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아(自我)를 소멸시킬 방법은 무엇인가?
  2. 법문(法門) : '나 있음'이나 '나 없음'이나 전부 빈 말일 뿐이다.
  3. 공안(公案) : '근본 마음'은 알거나 깨달음으로 말미암지 않는다.
  4. 게송(揭頌) : 도(道)는 승·속(僧俗)을 가리지 않는다.
 
     
   
     
   

 범부들은 '앎이 있음'과 '앎이 없음' 두 가지가 대두되었을 때, 거의 십중팔구 '앎이 있음'을 취하는 게 일반적인 모습이오. 그러다가 여기저기서 법문도 듣고 경전도 읽으면서, 아는 게 많으면 그만큼 더디다는 말들을 자주 접하고는, 이번엔 '앎이 있음'을 버리고 '앎이 없음'을 취하려고 하오.· · · · · · 그렇게 늘 이쪽, 저쪽 양변에서 놓여나질 못하고 매양 양쪽을 오가며 문밖에서 먼지만 피우는 이유가 무엇일 것 같소?· · · · · · 자아(自我)때문이오. 수행의 주체가 바로 '나'이기 때문에 그렇소.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진실에 닿으려고, 실다우려고, 참되려고.· · · · · · 누가?· · · · · · · · · · · · 그러니 그 수행의 주체인 '나'가 완강히 고개를 추켜들고 '앎이 있어야 할까, 없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게 완벽한 깨달음일까' 등등, 그리하고 있는 동안은 수행의 주체가 계속 '나'요.



 단적으로 얘기해서 범부한테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은 고(苦)와 낙(樂)이오.· · · · · · 누구나 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또 그러한 생각을 너무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있소. 그러나 어떤 형태이든 간에 고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것은 전적으로 자아의 도피과정 이외에 아무 것도 아니오. 고에서 벗어나 낙으로 가려고 하는, 인간에게 너무 당연한 이 바램조차도, 전부 '자아'로 말미암아 비롯된다는 걸 알아야 하오.

 본래는 모든 게 다, 어느 것 하나 부러울 것도 모자랄 것도 없는, 있는 그대로 항상 온전하고 완벽한 거요. 그런데 이 자아라는 중심이 생겨버리면 생각과 그에 따른 행위가 일어나게 돼서, 뭔가를 자꾸 조작하고 도모하며 계교(計巧)를 부리게 되는 거요. 그러고 있는 동안은 이 '나'가 점점 강화될 수밖에 없소. 이놈이 강화된다는 것은 본래의 깨달음, 즉 본각(本覺) 자리를 점점 등진다는 얘기요.· · · · · · 끊임 없이 진리와 진리 아님을 분별하고, 또 그러한 진리를 추구하려 애쓰고 있는 자가 누군지, 그 근본을 알기 전에는 정작 진리에 도달할 수가 없소.

 불법에 처음 인연을 맺은 초심자들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오. 비단 초심자뿐만 아니라 수 십 년을 수행이라는 이름으로 몸과 마음을 갈고 닦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전부 이 첫 단추를 잘못 꿰어서 지금 어느 곳을 헤매고 있는지조차 모를 지경이오.· · · · · · 이 사실을 확실히 이해해야 모든 유위(有爲)의 노력을 그칠 수가 있는 거요.



 이 세상 일체만유 그 어느 것 하나도 진리 아님이 없다 소리는 불가(佛家)에서 흔히 듣는 얘기요. 어디 저 높고 거룩한 곳에만 있고 여기에는 없는 것이라면, 그건 진리라 할 수 없는 거요. 진리라는 건 모름지기 언제, 어디서나 항상 참다워야 진리요.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새삼스럽게 진리를 추구하려고 마음먹는 그 자체가 뭔가 잘못됐다 소리 아니겠소? 우리는 단 한 순간도 진리 밖에 있어본 적이 없는 거요.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전체에서 '나'를 떼어내어 저 멀리 어느 바깥에, 아무에게나 드러나지 않는, 그러한 진리가 있다는 착각에 빠져버리게 하는, 그게 바로 '나'요. 이 '나'라는 놈이 그런 허망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거요.

 진리라는 것이 인간의 의식으로 포섭될 수 있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그 진리라는 개념마저도 자신의 필요에 의해, 자신에게 이로운가 해로운가, 해로우면 막고 이로우면 취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거요. 그러니 본래 온전한 그 자리에 숱한 이름과 개념을 제 멋대로 마냥 지어놓고 스스로 얽매여 얼마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거요.· · · · · · '본래의 깨달음(本覺)'에는 그 어떤 중심도 없소. 이러저러한 모든 욕구나 바램은 단지 자아라고 하는 터무니없는 중심으로 말미암아 생기는 것일 뿐, 그런 중심이 본래 없는 것이니 도무지 이롭고 해롭고를 따지는 분별은 애당초 있을 수 없는 거요.



