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만법이 끝끝내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다.
  2. 법문(法門) : 제법실상을 알면 모든 말은 저절로 끝난다.
  3. 공안(公案) : 천 성인(聖人)이 머물지 않으니 자취가 없다.
  4. 게송(揭頌) : 허공을 더듬고 메아리를 좇으니· · · · · ·
 
     
   
     
   

 언어도단(言語道斷), 불립문자(不立文字), 언소불급(言所不及)· · · · · · 이 길에 들어선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봤을 문구들이다. 말이나 글로는 이 법을 담아낼 수도 없고, 또한 추구할 수도 없다는, 이러한 개략적인 사전적 의미를 모르는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그러나 한결같이 말과 글이 전부 비었고 없다고만 한다면 과연 무엇으로써 깨달을 수 있겠는가? 옛 성인들이 우리에게 전하려 했던 그 깊은 뜻을 알아차리기 위해 우리에게 허락된 유일한 도구가 말과 글뿐이라면, 이 때는 어찌해야 하겠는가?

 진지한 수행자라면 여기서, 왜 말과 글은 깨닫는 데에 전혀 소용없는 것이라고 곧장 말하지 않고, 말 길이 끊어졌다거나, 문자를 세울 수가 없다거나, 혹은 말로는 미치지 못할 바라고 둘러 말한 이유를 깊이 되짚어 봐야한다.



 이 길에 들어서 길을 잃지 않으려면 우선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고 있는 말의 구조와 기능을 잘 살펴보아야 한다. (제 6장. 언어의 허구성 참고) 앞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모든 말은 그 어미가 궁극적으로 '이다' 혹은 '아니다'로 끝난다. 이것은 다시 말해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이분법적 선택 이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뜻이다. 그러나 태어나면서부터 이러한 언어습관 속에 젖어 살아온 사람이라면 이런 이분법적 선택이 전혀 이상하거나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너무 당연한 것으로 여겨질 것이다. 범부가 깨닫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중의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다.

 진리는 본래 스스로 원만하건만 말은 그 자체가 이미 치우침이기 때문에 어떠한 방법으로도 말로는 그 온전한 진리 전체를 드러낼 방법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말로는 미치지 못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만법이 끝끝내 비어서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제법실상(諸法實相)이라고 들으면, 즉각적으로 '아무것도 없는 것이 제법실상'이라는 지극히 피상적인 지식(相) 한 토막을, 켜켜로 쌓아올린 기존의 지견 위에 또 하나 얹음으로써 제법실상을 다 알아 마친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된다. 이는 반편(半偏)일 수밖에 없는 몇 마디 말을 앵무새처럼 배워 익힌 것뿐이지, 그 말을 한 성인의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이다.· · · · · · 범부의 알아듣는 방식이 전부 이러할진대, 거기에 어찌 참된 깨달음이 있을 수 있겠는가? '있다고 하면 있는 줄만 알고, 없다고 하면 없는 줄만 아는 당나귀'라는 경책이 이쯤 되면 전혀 지나친 말이 아니지 않는가?

 있음을 배제한 없음이 아니요, 없음을 배제한 있음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그러니 있음이 있음이 아니요, 없음이 없음이 아닌 것이다.· · · · · · 이분법적인 의식구조로는 도무지 애매모호하고 논리적이지 않아 보이는, 궁극적으로는 말과 글을 넘어서서, 애매모호함도 명확함도, 논리도 비논리도 모두 아우르는 그 이면에 바로 옛 성인들의 참 뜻이 있는 것이다.



 말과 글을 배우고 익히는 데에만 골몰하여, 불법(佛法)에 관한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진리에 가까워지는 것이라는 어리석은 생각을 고수하는 한, 그만큼 구경(究竟)과는 멀어질 뿐임을 확실히 알아야 한다. 만법이 끝끝내 비었다면, 그러한 말은 무엇이고, 그 말이 담고 있는 의미는 무엇이며, 그러한 숱한 지견들과 그 지견들을 기억해 간직한, 목에 힘을 주고 있는 그 자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 · · · · 만법이 끝끝내 비었다면 거기에는 그 어떠한 예외도 있을 수 없는 것임에도, '나'와 내가 힘들게 알아낸 고귀하고 오묘한 깨달음은 비기는커녕 여전히 기세 등등할 뿐이다.

 성인의 뜻을 전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말과 글이라는 방편을 사용했을 뿐, 말과 글 속에는 진리도 제법실상도, 해탈도 열반도, 그 무엇도 담을 수 없는 것이니, 오죽하면 할 말이 없어서 하지 않을 수 없는 말이라는 소리까지 했겠는가?

 말과 글의 이러한 구조적 한계에 순식간에 걸려들지 않도록 참으로 삼엄하고 삼가는 마음으로 다음 경전의 말씀을 잘 숙독해 보아야 할 것이다.



 불장경(佛藏經)에 이르기를,· · · · · ·

 『모든 법은 마침내 공하여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이것이 모든 법의 실상(諸法實相)이다. 공하여 아무 것도 없는 법, 이것이 곧 염불(念佛)이며, 모든 생각을 여의어서 나지 않으면 그 마음에는 분별이 없고, 이름도 없으며, 장애도 없고, 욕심도 없으며, 얻을 것도 없어서 도무지 각관(覺觀)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와 같은 생각에는 탐냄도 없고(貪慾 있음 뿐 아니라 貪慾 없음까지도 보낸다) 집착함도 없으며, 거역함도 없고 순종함도 없어서, 이른바 생각 없음(無念無想)이라 한다.』

 다만 교화할 인연이 있으면 세속의 언설로써 말하기를,· · · · · ·

 『네가 염불할 때, 조그마한 생각도 취하지 말고 쓸모 없는 의론(議論)도 세우지 말며, 분별도 내지 말라. 왜냐하면 일체법은 공하여 체성이 없어서 한 모양도 생각할 수가 없고, 이른바 '모습 없음'(無相)이기 때문이니, 바로 이것을 참된 염불이라 한다.』고 하였다.



 또한 화엄경에는 제법실상을 분명히 보는 '지혜 바다'의 해탈문(解脫門)을 언급하고 있는데, 진실상(眞實相)에는 대략 세 가지 뜻이 있으니, 경(經)에 이르기를,· · · · · ·

 『⑴ 지(智)로써 사(事)의 여실한 상(如實相)을 관하는 것이니, 곧 사(事)가 허망하지 않음인 연고이다. 따라서 유위법(有爲法)의 여실한 상(如實相)을 관하는 연고이다.

 ⑵ 혜(慧)로써 이(理)의 실다움을 관하는 것이니 곧, 무상(無相)인지라, 상(相)과 비상(非相)이 모두 없음이 이 실상(實相)인 것이다.

 ⑶ '걸림 없는 지혜'(無碍智)로써 '둘 없음'(無二)의 실상을 앎이니, 실(實)을 다한 고로 깊고, 변(邊)을 다했으므로 넓다.

 곧, '지혜의 바다'에 칭합하여 상(相 ⇒ 想, 모든 생각이 本來 無生이다)의 결박이 되지 않는 것이 이 해탈문(解脫門)이다.』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