 나타나는 그림자일 뿐이오. 이렇듯 업으로 말미암아 봄이 있고, 업으로 말미암아 들음이 있는 것이니, 그 봄과 들음은 전혀 허망해서 실답지가 않은 거요. 본래 보는 자도 보는 바도 없는 것이 진실인데, 망령되이 보는 자와 보는 바를 멋대로 지어서 좋다 싫다, 옳다 그르다 등등 억지로 구분을 짓고, 또 그것이 뜻에 안 맞아서 옥신각신 하고 있는 거요.

 결국 지(止)라는 것은 능·소(能所)가 없는 관(觀)이오.· · · · · · 관찰자와 관찰대상이 둘이 아닌 한바탕이라는 사실을 확실히 꿰뚫어봄으로써 스스로 고요해지면 그것이 지(止)요. 그리고 고요할 수밖에 없는 그 근본이치 즉, 모두가 한 바탕이 갈라졌기 때문에 생겨난 허망한 짓거리라는 사실을 투철하게 아는 것, 그것이 관(觀)이오.

 이 관(觀)이 생기면 스스로 지(止)가 되오. 지(止)가 깊어지면 관(觀)은 스스로 더욱 더 맑아지고. 이 둘은 따로따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관(觀)이 없으면 지(止)가 생기지 못하고, 지(止)가 없으면 관(觀)이 생길 수가 없는 거요.

 초입에서는 이를 지관이라 하고, 공부가 좀더 깊어지면 이것을 일러 정혜(定慧)라고 하오. 제법실상(諸法實相)을 확연히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이 열리면 저절로 고요해지는 거요. 도무지 시끄러워질 이유가 없으니 지금 우리가 뭔가를 잘못 알았기 때문에 시끄러웠다는 소리요.

 이것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적조(寂照)요. 항상 환히 비출 뿐이오. 이쁘다고 알고, 밉다고 알고, 이렇다고 알고 저렇다고 알고 다 알지만, 그렇게 아는 것은 다만 이런 능·소(能所)의 구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는 사실을 환히 깨달았기 때문에 그 본 바탕은 옴짝도 안 하고 항상 고요하니 적·조(寂照)가 동시인 거요.



 마음공부라는 것은 쉽게 말해 이 지관(止觀)을 닦는 것인데, 여기에 마음공부 하는 '나'가 있고, 그 마음공부를 통해 '나'가 도달해야 할 미래의 훌륭한 '나'가 있다면 그건 지관 하는 게 아니오. 시끄럽기만 할 뿐이오. 결코 공부하는 자와 짓는 바 공부가 따로따로가 아닌 거요.



 우리 마음속의 모순, 갈등, 고뇌 모든 것은 본래 한 바탕인 것이 둘로 갈라져 충돌하는 바람에 생기는 거요. 하지만 그 모든 대립 개념들은 전부 업 따라, 인연 따라 메아리나 그림자와 같이 잠시 있는 것처럼 보일 뿐 실체가 없는 거요. 그 낱낱의 것들을 전부 하나하나 들추고 따지고 해서 없애는 것이 아니고, 지혜의 눈이 확연히 밝아지면 지금껏 내 마음속에서 갈등을 일으켰던 그 모든 것들이 전혀 까닭 없는 것임을 알게 되는 거요. 단박에 근본을 밝혀내야 된다 소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