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법의 성품은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다.
  2. 법문(法門) : 모든 법의 성품이 비었으니, 이 공(空)이 곧 심성(心性)의 근원이다.
  3. 공안(公案) : 일체법이 모두 '한 성품'(一性)이라, 그 어떤 법도 '나'를 괴롭히는 일이 없다.
  4. 게송(揭頌) : 모든 법은 체성도 작용도 없어서 온갖 것은 서로 알지 못한다.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거의 예외 없이, 현재의 미혹한 '나'가 경전도 많이 읽고 법문도 많이 듣고, 때에 따라서는 전통적으로 권위가 있다는 온갖 고행도 마다 않는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연장선상에서 마침내 그 무엇에도 끄달리지 않는 여여(如如)한 성인의 풍모(風貌)를 갖추는 것으로서 수행의 목표를 삼는다.· · · · · · 그러나 결론적으로 말해, 이러한 수행은 결국 그 중심에 항상 '깨달아야 하는 나'가 철옹성 같이 자리 할 수밖에 없고, 그러한 수행이 계속 되는 한, 그 뿌리는 점점 요지부동으로 굳어질 수밖에 없다.

 그쯤 되면 만법이 인연생기(因緣生起)라거나, '나라고 할만한 나는 없다'라는 말들은 그저 듣기 좋으라고 하는 괜한 말쯤으로 흘려버리기 십상이다. 스스로는 지극히 올바르게 수행을 하고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성인의 뜻과는 정반대로 내닫고 있는 꼴이니, 그야말로 첫 단추부터 철저하게 꼬이는 것이다.

 물론 처음 입문하는 시점에서야 그러한 접근이 무리가 아닐 수 없겠으나, 참으로 지혜가 밝은 사람이라면 입문하면서부터 듣게 되는 연기법(緣起法)에 대한 깊은 참구를 통해 과연 수행의 주체로서의 '나'란 누구인가라는 의증을 내기 마련이다.· · · · · · 지금 '나'의 목전에 보이고 들리는 무수한 바깥 경계는 고사하고 가장 가까이의 이 '자기(自己)'에서부터 공부가 시작되는 것이다. 올바른 수행은 이러한 참구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다.



 예로부터 숱한 말씀이 있어왔지만, 그 모든 말씀은 결국 만법이 인연생기라 그 무엇도 자체성이 없다는 말로 귀결된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모든 법의 성품이 허공성(虛空性)이요, 무생성(無生性)이라 그 무엇도 집착할 것도 없고, 여읠 것도 없으며, 긍정할 것도 부정할 것도 없다는 사실, 법성공(法性空)을 투철하게 깨달아야 한다.

 모든 법의 성품이 비었으니, 더 이상 미혹한 중생도 없고 깨달아 마친 성인도 없고, 해탈도 없고 속박도 없다. 그 모든 것이 다만 인간이 의식으로 제 멋대로 가져다 붙인 개념이요, 빈 이름일 뿐이니, 그것이 정신작용이 됐건 물리적 실체가 됐건 모두 한 성품이 인연 따라 꿈처럼 환처럼 잠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빈 도리'를 말하고 있는 사람이나, 또 이와 같은 말을 듣고 있는 사람이나, 자·타, 피·차가 몽땅 빈 것이니, 그 내용이 해탈이 됐건 열반이 됐건, 부처가 됐건 중생이 됐건 그 모든 언설이 지금 당장 저절로 끊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 · · · · 이렇게 일체의 희론(戱論)과 망정(妄情)이 몽땅 쉬게 되면, 그때 비로소 오직 '참된 하나'(眞一)만이 훤칠하게 드러날 것이니, 행여 그 자리를 본 자가 있어서 그것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부리를 댄다면 그 사람은 여전히 의식의 구렁텅이 속에서 자맥질을 대는 것과 다르지 않다.



 경전(經典)의 말씀에 다음과 같이 이르고 있으니, 그 뜻을 깊이 참구하여 길을 잃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다.

 『만법이 본래 생멸이 없음은, 마치 순금이 장인(匠人)의 솜씨로 그릇이 이루어지되, 금의 체성은 변하지 않는 것과 같다.

 '한 마음'이 바로 만법인지라, 다시는 먼저와 나중이 없는 것과 같다. 이 같은 이치로, 부처가 되었을 적의 마음이 늘지 않았고, 범부일 때의 마음 역시 줄지 않았으니, 마음이 인연을 따를 적에 제 성품을 잃지 않기 때문이다.

 상(像)이 생긴 것은 다만 인연이 생겼을 뿐이고, 상이 없어진 것도 다만 인연이 없어졌을 뿐이라, ― 상(像, 諸相이 非相)은 원래가 제 체성이 없다. 마찬가지로 부처가 된 것은 깨끗한 인연이 생겼을 뿐이요, 범부가 된 것은 물든 인연이 났을 뿐이니, ― 범부와 성인은 본래 남(生)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체만법은 다만 인연을 따를 뿐, 제 성품이 없으며, 본래 생겼던 일도 없고, 지금에 없어지는 일도 없는 것이다.

 바로 짓는 때에도 지음이 없고, 짓는 이도 없으며, 하는 때에도 함이 없음(無爲)이어서, 모두가 제 성품이 없다. 그러므로 항상 '본래의 만법'(法性이 無性이라 生滅이 없다) 그대로요, 항상 아직 생기지 않았을 적과 똑 같다. 가령 중생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하더라도 이 '성품 없음의 종'(無性宗)을 여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