 지금은 깨닫지 못한 범부 신세지만, 앞으로 열심히 갈고 닦아 먼 훗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리라는 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바램이오. 즉, 어떻게 하면 빨리 불각(不覺)에서 탈출하여 본각(本覺)에 도달할 수 있겠는가? 오로지 관심은 거기에만 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오. 그러나 그러한 노력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열심이면 열심일수록 굳어지는 것은 자아뿐이오.· · · · · · 뭔가 진리를 지향하고 그 진리를 탐구해야 되겠다고 마음을 내는 그 근원을 투철히 사무치지 못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본각에 접근하는 것 같지만, 본각은커녕 자신이 머릿속에 그린 환영만을 쫓고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잊고 있는 거요.

 불각이니 본각이니 하는 것은, 중생의 그 게으르기 이를 데 없는 마음을 분발시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갈라서 얘기한 것일 뿐, 절대로 두 법은 없소.· · · · · · 만약 본각이니 진리니 하는 것이 전부 허망한 말뿐인 줄로 안다면, 그와 동시에 곧 불각이라는 말도 다해버리는 거요. 본각이 본각이 아니고 다만 그 이름이 본각이니, 본각이란 말이 빈 말이라면 본래 불각이라는 말도 붙을 자리가 없는 거요.

 그러니 미혹함이니 깨달음이니 하는 그 말 자체를 여러분 마음속에서 깨끗이 쓸어내시오. 본각이라 함은 깨달음에도 미혹함에도 속하는 것이 아니니, 본래 일체 만법을 넘어서 있는 거요. 그러니 불각을 짓고 본각을 짓는 것은 괜한 사단을 벌여 불각에서 본각으로의 도피를 시작한다는 것이니, 그 도피과정은 그 명목이 아무리 정당하고 훌륭할지라도 자아의 강화에 지나지 않는 거라 소리요. 자기 나름대로는 자아라는 껍질을 깨려고 무던히 애쓰고 있는데, 알고 보니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자아를 도로 강화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하오.· · · · · · 그래서 노력하면 틀린다, 하면 틀린다는 얘기가 있는 거요.



 지금까지의 얘기를 듣고, 뭔가 깨달아 마치려고 늘 목말라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봤을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소?· · · · · · 이젠 안 하려고 하지 않겠소? 거의 자동적으로 깨달음을 향해 헐떡이는 스스로를 억제하려 들 거요. 그러한 헐떡임이 모두 자아의 강화일 뿐이니 이젠 예전처럼 그렇게 애타하지 않고, 의젓하고 느긋하고 태연하리라.· · · · · · 하지만 그렇게 모습을 바꾸려 하는 시도 역시 자아가 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오.

 무명을 극복하고 깨달음을 얻으려는 지금까지의 끊임없는 노력이 전부 자아의 강화일 뿐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참으로 지혜로운 사람은 노력하는 것과 노력하지 않는 양쪽을 다 보낼 테지만, 자아의 뿌리가 워낙 깊이 남아있기 때문에, 노력하던 것을 그만두고 노력 안 하는 쪽으로 달려가 붙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오. 여전히 자아가 이쪽저쪽을 저울질하여 그 양변에서 왔다갔다하는 버릇이 쉬질 못하는 거요.

 이런 식으로 끊임없이 뭔가 마음을 내고 생각을 일으키고 뜻을 세워 뭔가를 하려 하는 한, 그 무엇인가로부터의 도피와 저항은 계속될 수밖에 없소. 그렇게 하고 있는 그 행위자체가 너무 정당하다고 여겨지기 때문에, 자기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는 거요.· · · · · ·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라는 말을 깊이 새겨봐야 할 대목이오.



 본각 자리에서 보면 자아가 자아가 아니오. 아무리 철옹성 같은 자아라 할지라도 그건 단지 한 생각 느낌으로 나타나는 허공꽃일 뿐이오. 그 자리에는 '자아 있음'이니 '자아 없음'이니, '나'니 '나' 아니니 하는 따위가 본래 없는 거요. 그러니 '나 있음'이나 '나 없음'이나 전부 빈 말만 있을 뿐이요, 자기중심적 행위였건 자기중심적이 아닌 행위였건 도무지 문제가 될 일이 본래 없는 거요. 바람이 왼쪽으로 불면 어떻고 오른쪽으로 불면 어떻겠소?· · · · · · 모든 작용은, 작용이 작용인 채로 곧 고요함인 거요.

 마음이 일어나거나 마음이 일어나지 않거나, 그 본 바탕은 티끌 하나 움직인 조짐도 없소. 일어남이 곧 일어나지 않음인 것이니, 모든 대립적인 언어나 대립적인 개념은 중생이 미(迷)해서 다만 느낌으로만 따로따로인 것처럼 느껴질 뿐, 본래는 모두가 한 바탕 한 성품인 거요.· · · · · · '나 있음'이나 '나 없음'이나 본래 그게 전부 꿈속 같은 거요. 꿈속에서 겪는 것과 같은 일을 가지고 숱한 이름을 지어, 좋고 싫음, 높고 낮음을 매겨놨기 때문에 까닭 없이 산란스러운 것뿐이오. 그러한 모든 양변이 전부 빈 이름뿐이요, 전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확철하게 꿰뚫어 사무쳐야 비로소 심안(心眼)이 열리는 거요.